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05)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1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내가 낙헌제(비네다바)로 주께 제사하리이다(에즈베하)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오데)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아도나이 키 토브)”(54:6).

삼한사온(三寒四溫)의 봄날은 추위와 봄볕을 교차하면서 봄의 생동함을 느끼기에 한다. 우리 사회의 어려운 한파는 쉬 사라지지 않고 있고, 또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곧 봄은 오고 희망의 꽃은 피어나리라. 시편 54편의 말씀은 다윗의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시이다. 표제어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고 그 상황을 말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호시에니)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테니네니)”(54: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한시도 우리는 살 수 없고 또 그 어려움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을 본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키 자림 카무)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왜아리찜)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로 사무 엘로힘 레네게담)(셀라)”(54:3).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엘로힘 쉐마 테필라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54:2). 삶의 고통과 어려움이 바로 탄식의 기도이며 내 입의 말이 하나님의 귀와 연결되어 바로 탄식이 전해지는 통로가 될 때에 하나님 구원의 응답이 이뤄짐을 말하고 있다. 시편 54편은 국가 탄식시편이면서 개인 탄식시편(I-시편)이다. 이와 같은 시편이 시편 3, 5, 7, 11, 26, 27, 36, 52, 54, 57, 62, 64, 71, 77, 86, 139, 140 편 등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확신의 시편이자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보호(Protect)시편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엘로힘 오제르)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아도나이 베소메케 나프쉬)”(54:4).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야쉬브 하라 레쇼르라이)주의 성실하심으로(바아미테카) 그들을 멸하소서”(54:5).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원수를 멸하시는 분이시다. 위기에 찬 시인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낙헌제(감사제)로 제사드리겠다고 서원(맹세)한다(6). 이 맹세는 개인적인 신앙의 서원으로서 공공의 감사시편으로 나가는 길을 연다(66). 이 개인시편은 감사하는 회중을 위해 시인이 대신 말하며 감사와 찬양을 감사의 축제에서 하며 공동체 시편으로 노래한다.

하나님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곤경을 맞고 또 위협의 찬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우베오에바이 라아타)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에이니)”(54:7). 다윗은 모든 의인들의 대표로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며 신뢰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노래한다. 결국 시인은 모든 환난에서 구원받는다 사실을 보게 되며 원수가 보응받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가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주께 간구할 때 하나님이 도우시고 구원하심을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시인은 서원과 맹세가 담긴 기도로 나가게 된다. 이와 같은 위험에 찬 인생을 살아가면서 도선을 행하기에 게으르지 않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바로 선교사이시다.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1867-1929, 안의와)186752, 인디내아 주 맥코이에서 출생하여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한국에 와서 제중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주로 대구에서 활동하며 대구 제일교회를 세우고 대남 남자 소학교를 설립하며 세브란스 병원에 이사로 재직한다(1917-20).

1917년 대구선교부 선교사들과 함께(맨 위쪽 가운데 검정 양복 입은 이가 안의와 선교사) 자료출처 :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al.com
1917년 대구선교부 선교사들과 함께(맨 위쪽 가운데 검정 양복 입은 이가 안의와 선교사) 자료출처 :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al.com

또한 그는 계성 중학교를 설립하고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며 1922년에는 그의 전 재산을 아담스 복음전도 기금으로 내놓아 선교 기금화를 한다. 1923년 은퇴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돌아가서 192962563세의 나이로 소천한다.

아담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넬리 딕과 결혼한 후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부산으로 들어온다. 그는 어학공부와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게 된다. 그는 베어드 선교사가 서울로 사역지를 옮겨가면서 그 후임으로 대구 지부 책임자가 된다. 그는 대구 경북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 교회(현 대구제일 교회)를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하고 있던 존슨, 부르앤 선교사와 협력하여 제중원(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을 개원한다. 또 병원과 학교(계성중학교), 신명학교와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선교를 하게 된다. 그는 대구 선교의 아버지로서 대구에 교회 66개와 안동에 7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양과 서울을 잇는 삼대 선교거점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

부산에서 야외설교 중인 안의와 선교사(1897년) 자료출처 :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al.com
부산에서 야외설교 중인 안의와 선교사(1897년) 자료출처 :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al.com

그는 대를 이어 아들(에드워드, 안두화) 선교사가 1921-1963년까지 선교사로 사역하게 하며, 계명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설립자와 같이 큰 기여를 한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도 보내는 선교사로서, 또 가는 선교사로서 선교사의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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