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16)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28)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레아하리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73:17).

거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 지구의 역사는 궤를 같이하여 움직이는가? 지구 온난화로 말미암아 기후의 변화가 크게 변하고 있다. 한반도는 벌써 한 여름의 날씨로 더위가 시작되었다. 더위와 더불어 건강을 해치는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시편 성경이 말하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자 한다.

시편 73편은 시편의 3권이 시작되는 서론의 시로서 욥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진다. 우리는 이 시에서 처절한 고난의 세계를 보면서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나구아)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웨토카흐티)”(73:14). 악인들의 현실은 우리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보인다. 그들은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고 교만하고 강포한 옷을 입고 살찌고 그들의 소득은 많고 능욕하고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천지를 지배하는 듯 언행을 일삼는다(73:3-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하늘을 대적하고) 그들의 혀는(우레쇼남) 땅에 두루 다니도다”(73:9). 욥이 당하는 고난처럼 신앙인은 생존의 위협과 고난의 문제로 신음하고 불의한 현실에 고통스러워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레바레)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73:1-2). 욥처럼 시편 기자는 영혼이 지치고 힘든 존재임을 토로한다. 드라마적인 대적자의 세력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기도 한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73:14). 이 시편 73편은 욥기의 고난보다는 단순하지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화해, 경건한 시인의 고통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하여 시적 언설을 표현하며 시인은 신정통치(Theodicy)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73:17). 분위기의 급전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이 악인들을 미끄러운 음부에 두시고 파멸에 던지어서 시인은 갑자기 황폐해지며 놀라울 정도로 전멸되는 결국을 보게 된다(73:18,19). 시인은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며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영접하시기에 그 분이 내 마음의 반석과 영원한 분깃이 된다고 고백한다(73:23-26). 시편 기자가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고백을 한다. 시인은 의심을 넘어서 신앙의 확신으로서 삶의 해방과 인생의 지혜, 통찰력으로써 어려운 사건과 환경을 이해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키라바트 엘로힘) 내게 복이라(리 토브)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28). 시인에게서 고난의 탄식으로 시작된 삶의 자리는 이제 찬양과 감사의 자리로 바뀌는 기적을 보게 된다. 선교사는 이러한 시편 기자의 시적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며 선교지에서 빛을 비추며 복음을 전하며 산 분들이다.

윌슨(우일선/우월순)선교사(R. M. Wilson·1880~1963)는 워싱턴대 의대를 졸업하고 1908년 의료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다. 그는 친구 오엔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위독해지자 전갈을 보낸다. 그 소식을 받고 내과 의사 포싸이트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건너 나주에서 말을 타고 갔다. 그는 길 가던 중 한센병 환자가 살라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품에 안고 말에 태어서 자신은 걸어가면서 광주 기독병원에 있는 윌슨 선교사에게 데리고 왔다. 친구 오웬이 죽어가는데 안타까운 마음이라 조마조마하였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포싸이트 선교사에게 감명을 받은 윌슨 선교사는 이후에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윌슨의 아들, 존 윌슨도 군산에서 평생 의료 선교사로 사역을 한다.

우일선 선교사와 그의 사택, 이 건축물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
우일선 선교사와 그의 사택, 이 건축물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

우일선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광주와 전남에서 한센병 치유공동체와 결핵 치유 공동체, 빈민구제 공동체를 형성하여 희생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 윌슨 선교사는 1904년 양림리 언덕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첫 선교의 불을 밝힌다. 그 후에 유진벨 선교사가 1908년 수피아 여중을 세우면서 사역을 함께 하기도 한다. 광주와 목표, 전남 지역의 선교는 유진벨(배유지), 최흥종, 오웬(오기원), 서서평(엘지자베스 쉐핑), 고든 어비슨 등 같이 사역을 하였다. 우일선 선교사는 1908년 광주기독 병원 2대 원장으로 외과의사로서 현대적 의술을 시행하며 이 지역 서양의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우일선 선교사는 성자의 영성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버림 받은 한센병 환우들을 가족들로 받아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센 환자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 이 지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제중병원(현 광주 기독병원)을 건축한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의 집단 거주지 내에 학교를 세워 환우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성경공부를 시킨다.

그는 또한 완치된 환우들에게 노동력과 적성에 맞는 직업 교육을 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자활의 길을 열어주었다. 우일선은 1926년 정부의 한센 환자 이주정책에 따라 여수시 율촌면(현 애양원)에 새로운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의료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는 성자의 영성으로 어린아이를 좋아하여 고아들을 돌보며 광주지역 주일학교 책임자로 어린이 교육을 맡아 크게 부흥시켰다. 한 선교사의 사랑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어져 광주지역의 양림동 고택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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