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58)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1. 위치

이 단락은 앞의 E(17:1-10)와 병렬됩니다. 바리새인의 물음에 예수께서 대답한 후,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나라(basileiva/바실레이아)’에는 다스림’, ‘통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앞의 E와 잘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고(4:43), 제자들에게도 전하게 하였습니다(8:1; 9:2, 60; 10:9).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10:9,11).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9:27) 말씀합니다. 죽은 자의 장사를 죽은 자들이 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하며(9:60),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도 말씀합니다(9:62).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귀신을 쫓겨 간 다음 임합니다(11:20).

이래서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며, 이미 임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누가교회에 있었습니다(19:11). 바리새인의 질문은 이런 누가교회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2. 구성

20-21절과 22-37절을 구분하기도 연결하기도 합니다. 구분하는 것보다 연결된 하나의 단락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오고 있다(20)’/‘올 것이다(22)’여기 있다, 저기 있다(21)’/‘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23)’의 내용들이 둘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답한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는데, 그 내용 역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기에 대해서 바리새인이 예수께 질문합니다(어느 때/토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예수의 말씀을 생각하면, 바리새인의 이 질문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리새인이 질문한 시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용어로 대답하고,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인자의 날에 대해서 말합니다.

 

3. 인자의 날

인자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 이날을 다니엘의 예언(7)과 연결해서 인자 같은 이가 고난 뒤에 하나님께 정당성을 인정받을 그 날을 가리키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인자의 날역시 하나님 나라처럼 볼 수 있게 오지 않으며, 오는 장소도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종말이 왔다거나, 당장 올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을 배격합니다(19:11). 그래서 누가 그 장소를 말해도 가지 말고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자의 날은 번개가 치는 것과 같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언제, 어디서 임하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날에 대해서 시기와 장소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고 거짓입니다.

 

a. 볼 수 있게(페라테레세오스)

하나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보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의학적인 진단. 처치와 관련한 관찰을 말하거나, 별들의 배열을 살피는 관찰을 할 때 사용 됩니댜. , 이렇게 관찰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21절 하반절은 가르 문장으로 그 이유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기에, 밖에서 아무리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b. 너희 안에(ejntov"/엔토스)

개정역의 너희 안에너희 가운데너희가 닿거나 잡거나 소유할 수 있는의 의미가 있다고 피치마이어(J.A.Fitzmyer)는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무화과나무 싹이 나는 것을 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그렇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21:31). 정확한 시기를 모르지만, 그 시기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같이 인자의 날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이날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저기 있다, 여기 있다고 해도 가거나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에 대해서 누가는 가르(gavr)문장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번개가 칠 때, 그 번개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번개가 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자의 날은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언제 어디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자의 날 이전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자의 날 이전에 인자는 이 세대에 의해서 버려질 것입니다(25).

 

c. 세대(게네아/geneav)

세대는 중립적인 단어인데, 누가는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합니다(7:31; 9:41; 11:29-32,50-51; 16:8; 17:25). 예수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세대 사람에 빗대어 말합니다(7:30). 이 세대는 악한 세대(11:29)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에 의해서 정죄당할 정도로 악합니다(11:30,32). 선지자의 피 값을 이 세대는 담당해야 합니다(11:50), 그리고 종국에는 이들은 인자마저 버립니다(ajpodokimavzw/아포도키마조,17:25). 누가의 다른 구절에 보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9:22; 20:17; 22:2)이 인자를 버립니다.

 

d. 노아의 때와 롯의 때

예수는 인자의 때노아의 때(26-27)’롯의 때(28-32)’와 연결시켜 말합니다. 노아의 때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로 인해 모두 다 멸망당하였고, 롯의 때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모두 멸망 당했습니다. 두 날은 모두 멸망의 날입니다(27. 29). 예수께서는 인자의 날을 이 두 날과 연결해서 말하는 것은 인자의 날 역시 멸망의 날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사람들이 멸망당한 것은 이들이 특별히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이 한 행동은 모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자의 때도 멸망의 날이기 때문에, 예수는 멸망 당하지 않을 지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붕 위에 있으면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밭에 있으면 돌이키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와 롯의 때에 사람들이 목숨을 위해서 살다가 멸망당한 것처럼, 인자의 때에도 목숨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살기 위한 처신을 말한 다음, 누가는 다시 한번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된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멸망 당한 것은 악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목숨을 보존하려는 것을 악하다 말할 순 없지만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잃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누가는 말합니다(. 9:24).

 

e.데려감과 버려둠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누가는 한자리에 누워 있다가, 함께 맷돌을 갈다가, ‘데려감과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데려감과 버려둠에 대해서는 상반대 주장이 있습니다. 멸망에서부터 데려간 것인지 심판을 위해 데려간 것인지, 멸망에 버려진 것인지, 구원을 위해 남겨진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노아와 롯의 때와 연결해 보면, 방주로 데려가는 것과 멸망의 도시에서 남겨두지 않고 데려가는 것을 생각하면, 데려감은 멸망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고, 버려둠은 멸망에 남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f. 언제 임합니까?

제자들은 묻습니다. 주여 어디입니까? 이 질문은 바리새인이 처음에 물었던 언제 임하느냐? 의 질문과 유사합니다. 제자들은 구원을 위해 데려갈 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묻는 장소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이 말씀 또한 해석이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인자의 날에 대해서 시간과 장소를 말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그날을 알려주는 징조는 분명히 있습니다. 고난이 있으면 인자의 때가 올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이 날이 올 것인가 관찰하여 살필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이 온다 해도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비장한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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