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18)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3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요쉐베 베이테카) 복이 있나니(아쉐레) 그들이 항상(오드)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84:4).

오늘의 현실은 한 치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스트 팬데믹 시대의 혼란은 경제와 정치,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고 그 혼돈의 양상이 펼쳐지면서 질서와 권위, 기존의 가치를 파괴한 현실이 되고 있다. 우리들의 삶은 이러한 혼란한 상황과 현실 앞에서 혼돈스럽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그의 도움을 청하며 나가야 할 것이다. 시편 84편은 시편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편은 성전 중심의 사상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집, 시온의 대로를 표현하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복이 나옴을 강조하고 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표제어는 시편 3(73-89)이 레위기 시편으로서 고라와 아삽의 시편, 레위 찬양 제사장의 노래임을 보여주며 시편 찬양의 중심에 찬양 레위인이 위치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찬양 제사장으로서 레위인들은 주의 성전에서 성전 문지기로 있으며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 시편의 기자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와 탄식의 상황이 펼쳐져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장소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때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군의 여호와여(아도나이 체바오트) 주께 의지하는 자는(보테아흐 바크) 복이 있나이다”(84:12).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에서 보듯 음악적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음악의 전문 용어가 사용된다. 깃딧은 블레셋 가드 지역에서 온 악기로서 포도주 틀이라는 깃딧의 말 의미에서, 풍요와 축복의 상징을 의미하는 악기라고 볼 수 있다. 최상의 노래, 거룩하고 축복된 찬양을 할 수 있느냐? 아름다운 찬양,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헨 웨카보드)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라홀레킴 베타밈) 좋은 것을(토브)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84:11). “그들은 힘을 얻고(에레쿠 메하일) 더 얻어 나아가(엘 하일)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에라에)”(84:7).

시편 기자는 하나님 찬양의 자리에 가기까지 눈물 골짜기로 지나며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을 기도한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오베레 베에메크 하바카)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비가(모레) 복을 채워주나이다(야웨테흐)”(84: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쉬메아 테필라티)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84:8).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마음의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84:5). 이처럼 늘 하나님의 궁정, 주의 집에 살면서 복있는 인생을 살아간 분이 있는데, 그분이 선교사들이다.

 

드루(A. D. Drew) 선교사는 전킨 선교사와 더불어 의료 진료 사역을 하였다. 드루는 서울 서소문에서 매일 오후 내내 전킨의 사랑방에서 환자를 진료하였다. 18953월 전킨의 사랑방에서 전도와 예배드리는 처소가 되었다. 의료 선교를 하던 중 두 사람은 군산 선교 1차 답사 후 두 사람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1895년 여름, 드루와 전킨은 서울의 콜레라 대유행 때문에 여름휴가를 중단하고 서울 도심으로 가서 전염병 환자 구호활동을 한다. 상황은 심각해서 88일 하루 동안 서울 도성의 한 출입문 근처에서 22명이 콜레라로 죽었다. 다른 관문에서는 50명이 사망을 하였다. 드루 선교사는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환자를 돌보며 진료하였고 전킨 선교사 또한 물자보급과 구호를 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나중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의 국왕 고종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은으로 된 잉크 스탠드를 선물로 받았다.

말 타고 복음을 전하는 전킨 선교사
말 타고 복음을 전하는 전킨 선교사

18943월 드루 선교사 부부가 내한하면서 다음해(18954)에 유진벨 선교사, 그 다음해 해리슨 선교사, 테이트와 레이놀즈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된다. 드루 선교사는 의료선교사로 ‘7인의 선발대(윌리엄 레이놀즈, 팻시 볼링, 매티 테이트, 루이스 테이트, 리니 데이비스, 매리 레이번, 윌리엄 전킨)’로 불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인 레이놀즈선교사와 더불어 한국어 선생 서선생과 동행하여 189437일부터 5월까지 2개월 넘게 군산, 전부, 고창, 영광, 함평, 무안, 목포, 우수영, 진도, 녹동, 벌교, 순천, 여수, 남해 등으로 이어지는 선교 정탐을 한다. 드루 선교사는 레이놀즈와 함께 각 고을을 돌며 장터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전도서적을 판매하면서 환자를 진료한다. 이때 진도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졌다(1894.4).

 

 

드루와 함께 전킨이 군산 방문을 통해 본격적인 군산 선교가 시작되었다. 군산 선창가에 인접한 수덕산에 두 개의 가옥을 마련한 후, 선교사들은 한 채는 예배처소로, 다른 한 채는 진료소로 삼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두 선교사의 헌신적 선교는 많은 병자들을 돌보고 목숨을 건지는 의료 복음으로 말미암아 신접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두 선교사의 과로로 인해 전킨 선교사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 소천하게 된다. 드루 선교사도 이 선교의 과로로 말미암아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소천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하브루타 선교, 협력 선교의 모델을 보이며 선교의 씨앗이 군산에 뿌리내리게 하였고, 그 영향은 전라도에 선교 물결이 이어지도록 하였다. 선교는 이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행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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