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59)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1. 들어가기 전에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말하면서 가르치고 전도했다 말합니다(4:14-44). 이를 위해 예수는 제자를 선택하며(5:1-6:16), 선택한 그들에게 평지설교로 가르칩니다(6:17-49). 우리가 기다려야할 분이 예수인가?하는 요한의 질문과 한 여인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누가는 예수가 기다려야 할 분, 메시야이심을 말합니다(7:1-50). 다시 살아난 요한(9:7)이라고 여겨진 예수는 오병이어를 행하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며 하늘로부터 내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으로 가라 명령하며(8:1-12:53), 지금은 회개할 때(12:54-13:21)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13:22-19:44).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입니다. 유대인이라 해도 다 가지 못하며, 이방인도 갈 수 있습니다(13:28-29). 간다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힘써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2.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갈릴리

누가는 예루살렘을 신학적인 용어로 사용합니다. 예수가 정결예식을 행한 곳이 예루살렘(2:22)이고, 12살 예수가 랍비들과 질문하고 대답함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곳 역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2:40-52).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는 시험받았고(4:9), 예루살렘에서 별세(e[xodo"/엑소도스)할 것이라 말했습니다(9:31). 그 예루살렘을 향해 예수께서 나아갑니다(13:22-19:44). 그런데, 그 예루살렘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해서 갑니다(17:11-19). 이 전치사구(dia mevson Samareiva" kai; Galilaiva")의 용법이 흔치 않아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정역처럼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해도 예수께서 어떤 경로로 해서 예루살렘에 갔는지 알기 어렵다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서 콘첼만(H.Conzelmann)은 누가가 팔레스틴 지리에 서툴러 혼동한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지적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은 누가의 의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지리적인 정보를 주려 하기 보다는 신학적인 내용을 말하고자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누가복음을 예루살렘 여행 이야기라 말합니다. 바로 이 표현도 예루살렘을 단순히 지리적인 용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간다는 표현도 신학적인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3. 구성

이 단락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 (11-12a)

a 불쌍히 여기소서(12b-13)

b. 깨끗함을 받음(14)

c. 사마리아인의 감사(15-16)

b’ 깨끗함을 받았지만(17-18)

a’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

 

4. 갈릴리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인

누가는 이런 구성을 통해 나병 환자의 치유보다 치유 이후 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에 주목합니다. 나병 치유 이야기는 갈릴리에서도 있었습니다(5:12-15). 이 단락은 앞의 경우와 다르게 치유보다는 치유 이후 행동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열 사람의 나병 치유보다 치유 이후 한 사람의 감사에 집중합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정복 한 기원전 722년 이후 펼친 혼합정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세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의 혈연관계를 부정하며, 사마리아 사람도 유대인들을 거부합니다. 예수를 위해 준비하려고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예루살렘을 간다는 것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하지 않은 것(9:52)은 바로 이런 모습의 일면인 것입니다.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예수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 노예보다도 낮은 계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는 이방인(ajllogenhv"/알로게네스(18)’이라 부릅니다. 이 단어는 다른 나라(민족)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금지를 말할 때 사용한 단어로, 신약은 오직 여기서만 사용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 부르는 예수가 마치 1세기 유대인들과 같은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이방인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한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의 좋지 않은 시선 때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며, 치유 받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한 아홉 사람이 유대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방을 의미하는 단어 ‘e[qno"/엣노스를 누가는 12번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시작 부분에서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2:32)으로 말하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이방에게 죄 사람의 회개를 전파하라는 것이 구약 말씀(24:47)이고 너희는 이 모든 것의 증인이라 말합니다(24:48).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방으로 가자 명령(8:22)한 것이나.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을 말하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갔다는 것을 말하며 이방인의 감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당시 1세기 유대인들과 다르게 예수는 사마리아를 포함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와 믿음,

5(13:22-19:44)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17:11-19절은 이 5부 중심(F)에 위치합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는 이 내용은 누가에만 나옵니다. 이 단락은 교차 대칭구조로 중심(c)에는 치유 받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합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이런 묘사는 매우 거북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매우 좋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심지어 경건한 유대인들 중에는 사마리아 사람을 부르는 것조차 회피하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도 외면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극진하게 치료해 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의 물음에 사마리아 사람이라 대답하는 것을 피하고자 율법교사는 자비를 행한 사람이라 말하기도 합니다(10:37).

그런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이 단락은 말합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누가는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말합니다. 치유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만 감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누가의 이방에 대한 기술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심한 기근 중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많은 과부에게 가지 않고, 이방인 과부에게 갔다는 것(4:26)과 엘리사가 이스라엘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수리아 나아만에게 갔다(4:27)는 것을 누가는 말합니다. 고향은 선지자를 환영하지 않습니다(4:24). 치유 받은 열 명 중에 예수께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방인인 그에게 구원을 선언합니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과 관련된 누가 본문들, 특히 믿음(pivsti"/피스티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한 본문 11개를 살펴보면 믿음을 부정적인 의미로는 제자들(8:25; 18:8; 22:32)과 사도들(17:5,6)에게 사용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의미로는 이방인들(7:9)과 환자(8:48; 18:42)들에게 사용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예수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왔다고 말한 목적에 잘 어울립니다(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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