【한명철 목사】 말씀을 밝히 깨우쳐 준행케 하는 말씀사역자

  • 입력 2022.01.07 09:35
  • 수정 2022.01.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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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8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말씀을 알되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사실 누구나 말씀을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한다. 말씀을 제대로 알려면 말씀을 무엇보다 가까이 해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면 밝히 아는 길이 아예 막혀버린다. 자연히 말씀을 가까이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자주 읽고 많이 읽고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 읽은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고 묵상하는 삶이 매일의 일과가 되어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이 면에 있어 탁월함을 유지해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기도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 관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지도자는 말씀을 희미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던져준다. 위대한 성경 교사는 하나님이 내신다. 교회는 말씀 통달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할 때 백성들 곁에서 그 말씀을 해석하고 깨닫도록 돕지 않았다면 거국적인 회개의 역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스라는 한 사람일지라도 말씀을 해석하여 백성의 지각을 열어주는 조력자는 많아야 한다. 그야말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다윗에게 도울 용사가 많이 모여들었음은 통일 왕국 형성에 결정적이라 할 만큼 절대 유익이었음도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첫째, 이단을 경계한다.

말씀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어렴풋이 알면 적용이 쉽지 않다. 진리는 희미하지 않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분명하다. 이단이나 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경계가 모호하다. 진리에 서지 못한 영혼들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도 경계 선상의 모호함 때문이다.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기에 언제나 진리의 끝에서 역사한다. 이단은 진리의 중앙에 접근하지 못한다. 진리의 변방에 머무르며 중앙으로 침투하고자 늘 살핀다. 진리의 중앙이 위협당하는 것은 진리의 변방이 늘 소란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중심에는 빛이 가장 강한 고로 어둠인 이단의 가르침이 접근하기 어렵다. 어둠은 빛 앞에서 그 정체가 확실히 드러난다.

진리의 선명함은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앎으로 좌우된다. 마늘의 겉껍질과 속껍질을 다 벗겨내 마늘의 실체를 대하듯 그렇게 속속들이 아는 앎에 비유할 수 있다. 말씀을 명확히 알면 진리와 거짓 가르침을 분간할 수 있다. 지금은 혼란의 때이다. 거짓이 진리의 옷으로 갈아입고 교회에 침투해서 버젓하게 활개치고 있다. 무분별한 관용이 교회의 판별 능력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근거지를 확보한 거짓은 분별력이 약한 신자들을 공략하여 그들의 영혼을 핍절하게 만든다.

원래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진리의 터요 기둥이다. 하나님이 꽂으신 말씀의 깃대이다. 언제부터인가 터는 흔들리고 기둥은 무너져버렸다. 여기저기 찢겨져나간 깃발은 바람에 펄럭일 기세조차 잃어버렸다. 교회 안에 거짓을 대적할 힘이 사라졌다. 진리로 충만하여 철옹성 같던 교회가 세상과의 타협을 모색하다 덜미를 잡혀버렸다. 양보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상대화시킴으로 세상의 박수는 받았으나 교회 본연의 힘을 잃어버렸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떼들로 인해 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더러운 균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음지마다 독버섯처럼 피어난 이단의 가르침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교회가 말씀 적용에 실패하고 말씀의 권위에 불복할 때 이단이 서식하기 가장 좋다. 최선의 이단 퇴치법은 말씀 바로 깨닫기 운동이다. 말씀 밝히 알기 운동이다. 말씀 낱낱이 지키기 운동이다.

말씀 바로 깨닫기 운동

말씀 밝히 알기 운동

말씀 낱낱이 지키기 운동

 

둘째, 결점을 보충한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던 백성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선생들과 레위인들의 도움으로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의 말씀을 모두 깨달았다. 그들 가운데 즐거움이 있었다. 죄는 속하고 근심은 사라졌다. 슬픔의 날이 변하여 기쁨의 날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자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에스라의 처소로 몰려들었다. 백성들이 밝히 알게 된 그 말씀을 그들 역시 밝히 알기 위해서였다. 말씀의 영이 그들을 깨우쳐 초막절 절기를 회복시키기에 이르렀다. 에스라의 말씀 낭독은 초막절을 지키는 칠일 내내 계속되었다. 팔일 째에 이르러 성회를 열었다. 금식의 영이 임하여 모두 모여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썼다. 1/4은 서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1/4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경배 드렸다. 그들은 하나님과 견고한 언약을 세워 인침으로 자신들의 결심을 확고히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지침이요 삶의 나침판과 같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은 해도와 나침반 그리고 하늘의 북극성을 향도로 삼기에 폭풍우를 만나도 태연할 수 있다.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때에도 배가 어디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안다. 암초와 빙산의 위험을 알며 생사의 고비를 잘 비켜간다. 나침반이 고장 나면 큰일이다. 요즈음은 웬만한 자동차마다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서 길 찾기가 여간 간편한 게 아니다. 방향을 알리는 기계는 바늘이 정확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말씀의 계기판은 정확 무오하다. 사람이 정도를 걷기에 충분하다.

말씀은 저울이요 촛불이며 거울이다. 부족함을 드러내고 연약함을 비추며 어긋난 것을 보여준다. 말씀이 당신의 영혼을 달아보고 말씀이 당신의 삶을 재어본다. 당신에게 있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도 말씀이 지적한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만이 당신을 정죄할 수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밝히 알게 되자 하나님 섬김에 있어 부족한 점이 무엇임을 금방 깨달았다. 그들은 그 결점이 있는 부분을 과감히 보수했다. 그들의 인침은 즉각적인 실행으로까지 나아갔다.

셋째, 말씀을 준행케 한다.

말씀을 준행하려면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준행의 의지는 철석같다. 말씀 준행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나 풍성하기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행에 실패하는 것은 먼저 깨달음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파종에서 실패하면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말씀 준행의 의지조차 지니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할 때에 밝은 깨달음을 원하지만 모든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먼저 진리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말씀을 대하면서 깨닫고자 하는 열의와 진지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준비된 심령에게 진리의 성령은 말씀을 가장 명확히 알려준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인봉되었던 말씀을 열어 보여주시고 말씀이 지닌 의미를 입체적으로 보게 만드신다. 성령이 가르치지 못할 말씀은 하나도 없다. 성령은 주님의 모든 말씀을 낱낱이 알려주신다. 그가 곧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말씀의 해석자는 성령 안에서 진리의 잣대를 지녀야 한다. 성령의 조명 앞에는 모호한 말씀이 깨끗이 사라진다. 안개가 걷히듯 진리가 선명해진다. 말씀의 경계선이 뚜렷해지고 말씀의 중심과 변방이 밝히 드러난다. 밝히 알면 준행하기가 어렵지 않다. 말씀을 명확히 풀이하면 말씀이 지닌 권능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 권위 앞에서 불순종이 역사할 틈은 없다. 말씀을 들어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준행에 실패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말씀을 밝히 알았다 함은 말씀을 준행할 힘이 생겼다는 말과 동일하다. 말씀을 밝히 알았다 하면서 말씀을 준행하지 않으면 그의 고백이 거짓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말씀을 밝히 앎과 거의 동시에 준행할 힘이 위로부터 주어진다. 결국 말씀을 준행할 의지가 당신에게 있지만 그 말씀을 준행할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말씀 준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은 이 은혜가 늘 임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제자들과 모친 마리아를 위시한 여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강림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썼다.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주님을 잃었다가 부활의 기적을 체험한 그들의 마음은 많이 고무되어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는 제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제자 일행은 정해진 장소에 모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들은 받은 말씀을 순종하여 그대로 지켰다. 모여라 해서 모였고 떠나지 말라 해서 떠나지 않았다. 기도하라 해서 기도했고 기다리라 해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자 성령이 임하셨고 제자 일행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는 완악한 군중들의 마음에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하나같이 통회 자복했다. 3천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들 역시 제자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따라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 생활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준행했듯이 회심한 군중들도 제자들의 가르침을 삶속에서 실천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 앞에 펼쳐져 있다. 한없이 좋고 귀한 약속의 말씀들이 준행자를 통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었고 아낌없이 주어졌다. 당신의 과제는 말씀의 약속을 성취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말씀의 역사를 일으켜 세우며 말씀의 생명을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이 당신의 말씀 사랑 곧 준행을 목말라 기다린다.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준행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 스스로 밝히 알고 깨달은 말씀이 형통의 능력으로 역사되도록 해야 한다. 약속도 하나님이 주셨고 역사도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 말씀을 지켜야 할 몫은 당신에게 주어졌다. 당신은 다만 준행자이다. 입법자로서 당신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나중 재판자로서 당신의 준행 여부를 판단하실 것이다. 영원하신 말씀의 역사 유무가 연약한 당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되어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당신의 구체적인 암송과 묵상과 준행의 삶으로 엮여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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