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황혼,,,나를 감싸 안아주자..

내가 소속한 고양시 약사회가 창간호..약사향기를 발행하였다.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 24에서 무료로 다운받아서 e book 으로 누구나 읽어 볼 수 가 있다.

서민들인 약사들의 향기가 퍼지는 창간호 책 이름을 내가 제안한 것을 채택해서 상품권도 받았다. 

글을 올려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내가 살아온 지난 날들이 생각 나면서 감사와 행복이란 내 닉네임이 떠 올랐다.  입술의 권세가 있어서 매일 매 순간이 감사와 행복이다. 힘들어도 감사, 아파도 감사, 한 주먹의 약을 먹어도 감사, 모든 것이 감사뿐이다. 

지난 8월 세벽에 단숨에 써 내려간 글을 내가 사랑하는 본 헤럴드에도 부끄럽지만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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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이제는 나를 감싸 안아 주자..

내년이면 칠순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께서 세월이 너무너무 빠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그 때는 이해가 않 되었는데 이렇게 되었다.

19549월에 태어났다. 6.25 전쟁 3. 그다음 해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종이 질이 형편없었다. 연필로 글씨를 쓰려면 종이가 찢어졌고 연필도 질이 나빠서 검은색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를 써야 했었다. 화장실 휴지는 신문지를 손바닥 크기로 잘라서 한 장씩 사용했었다.

지금은 3겹 화장지, 공책, A4 용지, 연필 등 얼마나 질이 좋은지...그 때 고생해서 그런지 지금도 모든 종이의 뒷면이 비었으면 절대로 못 버린다. 이면지를 메모지로 사용한다.

쌀 아껴서 저금한다고 저녁마다 수제비를 초등학교 때 삼 년을 먹다가 정부미가 나왔다. 갑자기 쌀밥을 너무 먹어서 날씬하다가 통통하게 되었다. 일반미가 먹고 싶어서 고양시 일산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집 막내아들한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뚱보가 되었다.

내 적성은 문과인데 친정아버지가 가난한 집에 돈도 없으면서 의대를 가라고 했다. 나는 수학의 기초가 되어 있지 않았고 참고서 살 돈도 없었고 교과서도 청계천에서 헌책을 아버지가 사 오셨다. 새 책으로 공부하고 싶었었다.

예비고사 원서료가 6천 원이었는데 친정아버지가 어디서 꾸어 오셨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2년 동안은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평화시장 옷 도매상을 하는 작은아버지 가게에서 몇 달 근무를 했었다. 그리고는 다시 의대를 시험 봤으니 당연히 떨어졌고 2차로 약대를 붙었다.

정말 약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정성분석, 정량분석..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등록금 버느라 하루에 세 타임씩 집에서 과외를 가르쳐야만 했었다. 약용식물학 외울 시간이 없었다. 성적은 당연히 CCCC...

졸업 후 시집가고 아들딸 낳고 자영약국을 하면서도 툭하면 문 닫고 약사 외출 중 써 붙여놓고 일보고 놀러 다니다가 다른 약사 들은 다 빌딩 여러 채 지을 동안 나는 시댁에서 사 준 집 한 채로 평생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문광고 보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원조 기러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아들딸 데리고 애들 아빠는 교직에 있느라 못 가고..

주위에서 다들 물었다. 거기 누가 있느냐고. 내 대답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였었다.

그 즈음 나는 크리스챤이 되어서 아주 뜨겁게 기도하고 하루 종일 성경듣고 하루 종일 찬양 부르고.. 약국에 영양제 사러 오면 ..이런 거 먹지 말고 예수 믿고 기도하면 낫는다고.. 당연히 약국은 망했다.

원조 기러기 나의 캐나다 생활은 광야 같은 생활이었다. 딸 학교 태워다 주고 데려오고 도서관가고 마트가고 교회가고 그게 다였었다. 버거킹은 비싸서 롯데리아만 딸을 사 줬고 1달러도 아까워서 벌벌 떨면서 써야 했었고, 영어가 어려워서.. 비 오는 날 벌판에 나가서 목 놓아 울기도 했었다.

지난 10여 년 한국과 밴쿠버를 들락날락했다. 아들딸들은 영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시집 장가가고 아들딸 낳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다.

나는 캐나다 가면서 약사는 은퇴하고 신학대학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약사들이 캐나다 약사면허를 취득하는데 부러워지기 시작했었다. “하나님, 신학은 나중에 하고 나도 캐나다 약사면허 가지고 싶어요”. 다들 나보다 십 년에서 이십 년씩 젊은 약사님들인데 50살에 영어 한마디 못하는 것이 원서도 못 읽는 것이 약학 실력도 없던 것이 맨 땅에 헤딩을 한 꼴이다.

눈뜨면 책보고 때 되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6개월을 두문불출했더니 몸무게가 20kg 늘었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이 생긴 것도 모르고 병원에도 않 가고 무식했었다. 책보는 동안 두 번 기절했었다. 마침내 캐나다 약사국가 고시 필기시험 합격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다. 합격 후 3년 안에 실기 시험을 않 보면 필기 시험합격이 무효가 되기에 그랬다.

캐나다에서 아들딸 사립 대학 등록금, 내 공부하느라 진 빚을 다 갚고, 아들, , 시집보내고, 양가 부모님들 상 치루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지금 근무하고 있는 요양병원 총무과장이 전화가 왔다. 내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냐고 했더니 내가 어디에 이력서를 올려놨다고 했다. 그래 3개월만 일해서 망가진 치아 임플란트나 하자 했던 게 9년이 되었다. 환갑 전에 취직했는데 칠순이 다가온다.

코로나 3년은 내게 또 다른 길을 걷게 하였다. 지난 코로나 3년 동안 통신과 출석을 겸하면서 교단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공부하고 작년 99일에 안수받고 목회자들 모임에서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약 바로쓰기 운동본부 강사 교육도 한국 오자마자 받게 되어서 함께 하고 있다.

저녁노을의 붉은 빛이 아름답듯이 나의 황혼도 그렇게 하루하루 써 내려가야겠다. 평생을 싸우면서도 함께 하고있는 내 남편은 나갔다 들어올 때 마다 아보카도를 검은 봉지 가득 사 온다. 당뇨에 좋다면서 나 먹으라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면서 찬송가인데 아직도 나는 내가 펄펄 살아서 화도 내고 할 때면 그냥 또 실패다. 매일 넘어지고 다시 결단하고. 이제 좀 성숙해지거라 성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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