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에크라)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요쉬에니)”(시55:16).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망의 줄이 무엇인가 찾으려 한다. 팬데믹 시대의 암울한 흑암의 상태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우리들의 몸부림 속에서 그 조그만 희망의 끈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과거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향하여 나가기에, 우리는 미래의 시간에 많은 시간을 관심 갖기 보다는 단지 장래를 바라보며 현재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찾으며 새 활로를 찾는 것이 좋다. 시편 55편은 다윗과 고라의 시들로서 출애굽기의 주제와 유사하다(테리홀). 이 시편은 ‘다윗의 마스길(지혜), 영장(지휘자, 인도자)에 맞춘 노래’로서 아첨꾼의 멸망을 바라는 기도를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속에 자주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요에브)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히게딜)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왜아타 에노쉬), 나의 동무(케에르키)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55:12, 13). 시편의 탄식하는 상황은 우리들의 탄식이요 나의 한숨이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야흐다오 나메티크)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네하레크 베라게쉬)”(55:14). 어제까지만 해도 친하던 절친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돌아서서 대적자로 돌변하여 나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미콰라브 리)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파다 베샬롬)”(55:18).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하크쉬바 리 와아네니)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아리드 베시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미프네 아콰트 라샤)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이시테무니)”(55:2-3). 의인에게 오는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을 찾는 기회와 계기를 준다. 시편기자는 탄식의 상황을 맞아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고백한다.
“두려움과 떨림이(이르아 와라아드)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와테카세니 파라쭈트)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카요나)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아우파) 편히 쉬리로다(웨에쉬코나)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바미드바르)(셀라)”(55:5-7). 고통의 상황이 신앙인에게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와 하나님께 맡김과 의지함을 가져오게 한다(55:16, 22, 2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토리뎀 리브에르 샤하트)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로 에헤쭈 에메헴)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와아니 에브타흐 바크)”(55:23). 원수들의 모습은 의인을 압제하고 분노하고 핍박하며 강포와 분쟁, 잔해한 혀, 죄악과 잔해함, 압박과 궤사, 악독, 속임 등이 가득한 모습이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하레쿠 마흐마오트 피우)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헴마 페티호트)”(55:21).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경건한 자, 기도자는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하고 간구한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간구에 훈련되고 단련된 영적군사들이다.
진 페리(Jean Perry,1863-1935) 선교사는 데이비스 선교사에 이어서 한국에 온 호주 장로교 파송 제2진 선교사들 오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출생하였는데 19살이 되던 1882년 부모와 함께 호주 퀸즈랜드 주로 신앙을 따라 이민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새로운 자유의 땅에 살면서 맥카이 목사 부부와 맨지스 페리와 함께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파송 받아 한국 선교를 오게 되었다. 1891년 9월 5일 시드니를 출발하여 40일간 배 여행을 통해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진 페리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사역을 하게 된다. 그런데 같이 온 선교사 5명이 한국에 온지 3개월 후인 1892년 1월 27일 새벽, 간호사였던 맥캐이 목사 부인 사라(Sara)가 폐렴으로 32세에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선교사 동료들의 불행은 나중에 페리와 멘지만 남게 되는 상태가 되었고 페리의 사역은 과중하게 되었다.
1895년 페리도 호주 선교회에 사임을 알리고 서울에 있던 사무엘 마펫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임서를 처리하게 된다. 종교적 견해 때문에 사직한다는 이유는 한국 선교사들 사이에 힘든 관계와 문화적 충돌이 심각했던 까닭임을 추정하게 한다. 페리는 1895년 8월에 일본을 여행하면서 몇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플리머스 형제단에 가입하게 된다. 거기서 장로교의 반교권적, 반성직주의를 반하여, 초대교회를 지향하며 원시교회를 지향하는 플리머스 형제단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호주 선교부를 떠나게 된다.
페리는 선교부를 떠나 일본에서 호주로 돌아가서 선교 후원자를 찾아 지원을 호소하게 된다. 페리는 다시 한국 서울로 가서 엘렌 페쉬(Allen Pash)와 만나 새로운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엘렌은 일본에서 만난 여성인데 캠브릿지 길턴 대학 출신으로 인도에서 사역하던 중 건강이상 때문에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페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의견을 같이했고 진리의 선교,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선교관을 공유하며 새로운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걸인과 유랑자, 고아와 맹인 소년, 소녀들을 위한 복음 사역을 하며 독립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며 영국 복음주의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이 시작한 첫 선교 사업이 ‘외로운 아이들의 정원’이라는 고아원 사업이었다.
페리는 영국의 친구들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사역을 하다가 1915년 은퇴하고 25년간의 사역을 마무리한다. 페리는 저작 능력을 겸한 선교사로서 여러 권의 선교 책을 출판하였다. 곽안련 선교사가 전하는 말에 의하며 페리는 선교사역을 은퇴할 때 고아원과 모든 구호시설들을 구세군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자유를 향한 영원한 천국운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페리 선교사는 참 빛을 찾아서 한국 선교하다가 아름다운 사랑을 전해준 천사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