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교회는 앞날이 뻔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


고린도 교회를 관찰하던 바울이 교회에서 없어져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바로 성도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었다. 수건의 유례는 모세로부터 비롯되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얼굴의 광채가 나자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34:35). 여기서 비롯된 전통과 습관이 바울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왔다. 사도바울이 살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광채가 없었다. 그런데도불구하고 여전히 수건을 쓰고 구약을 읽었다. 바울은 그 전통의 허구성을 꿰뚫어 봤다. 전통이란 명목으로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허구의 수건은 무엇일까? 또한 허구의 수건은 어떻게 하면 벗겨지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교회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은 벗겨진다.

정현수목사《수건을 벗으라》는 교회가 벗어던져야할 수건을 몇 가지 제시했다.

뻔한 교회는 앞날이 뻔하다"_ 사람은 뻔한 것에 기대하지 않는다. 식상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은 감동을 원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뻔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뒤집혀진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강화 선교의 역사를 보면 뻔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다. 강화도에 두 번째 세워진 홍의감리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립으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교인들 스스로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고백하고, 모두 흰옷을 입던 시절, 검은 물을 들여 검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하나님 안에서 양반 상놈의 신분은 없고, 우리 모두 평등함을 깨달은 신분제를 없애고, 빚 문서를 불태워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했다. ()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기에 바꿀 수 없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믿었으니 우리는 같은 형제요, 우리는 믿음의 첫 열매라는 뜻으로 한 일()자를 끝 돌림자로 모두가 정했다고 한다. 가운데 자는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 좋은 자를 선택하고 글자를 쪽지에 적어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했다. ‘’()자가 뽑히면 신일이가 되었다. 성이 박씨면 박신일로 개명을 했다.

교회는 뻔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서나 갈등과 다툼이 존재한다. 그러나 해결 방식은 뻔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이다. 뻔한 목사, 뻔한 장로, 뻔한 교인이 되지 말고 세상을 뒤집을 수 있고, 선한 소동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경쟁력이다.

궁금한 교회”_한때 예배를 보다예배를 드리다의 차이로 논쟁한 적이 있다. 믿음 좋은 크리스찬은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 개념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교회에 친구 따라 오는 분들도 있고, 궁금해서 오는 분들도 있다. 이런분들은 예배를 보러 온다. 한국교회가 급성장 할 때는 예배 보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교회로 몰려온다. 예수님이 빈들에서 말씀을 전할 때, 5천명의 인파가 몰려왔다. 교회는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야 부흥한다. 교회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아야 희망이 있다. 주일이든 평일이든 교회에 오는 분들이 많아야 한다. 뻔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미래가 있다. 뻔한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나 호기심을 주지 않는다.

한국교회에 없는 세가지_유럽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들러본 후 남긴 뼈아픈 메시지가 있다.

첫째 돈은 있는데 고난은 없다. 십자가를 빼고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 순교와 핍박 없이 교회의 태동과 성장을 말할 수 없다. 교회의 적절한 고난은 교회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필요하다. 옛날에 목회하셨던 어른분들이 이런말을 자주 한다. ‘교회 통장에 잔고가 남으면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 통장에 잔고가 남으면 목회가 타락한다는 말씀이다. 교회가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대변할 때 교회는 그 힘을 잃어버린다. 교회는 늘 고난받는자의 편에서 길을 만들 때 교회는 빛나는 존재가 된다.

둘째 하나님은 있는데 윤리는 없다. 교회가 좋아서,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에 왔다가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 하랴? 방법은 착한 행실이 답이다. 그리스도인다운 빛을 비추면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주변이 밝아진다. 누구 때문이 아니다. 바로 문제는 이다. 먼저 믿은 우리들이 이 아니라 어둠이기에 어둠을 몰고 다닌다.

셋째 나는 있는데 이웃이 없다.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로 시작한다. 그러나 신앙이 개인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신앙이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새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종교인들은 못본체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신앙의 중심축이 바꾸는 것이 성장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사랑의 관계위에 이웃에게로 행하는 삶의 고백이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갈림길이 된다는 불편한 진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의 핵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뻔한 모습을 내려놓고 뻔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갈 때 복음이 강력하게 회복된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불편한 수건을 벗어던져야 한다. 교회성장과 신앙성장을 가로막는 불편한 수건을 벗겨내는 작업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해야할 거룩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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