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08)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2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아메카) 주의 목장의 양이니(왜쫀 마르이테카)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노데) 주의 영예를(테힐라테카) 대대에 전하리이다(네도르 와도르 네사페르)”(79:13).

봄날이 와서 겨우내 추위에 떨었던 일은 잊어버리게 된다. 벚꽃이 만발하여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나들이를 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하다. 시편 기자는 아직도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파괴에 망연자실하며 원수들과 이방나라에 대한 탄식을 늘어놓는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라마 오메루 하고임)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아예 엘로헤헴) 주의 종들이 피흘림에 대한 복수를(니퀘마트 담 아바데이카) 우리의 목적에서 이방나라에게 보여 주소서”(79:10). “갇힌 자의 탄식을(에네콰트 아시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베네 테무타흐)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엘 헤캄 헤르파탐) 칠 배나 갚으소서(하쉐브 리쉐케네누 쉬브아타임)”(79:11-12).

시편 79편은 국가 탄식 시편으로서, 시편 44, 74, 79, 80편과 더불어 공동체의 탄식을 말하고 있다. 이 시편 79편은 사무엘 상 7장에 나오는 블레셋의 공격과 압제 속에 탄식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며 블레셋의 압제에 고통하고 있음에서 해방하려 한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헤르파 리쉐케네누)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라아그 와케레스 리세비보테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아드 마 아도나이)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테베아르 케모 에쉬 키네아테카)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쉐포크 하마트카)”(79:4-6). 이러한 공동체의 탄식은 요나가 큰(고래) 물고기 속에서 울부짖을 때와 유사하다. 79편은 시편 74편과 같이 야웨 성전 앞에서 탄식하며 회중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다.

“(아삽의 시)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티메우)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예루샬람 레이윔)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니베라트 아바데이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레하에토 아레츠)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웨에인 코베르)”(79:1-3). 국가적 재앙 속에 하나님의 신앙이 무너지는 가운데 좌절감을 갖게 하고 있다. 이처럼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슬픔의 사건이 되었다. 이 시편 74, 79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결코 기억하고 싶지않는 예루살렘의 몰락과 성전 파괴의 불행을 노래하는 장송가와 같은 노래이다. 그 속에서도 시편기자는 구원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라하메카)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데바르 케보드 쉐메카)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웨하찌레누 웨카페르 알 하토테누)”(79:8-9). 아무리 비극이 커도 하나님의 손은 크시기에 주님께 우리는 기도하며 나가게 된다.

구한말 이 하나님의 손길을 알려준 분들이 계시다. 그 중에 멕켄지(J. N. McKenzie, 1856-1956, 매견시)는 한국 한센병자의 친구로서 19102월에 45세 나이로 부산에 선교사로 들어와서 29년간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였다. 한국에서 한센병(나병, 문둥병)천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때에 그는 한센인의 진정한 친구로 살았다. 맥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서 16세에 일자리를 찾아 글라스고에 이동하였고 거기서 무디의 부흥설교를 듣고 영적 체험을 한 후에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1891년 졸업하고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마거릿 켈리(간호사)를 만나 18947월 결혼하고 호주로 이주하여 그 해 12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다.

맥켄지 선교사와 그가 돌보던 한센인들
맥켄지 선교사와 그가 돌보던 한센인들

맥켄지는 호주 빅토리아 해외 선교회에서 파송을 받는데 사례비의 조건도 뛰어넘어 청년 선교단(YPMB)의 후원 선교사로 첫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는 먼저 사역하던 엥겔 선교사와 연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평양으로 사역지를 옮겨서 금사교회, 내리 교회, 울산지역 화전교회, 평동교회 등을 순회하며 전도를 하였다. 이후에 부산진 교회 담임, 일신학교 설립, 경남노회에 섬기게 된다. 그는 울릉도에 첫 방문한 선교사가 되었고, 1914년 울릉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호주 선교부가 이를 돕기로 하였다. 이 때 맥켄지가 울릉도를 방문하여 교회를 맡아 성실히 목회를 하였다. 맥켄지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호주 인근 비누아투 산토섬에서 15년간 원주민 선교를 하였다.

그곳에서 식인종인 원주민에게 영국, 캐나다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여러 선교사가 희생되고 50여년이 지난 후에 맥켄지 부부가 산토 섬에 들어가 600여 명을 문맹에서 해방케하고 330여명이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의 부인 켈리가 열병에서 그곳에서 순직하였고, 맥켄지도 열대성 질병으로 호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 원주민 성도들이 감사의 표시로 전달한 200파운드는 조선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

조선에서 한센병 선교는 그의 성자 영성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한센병 환자 가운데 살면서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교 사업은 없다.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한 일보다 그들이 나에게 한 일이 더 크다. (중략) 또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예수 십자가 사랑의 빛은 이렇게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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