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15)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2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쉐모 레올람)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웨이트바레쿠 보)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예아쉐루후)”(72:17).

아직도 팬데믹의 암운(暗雲)은 가시지 않고 우리 주위에서 위협을 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퍼펙트 스톰의 암울한 상황이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믿음의 행진을 하고 있다. 시편 72편은 시편 2권의 결론에 해당하는 왕정시편으로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결론의 대흐름의 맥을 끝맺는 역할을 한다. 시편 2편이나 시편 110편과 더불어 72편은 왕즉위 시편으로서 시편 101편과 함께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의 왕되심을 예표하고 예언하는 역할을 한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니프라오트 레바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웨이말레 케보도)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테힐로트 다위드)가 끝나니라”(72:18-20).

시편 72편은 가난한 사람, 궁핍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며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시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보여준다(72:12-13).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번영하고 풍성한 곡식과 축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미즈하브 쉐바)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웨이트팔렐 바아도 타미드) 종일 찬송하리로다”(72:15-16). 이 시편은 <솔로몬의 시>라는 표제어로 시작되는 시이다. 이는 다윗의 기도로 끝나지만 인생의 후계자, 왕국의 후계자까지 세워놓는 다윗의 삶과 기도, 왕국의 역사는 시편의 2권의 결론으로서 전인적인 삶의 노래를 잘보여준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엘로힘 미쉬파테이카)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와와니에카 베미쉬파트)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우게바오트) ”(72:1-3).

다윗왕과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이 시편은 우주와 자연, 모든 인생들을 다스리는 영원한 왕 예수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으며 영적 출애굽 시편의 결론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72:4-5). 이 왕정 시편은 1-3권 중에 시편 2편과 72, 89편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중요 왕정시편의 결론적이며, 핵심적 역할을 하며 꽉찬 야웨 다윗 언약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정의와 의, 야웨 계명과 하나님의 힘을 보여주며 예수가 구약시대부터 태양의 빛으로 통치하는 세계를 시편 72편은 보여준다. 또 세계의 열방이 이스라엘 솔로몬에게 조공을 바치는 장면을 10, 15절에서 보여준다(왕상10). 이는 예수의 구원의 능력이 전세계로 퍼지게 됨을 알려준다.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72:7-9). 다윗의 시편 세계, 출애굽기의 시편 세계는 솔로몬의 시로 끝맺게 된다. 이러한 다윗왕조의 대를 잇는 찬양과 찬송, 노래와 감사의 축제의 삶은 선교사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존 탈메이지(타마자, 1884-1964) 선교사는 1884, 미국 뉴저지 주 뉴아트에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여 중국에서 자라게 되었다. 타마자는 1907년 툴레인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우스웨스트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치게 된다. 그는 19103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 받은 후 그해 7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에리사 에머슨과 결혼한다. 그는 부인과 함께 그 해 8월 한국에 도착하여 광주 지역에서 사역을 하며 광주 숭실학교 교장에 부임하며 교육 선교를 한다. 학교에서 야구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체력을 키우게 하며 스포츠 정신을 함양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광주지역 야구부가 되었다.

존 탈메이지 선교사는 숭실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검소하게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일제 압력에 대항하며 감옥에 가면서도 교회 재산을 지켜낸 훌륭한 행정가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그는 전남 광주의 선교 외에도 순창과 담양 지역까지 선교 지경을 확대하였고 성경학교를 만들어 복음을 가르치고 피아노와 축음기로 찬송가도 가르쳤다. 그는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선교지 사람들과 동화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는 검소한 눈높이의 선교로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한국인 성도의 귀감이 되는 본을 보였다.

타마자 선교사와 사거리교회 학생들, 한남대학교 2대 총장인 존 탈메이지 기념홀
타마자 선교사와 사거리교회 학생들, 한남대학교 2대 총장인 존 탈메이지 기념홀

타마자 선교사는 1941년 전쟁으로 일제 강제 출국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남아서 여수 한센병 환자촌을 지키고 교회 재산을 지켰다. 이때 광주 선교부에 남은 선교사는 탈메이지 부부, 루트(유화례), 도슨(도마리아) 4명이었다. 그는 일제 협조하지 않자 감옥에 투옥 당하였고 고생하다가 1942년 강제 출국 당하게 된다.

그는 1948년 다시 내한하여 대전 한남대학 부지 매입을 하였고, 대학 교육의 큰 기초를 놓게 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195570세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도 선교의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고 1964년 애틀랜타에서 소천할 때까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탈메이지(타요한)가 한남대 2대 학장을 맡게 하였고 막내 딸 부마리아(마리엘라 탈메이지, 1923-2014)도 간호사로 헌신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프로보스트 선교사의 계명대학교와 경주 문화고등학교 설립을 도왔다. 선교는 이처럼 대를 이어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어지게 하는 거룩한 작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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