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나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나이다”(143:8).


너머는 새로운 세계을 열어줍니다물질 너머 정신, 이 땅 너머 저 하늘, 지옥 너머 천국, 절망 너머 희망, 구약 너머 신약, BC 너머 AD, 빚 너머 빛, 죽음 너머 생명, 현실 너머 비전, 불안 너머 기쁨, 염려 너머 감사, 한국 너머 세계, 등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 너머의 세계를 영혼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의 인생은 부유함과 풍성함과 넉넉함으로 세상을 폭 넓게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군병들인데 상황에 대한 대처나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해력의 폭이 매우 협소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저히 용서도 잘 안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고백하며 살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해관계 앞에서는 십자가가 잘 작동이 안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너머의 신앙, 즉 종말론적 신앙이 확실할 때 삶에서 부딪히는 작고 큰 문제들을 넘어갈 힘이 주어지리라 봅니다. 육적인 힘은 이해관계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기쁨과 감사와 지혜로 충만한 영적인 힘이 있을때 세상의 벽을 허물 용기가 생깁니다.

세상의 벽을 허물 힘은 바로 말씀입니다. 다윗은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를 사모했습니다.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삶의 자리에서 해결하고 결정해야할 선택의 문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떻게 결정하며 대처하고 있는지요. 현관문을 나가면서 삶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주님 오늘 나의 인생의 모든 길을 맡깁니다. 평안하게 인도해주십시오. 내 영혼을 주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받아주소서. 나의 삶의 통치권을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립시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윗처럼 이렇게 아침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 너머의 삶이 보입니다. 너머를 아는 분들은 불안과 꿀꿀한 기분과 염려와 시기나 질투 욕심에 사로잡혀 살지 않습니다. 늘 기쁨과 감사로 주변을 밝게 비추는 등불이 됩니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 끝에는 사물이 있다.

그곳으로 나는 간다.

 

연필의 끝에는 선이. 생각이 소멸하는 곳에 발상이 있고 기쁨의 마지막 숨결에는 또 다른 기쁨이, 검의 끝에는 마법이 있다.

그곳으로 나는 간다.

 

발가락의 끝에는 도약이 떠나갔으며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그곳으로 나는 가고 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중에서-


김선오 시인은 위 문장에 이렇게 덧글을 붙였습니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는 리스펙토르의 짧은 문장은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귀로 소리를 듣지만, 그 사실은 소리의 원천이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 끝에는 사물이 있다는 문장 역시 우리의 몸 밖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닿지 못하는 그곳으로” “나는 간다라고 말한다.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일 수도, 나의 감각이 모두 사라진 죽음 이후일 수도, 처음 가보는 여행지일 수도 있다.

리스펙토르의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등장인물들 앞에 놓인 숱한 일상적 절망 속에도 이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랑과 설렘이 늘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짧은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사랑의 모서리에는,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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