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교회

 

성탄절 아침에 한 구두 수선공 이야기를 떠올린다.

 

가난한 구두장이 마르틴은 아내와 두 자녀에 이어 막내아들까지 저세상으로 떠나자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웃의 배려로 성경을 읽게 된 그는 어느 날 밤 작은 음성을 들었다. “내일 거리를 유심히 보아라. 내가 가겠노라.”

다음 날 아침부터 기다렸지만 그분은 오지 않았다. 무료함을 달래던 그는 눈을 치우는 청소부 노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갓난애를 안고 추위에 떠는 여인을 보고는 빵과 옷을 나눠줬다. 사과를 훔치다 들킨 소년과 과일 장수 할머니의 다툼까지 중재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날 밤 성경을 다시 편 그가 전날의 음성을 떠올리자 낮에 만난 사람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 나야,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펼쳐진 성경에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 나오는 얘기다. 주인공 마르틴이 베푼 선행은 작은 것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아주 컸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이 대하는 것은 곧 신을 영접하는 일이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도운 덕분에 그는 하루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만났다.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누가복음 211-12)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818년 어느 날 늦은 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오스트리아의 한 작은 시골 성당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작은 성당의 26세 된 젊은 모올 신부는 밤인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성탄 미사도 드려야 하고 연극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하나뿐인 오르간이 고장이 난 것이다. 오르간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뜯어보았으나 시골에서는 수리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모올 신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깊은 밤에 창밖으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었다. 그는 마을의 고요한 모습에 감동을 받아 시 한편을 적어보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시를 들고 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자 학교의 선생인 구루버를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시를 한 편 써 보았습니다. 이 시를 작곡 좀 해주세요. 그리고 성탄 미사 때 기타연주를 하면 어떨까요?”

크리스마스 날 시골의 한 작은 성당에서는 신부가 쓴 시에 곡을 달은 음악이 기타로 연주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생기게 된 역사이며 불리게 된 이유이다.

지금 이 찬송은 성탄절에 가장 많이 불리는 찬송가가 되었지만 아마도 예전의 한 작은 시골 성당의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 노래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

세례요한의 사명 석광훈 모세의 기도편지 -

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 그는 아비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여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것이다.”(누가복음 15-25절 중에서)

세례요한의 사명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금년 성탄절에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우리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고 탄생 되게 하소서. 아멘!

성경은 세상의 주인을 분명히 말한다.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어떤 이는 이 세상이 사람의 세상이라고 주장한다이런 인본주의의 생각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기에 이르렀다.

또 어떤 이는 이 세상을 사탄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독교적 비관주의는 우리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도피하게 했다그런데 이런 우리의 생각을 주님은 비웃고 계신다이 세상은 그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잠시 세움을 받은 소위 지도자들이 자꾸 반 그리스도적이고, 반 신률(神律)적인 정책으로 세상의 참된 주인 되신 이의 뜻을 거스리고, 주인이 정한 법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이 땅 뿐 아니라, 세상 도처에 세움을 받은 지도자들의 행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주인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 김남준 목사의 시편 2’ <역사의 주인> -

 

어느 날 역사의 한 기점에서 역사의 주인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라고 선언하고자 하셨습니다그 아들로 세상의 주인 행세하던 사탄의 계략을 꺾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임금과 철학이 상상할 수 없던 죄악을 이기신 그분의 지혜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이십니다. 그로 역사의 주인 되게 하시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입 맞추라고. 그를 사랑하라고. 그분이 세상의 주인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 그분이 오신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참된 나의 주로 모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1)

제일 아름다운 것도 제일 무서운 것도 인간.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소포클레스 저() 천병희 역(),소포클레스 비극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인_김지하
시인_김지하

김지하 시인은 두타산에서 인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이 시를 듣자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산이 산을 무서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무서워하던가 /양파가 양파를 무서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무서워한다...

옛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옛날부터 밤길을 가다가 짐승을 만나면 훈기(薰氣)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면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참 무서운 건 짐승도 귀신도 아니라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만큼 그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죄성(罪性) 가득한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된 사람만큼 그리운 사람도 없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라디아서 419)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