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10)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2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말레)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위바크슈)”(83:16).

펜데믹 삼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서 세상은 힘든 경제공황의 상태로 들어간 것 같다. 이처럼 힘들어지니 정부는 경제부양의 강경책을 써서 우선 어려운 문제를 풀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더 상황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본다. 이러한 때일수록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기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자.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알 도미 라크)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알 테헤라쉬) 조용하지 마소서”(83:1). 이 세상의 구조적 악은 어디서 발원하는가. 악인들의 연대와 악한 나라들의 동맹과 연합에 있는가.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야아리무 소드)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알 쩨푸네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웨나크히젬 미고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83:3-4).

시편 83편에서는 원수를 저주하는 일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구약의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원수와 대적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83:5, 6, 8, 9). 구약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구속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다는 역사적 고백을 하게 한다. 요나와 같이 니느웨에 가서 구원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보편적으로 이뤄지는 시편의 세계주의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보편적 하나님의 구원 손길이 온 인류, 모든 민족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은 시편에서 민족주의적 구원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을 말하는

시편의 세계주의

시인은 여기서 대적자와 원수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멸망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카갈갈 케콰쉬)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우케레하바 테라헤트 하림)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베사아레카 우베수파테카)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83:13-15).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들은 주의 원수가 되기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되며 그들은 수치를 당하여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되며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서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결국에 시인은 찬송하게 된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83:18). 이러한 구속의 찬송을 부른 선교사들이 있다.

 

데비드 머리 라이얼(라대벽, 1876-1921) 선교사는 진주와 마산에서 복음을 12년간 전했고, 백정의 신분 철폐 운동에 앞장선 사역을 하였다. 라이얼 선교사는 백정의 해방을 위해 진주 형평 운동의 시발점이 되게 하였다. 그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생하여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1907년 호주 학생 기독 운동에 총무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부산을 방문하였다. 190811월 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자원한다. 19092월 로리머와 결혼한 후, 그 해 4월에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오게 된다. 처음 내한하여 7일간 아담슨 선교사 가정에서 머문 후에 바로 진주 지역을 선교지로 정하고 진주 지역 선교사가 된다.

진주 지역에는 최초로 휴 커를이 교회 개척하였는데, 그는 두 번째 진주교회 담임 목회자가 된다. 1905년 휴 커를 선교사가 진주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후에 경남 지역에 1908년 하동읍 교회, 1909년 동금리교회(삼천포 교회), 북면교회(현 남해 교회)등을 개척하게 된다.

데비드 라이얼 선교사가 19095월 진주 지역을 선교할 때 진주교회는 백정을 교인으로 받아들여서 양반과의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양반들이 교회에서 천민과 합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때 라이얼 선교사는 메리 켈리와 넬리 스콜스 선교사와 함께 양반을 설득하여 결국 합석하게 하여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하였다. 이것이 14년 후 1923년 진주에서 백정 신분 철폐를 주장하는 진주 형평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 신분 해방 운동은 조직화되어 1924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라이얼 선교사는 1910년부터 남해, 하동 곤양 지역을 돌아보며 순회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2년 남해 당항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팀 선교 사역을 중요하게 여겨서 전략적 접근 지역 사역을 하며 학생 기독 운동을 발전시켰다. 1914년 그는 마산으로 이동하였고 건강이 나빠진 아담슨 선교사를 대신하여 마산교회와 창신교회를 감독하였으며 마산 창신학교 2대 교장으로 역임하였다. 그는 동교 선교사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소천하였을 때 창신학교를 라이얼 기념 학교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왼쪽 상단 첫 번째가 데비드 머리 라이얼(라대벽) 선교사, 둘째줄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아담슨 부부. 이들은 경남지역에 20곳의 교회를 설립했으며, 통영에서도 호주 장로교 통영선교부를 설립하고 경남 최초의 사립학교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왼쪽 상단 첫 번째가 데비드 머리 라이얼(라대벽) 선교사, 둘째줄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아담슨 부부. 이들은 경남지역에 20곳의 교회를 설립했으며, 통영에서도 호주 장로교 통영선교부를 설립하고 경남 최초의 사립학교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창신학교 상량식 장면
창신학교 상량식 장면

그는 평양 신학교에서 7주간 가르치기도 하였고, YMCA봉사요원으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봉사하기도 하였다. 1918년 건강이 나빠져서 부인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와 3년간 마산에서 사역을 하다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호주로 돌아가 19218월 소천한다. 우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선교사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국 땅이 그들의 사랑의 씨앗으로 선교 대국이 된 것을 살필 수 있다. 오늘도 이 사랑의 줄잇기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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