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산 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명 따라 살아가고 있다가 핵심이다"

즐겁게 산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명 따라 살아가고 있다가 핵심이다.

헌신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교회를 떠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분들의 이야기에 종종 들려오는 말이 있다.

교회 떠나서 즐겁게 산다고 한다. 그 즐거움의 기준이 무엇일까?

즐겁다, 행복하다고 한다. 이 말이 맞는 언어인지...

즐거움과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나는 늘 의문이 들었다.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정착해서 ‘신앙 성숙과 사역에 놀라운 은혜와 헌신이 담겨진 고백을 듣는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친목하며 놀러 다니며 사는 것이 진짜 즐거움인가? 진짜 즐거워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포장용 언어인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예수님이 빠진 즐거움, 예수님이 없는 교제,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사명이 없는 모임이 얼마나 오래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안다. 그것이 산지식이다. 그 즐거움은 곧 시들어버린다. 왜냐하면 핵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물러난 사람들의 고백은 한결같다. 퇴직하고 나면 여행도 하고 운동도 하고 쉬면서 지내겠다고  말한다. 젊은 날 최선을 다했기에 나의 노년은 쉼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누가 그것을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열심히 일한 자 놀 자격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터에서 물러난 후 머지않아 힘들다고 한다. 친구 만나서 여행하고 운동하고 등산하고 밥먹는 것도 한 두 번이라고 한다.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출근할 때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피곤하고 온 몸에 모든 짐을 다 지고 사는 것처럼 힘겹게 느껴졌는데,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고백을 하는가?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의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일은 돈을 벌기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나의 삶을 감칠 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은 내 인생을 살만 나도록 만들어주는 선물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삶도 같다. 교회에서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나의 헌신과 땀방울이 없는 곳에는 그 행복은 가짜이다. 진짜 행복은 나의 노력과 시간과 물질과 마음과 몸이 들어가야지만 진짜 기쁨을 얻는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다. 이것은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동일한 현상이다. 현대교회는 수평 이동하는 경우가 과거보다는 더 많다. 특히 유튜브가 활성화되면서 교회의 내실이 드러났다. 수준 높은 찬양과 매끄러운 설교와 성도들의 편리함과 정보를 제공해주는 교육과 공간이 주는 편리함이 있다. 그런 교회를 향한 갈망이 있다.

대개 수평이동하다 보면 교회 공동체에 깊이 몸을 담그지 않는다. 적당한 예배생활을 추구하고 교회에서 주는 봉사만 따박따박 받아먹으며 약사 빠르게 신앙생활을 한다. 이런 신앙생활에 익숙하면 영적인 성장도 기쁨도 존재감도 없어진다. 단지 자리만 채우다 어느 날 존재감도 없이 사라진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의 시간을 드렸다면 그곳에서 영적, 관계적인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열매도 없는 삶이란 곧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다.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이 버려지는 것이다. 적당주의 신앙인들은 곧 버려지는 꽃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 행복의 최상의 상태가 구원이다. 구원은 곧 행복의 최상의 상태이다. 구원받은 백성은 행복한 주의 자녀이다. 행복한 주의 자녀는 신앙생활도 즐겁게 해야 한다. 진짜 행복은 나의 전부를 드려야 진짜 송이꿀보다 달달한 영적 기쁨을 누린다.

행복의 기준이 자기중심적이고, 편리함만 쫓는다면 인생의 진짜 열매는 얻지 못한다.

학생들이 편리함만 추구한다면 그 학생의 미래는 없다. 공부라는 것은 책상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해서 이겨내야지만 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학생이 편리하게 공부하겠다는 것은 공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말고 같다.

학생이 침대에 누워서 공부를 하겠다, 오락프로그램을 다보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과 운동도 하고, 그러면 언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물은 눈에 선하다. 결국 나이가 먹어가면서 피눈물 흘릴 날이 곧 찾아오게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적당한 신앙생활은 편리하게 살겠다는 자기 타락이다. 육적 즐거움을 위해서 영적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진짜 행복을 찾으라. 가짜 즐거움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 친구를 만나도 영적으로 서로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라. 세상에서 느끼는 밥 먹고 놀러 다니고 이정도의 친구관계는 곧 머지않아 다 끊어진다. 영적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관계는 어느 날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마라. 영원한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어라. 얄팍한 장사치처럼 살지 말라, 가치를 창조하는 사업가가 되라. 나의 왕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의 나라와 뜻에 나의 삶을 헌신하라. 그러면 인생이란 영광의 면류관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리고 가문에 믿음이란 기업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된다.

믿음이란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는 부모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부모이다. 나의 후손의 인생을 망치는 꼴이다.

가문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기도 한 번 뜨겁게 하고, 예배 잠시 드리고, 교회에서 헌신 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영적성장의 DNA가 흘러가게 된다. 진짜 행복을 찾으라. 그 길이 2022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2023년을 다시 결단하는 삶의 자세이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태도가 망가진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수준 낮은 삶을 선택하지 말고 경건한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 축복의 원리이며 형통의 길이다.

진짜 즐거움은 사명에 자신이 푹 담궈져 있을때 찾아오는  기쁨이다. 그런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다. 진짜행복은 자신의 이름과 자리를  지킬때 찾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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