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17)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29)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그들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와야메테르 알레이헴) 하늘 양식(우데간 샤마임)을 그들에게 주셨나니”(78:24)

더위는 이제 한여름의 폭염을 예고하고 있고 나라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점점 포스트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부응하려 새롭게 경제와 정치 질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시편 78편의 구속사 시편을 통해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그들이 경험했던 출애굽의 사건(12-13)10가지 재앙 사건(42-51)과 광야 방랑 사건(14-41)을 회고하며 하나님의 구속을 노래하고 있다. 표제어는 <아삽의 마스길>로 찬양 제사장의 지혜 시편임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입을 열여 비유로(베마샬)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히도트)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테힐로트 아도나이)와 그의 능력(웨에주조)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웨니프레오타이오)을 후대에 전하리로다”(78:2-4). 구원의 역사를 전승하고 후대에 알리려는 노력은 이 시편 기자에게는 중요하였다.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도르 아하론 바님 이와레두 야쿠무)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78:6).

이 역사를 회고하는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불신앙과 불충성하던 세대와 같이 되지 않게 하려 한다고 말한다(78:7-8).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결정적인 사건은 출애굽, 홍해 도하의 사건이었다. “그가 바다를 갈라(와요찌 노제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와요레드 카네하로트 마임)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베아난 요맘), 밤에는 불빛으로(콜 하라이라 베오르 에쉬) 인도하셨으며...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78:13-16). 우리는 이처럼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일 때 과거 하나님이 구원한 사건을 회고하면서 신앙을 다시 다지는 일은 너무 중요하고도 지혜로운 일이다.

시편 기자는 출애굽과 광야 사건의 불순종의 역사를 기억하고 배역한 일을 회고하면서 다시 되풀이 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17-42). 반역과 거역의 역사는 광야에서 되풀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기적의 만나, 메추라기, 반석을 쪼개고 나온 생수의 기적 사건을 듣게 된다. 출애굽의 역사는 광야 방랑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역사와 다윗의 선택까지 회고한다(54-72). “자기 산당들로(베바모탐)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우비페실레헴)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야크니우후)”(78:58). 역사는 되풀이 되는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민족과 나라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백성은 소망이 있다(4).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의 용사들이 있다.

그 중 과거 조선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 중에 테이트 선교사(L. B. Tate)는 최초의 남장로교 7인 선교사 중에 하나였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와 마펫, 전킨 선교사 등이 함께 선교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18939월 전킨 선교사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하루에 56km씩 달려 전북 전주를 방문하였고, 그때에 전킨은 장마로 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을 뻔한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를 산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인구 5만의 도시라고 보고한다. 테이트는 그 해 11월 다시 은송리 선교 거점을 방문하여 보름 동안 머물면서 선교를 구상한다.

메티 선교사와 오빠인 테이트 선교사, 1920년 미남장로교회 보고서에 7인의 개척자로 소개된다.
메티 선교사와 오빠인 테이트 선교사, 1920년 미남장로교회 보고서에 7인의 개척자로 소개된다.

테이트 선교사는 189423회 선교회 연례 회의에서 여동생 메티(M. S. Tate)를 전주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전주 선교부를 설치한다. 테이트 남매는 319일 전주로 향했고 구입한 집에서 6주간을 보냈다. 메티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 찾아오는 부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유인물을 전했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5-8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해의 동학농민 운동으로 말미암아 치안이 마비되어 5월 초에 선교부를 철수하게 된다. 테이트 남매가 전주 선교를 하며 전주 은송리 선교 주택에서 복음을 전할 때 조사 정해원을 만난다. 1895년 성탄 주간에 테이트는 여동생 메티와 함께 군산을 거쳐 전주로 이사하게 된다. 이들은 내한한 지 32개월 만에 본격적인 호남 선교를 하게 된다. 테이트는 남자 아이들, 메티의 방에는 여자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복음은 자연히 퍼져 나가게 되었다. 1년 반이 지나 1897717일 테이트의 집에서 5명이 세례를 받았다. 김내윤, 김창국, 김창옥, 모친 강씨,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씨 부인(김성희) 등이 첫 전주 교회의 열매가 되었다. 나중에 1908년 금산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복음은 이처럼 씨알이 되어 한반도의 전역에 뿌려지고, 바람처럼 퍼져 나갔다. 이처럼 숭고한 복음의 발걸음이 이뤄놓은 놀라운 선교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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