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21)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33)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쉬와에티) 아침에 나의 기도(테필라티)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88:13).

세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는 새로운 권위와 질서로 세상을 재건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선교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의인과 경건한 사람과 나라가 핍박을 받고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이를 살피고 심판하시며 공의로 통치하시기에 반드시 우리를 바른 방향으로 진행하게 하신다. 시편 88편 기자는 탄식하며 고난의 불의한 현실을 보며 찬양할 수 없는 존재들을 나열한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하라메팀) 기이한 일을(펠레) 보이시겠나이까(타아세) 유령들이(레파임)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요두카)(셀라)”(88:10).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피레에카)과 잊음의 땅에서(베에레츠 네쉬야) 주의 공의를(찌드콰테카) 알 수 있으리이까”(88:12).

시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의 판단이 설 수 있는 것은 의인과 주의 백성이 영광 중에 바로 설 때만이 세워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주의 인자하심을(하세데카) 무덤에서(바케베르),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에무나트카 바아바돈)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88:11). 불의한 현실, 부정의한 상태에서 경건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다. 시인은 욥과 같이 깊은 고난 속에서 영혼의 깊은 밤에 있는 듯 부르짖는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케게베르 에인 에얄)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는 무덤에 누운 자(바메팀 하페쉬 케모 하라림 쇼크베 궤베르)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미야드카 니게자루)”(88:4-5). 깊은 고난과 고통이 이 시편 기자에게는 가장 슬픈 시(키드너)를 쓰게 하고 있다. 또 이 시편은 가장 우울한 자(류폴드), ‘어둠이 내 친구라고 말하는 시로서 실망과 절망의 시로서 모든 슬픔과 고독(멜랑꼬리)을 가진 자들이 이 시를 보면 나의 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

시편 88편은 끝이 없는 고통을 말하며(1-8), 고통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온 것으로 억울하다거나 항거할 수 없는 것으로서 주야로 부르짖고 있다고 함(9-12),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신앙으로 나가며 절망하지 않는다고 함(13-18)으로 구성된다. 고난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기도를 할 수 없게 하지만 경건자에게는 오히려 깊은 신앙에 이르게 한다. 고통은 신앙자의 기도의 불꽃이 되게 하고 그 불이 끄게 되지 않고 활활 타게 한다고 말한다(스펄전).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베보르 타헤티요트)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베마하샤킴 비메쪼로트)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하마테카) 나를 심히 누르시고(알라이 사메카) 주의 모든 파도가(웨콜 미쉬바레이카)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88:6-7).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멀리하고 상황과 여건이 어렵게 된다(8, 17-18).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에이니 다아바)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알레이카 카파이)”(88:9). 시인은 이처럼 믿음으로 주께 나가겠다고 하며 주를 부르짖으며 기도하겠다고 한다(88:1-2, 9). 헤만의 마스길(교훈시), 마할랏르야놋(병상의 노래)의 시편기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고 어두움의 비극이 계속되고 영혼의 깊은 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면서 주께 나아가겠다고 하다. 비련의 노래(비창)들이 조선 시대 말, 한국의 근대역사 속에 짙게 불려지고 있었다. 이때에 희망의 노래를 부른 분들이 있다.

한센병 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되 준 서서평 선교사
한센병 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되 준 서서평 선교사

서서평 선교사는 1923년 조선 간호협회(현 대한 간호협회)를 세우고 초대 회장을 지내며 한국의 간호협회를 이끌었다. 그녀는 조선간호협회가 만국간호협회와 일본적십자간호협회에 가입하게 하며 국제화를 주도하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호 요강’, ‘간이 위생법등 네 권과 간호사업사 책을 비롯한 많은 번역서를 출판하였다. 그녀는 한글 말살 정책이 진행되던 때에 한글을 고집하며 조선 사람들에게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 정신을 고취하며 독립의 확신을 갖게 하였다. 서서평 선교사의 친구인 니일(Lois Neel)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 학교(현 한일 장신대의 전신)를 세워서 여성들을 가르쳤다. 니일의 후원으로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 3층의 교사를 짓고 니일이름 따라 이일(李一)학교를 짓게 된다.

서서평 선교사는 여학생들의 자활 능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무명베, 마포 등에다가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공예품을 만들게 했다. 이 물건들은 미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버지니아주 벤스(Vence)부인이 팔아 대금을 송금해 왔다. 이 수입금은 이일 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여졌다. 이는 한국의 첫 해외 수출의 효시가 된 것으로서 자활 선교의 모델이 되게 하였다. 서서평 선교사들은 어둠 속에 있는 한국 여자, 여성들의 어머니로서 축첩 금지, 공창 폐지 운동을 벌이며 여성 인권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녀는 윤락 여성들에게 빛을 비춰 빚을 갚아주며 새 생활을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을 공부 시켜서 새로운 삶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녀의 선교비 전부는 어려운 학교를 유지하는데 쓰였고 그래서 그녀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치료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1933년에 서 선교사는 조선 목회자 50여 명과 함께 나환자들을 이끌고 서울로 행진하자 나환자들이 퍼레이드에 동참하여 530여 명이 되었다. 그러자 총독부가 두 손을 들고 소록도에 나환자 단독 시설을 허락하며 나환자의 인권이 보호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푸른 눈의 마더 테레사는 독신으로 소외된 여인들의 한국 어머니로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 거룩한 간호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성녀가 되었다. 이같이 오늘도 이러한 아름다운 손길을 부르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