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X. 미학적 차원


마르쿠제가 예수님의 아가페적 복음을 에로스로 보는 것과 같이 칸트의 철학(미학)에서 이성과 에로스의 접촉점을 본다. 이것은 마르쿠제가 독일어 sinnlich를 영어 sensuous로 번역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Sinnlich는 원래 ”감각의“, ”감각적“이라는 의미로 여기에 인식이라는 말을 붙이면 ”감각적 인식“으로 번역된다. 이것이 칸트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이 말을 일관되게 ”관능적“(sensuous)으로 번역했다. 그가 각주에서 밝히는 대로 Weiss는 이것을 sensible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옳다. 이 말은 ”관능적“, ”육욕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지만, 칸트가 그런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쿠제는 기쁨도 쾌락으로 번역했다. 그는 관능의 근본이 에로스(성욕)이라는 점을 덧붙였다.

그러나 칸트의 미학은 관능과 거리가 멀다. 마르크제의 칸트 해석은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관능의 학문으로서의 미학(2.9.1.)

송다니엘 주: 앞에서 밝힌 대로 마르쿠제는 감각을 관능으로 바꿈으로써 감각의 학문인 미학을 일관되게 관능의 학문으로 이해한다. 이로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이 sex의 학문으로 바뀐다. 마르쿠제의 설명을 들어본다:

예술은 현실과 다르다. 예술은 현실원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존하고 있다. 환상이 자유로운 것과 같다. 이러한 미학적 가치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미학에서는 관능과 지성이, 쾌락과 이성이 화해하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마르쿠제는 욕망(쾌락)과 인식(순수이성)을 중재하고 연결하는 제3의 능력을 칸트에 따라 판단력이라고 한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이러한 이론을 끌어올 수 있다.

 

●쾌감과 자유, 본능과 도덕 사이의 화해(2.9.2.)

쾌감을 추구하는 육신적 정욕과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의 요구가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이성이 관능적이고 동시에 관능이 이성적인, 억압 없는 문화의 원칙을 세울 수 있는가? 즉, 본능과 도덕 사이에 화해가 가능한가? 마르쿠제는 관능을 핵심으로 하는 미학적 기능의 도움을 받으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칸트가 그 기초를 마련하고 쉴러가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웠다. 마르쿠제가 어떻게 이것을 변증하는지 살펴본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차원과 거기에 종속된 쾌감의 감정(feeling of pleasure)이 단지 정신의 셋째 차원과 능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자연이 자율을 수용하고 필연이 자율을 수용케 하는 매개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중재의 입장에서 미학적 기능은 상징적인 기능이다. 이것을 간단히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칸트가 미학적 차원이 감성과 이성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라고 한 것을 마르쿠제는 본능적 쾌락이 이 일을 해준다고 한다.

그러면 앞에서 살펴본 대로 본능적 쾌락을 풀어준다면 문명이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는 단지 본능을 억제하고 노동을 통해서만 문명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한을 없앤다면 인간은 일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살 것이다. 이러한 논거에 대해 마르쿠제는 창조적 감수성을 상징하는 오르페우스, 나르키소스와 같은 환상의 원형들을 들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원형들은 지배와 착취로서가 아니라 내적인 성적 에너지를 풀어줌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인간과 자연의 성적 화해(erotic union: 성적 연합)을 말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성적 연합은 질서가 아름다움이며 노동이 놀이인 미학적 태도에서 일어난다.

 

●바움가르텐, 칸트 그리고 쉴러의 미학이론(2.9.3.)

서양에서 오랫동안 감각의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18세기 중엽에 와서 바움가르텐이 이것을 도입했다. 이렇게 해서 미학이 이성의 독재적 질서에 대항하여 관능의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방된 감각은 결코 문명의 파괴를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문명에 더 견고한 기초와 문명을 훨씬 더 고양하는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미학적 기능은 놀이충동이라는 기본 충동을 통해 작용하면서 ”모든 강제를 제거하고 인간을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유 안에 둔다(place man … in freedom).“ 그것은 느낌과 감정을 이성의 아이디어(idea)와 조화시키고 ”이성의 법칙에서 그의 도덕적 강제를 제거하고 감각(sences)“의 관심과 화해시킨다.

이곳에서도 마르쿠제는 감각을 관능(성욕)으로 이해한다. 그의 주장을 계속 들어본다: 감각은 에로스적이며(erotogenic: 성욕을 자극하는)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인식적 기능과 욕구적(appetitive) 기능의 융합으로부터 현실원칙에는 쓸모없는, 혼란하고 열등하고 수동적인 감각적 인식의 성격이 나온다. 이성적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관능은 이러한 이유에서도 철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많은 수정을 거쳐 문화이론에서 피난처를 얻었다. 예술적 진리는 이성과의 화해를 통한 관능의 해방이다. 이것이 고전적-관념론적 미학의 중심 사상이다. 예술은 현 문화에서 통용되는 현실원칙에 도전한다: 예술은 관능의 질서를 대표하므로 금기된 논리인 억압에 반대하여 충족의 논리를 불러낸다. 예술이 쾌락원칙에 위탁되어 있으므로 승화된 예술적 형상 뒤에 있는 승화되지 않은 내용이 드러난다. 정신분석에서는 예술이 성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연구가 큰 역할을 한다.

문명은 감정충동(sinnlicher Impuls)과 형상충동(Formtrieb)이라는 기초적 충동의 결합과 상호 작용에 의해 자라난다. 문명이 감정을 이성화하고 이성을 감정화 함으로써 이 두 본능을 화해시키지 않고, 다음과 같은 결과가 될 정도로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다: 이성의 독재가 감정을 빈곤하고 야만화시키는 동안 감정은 자기를 주장하려고 애쓰다가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자유롭게 실현되려면 이 갈등을 없애야 한다. 충동만이 인간 존재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주는 지속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두 충동을 화해시키려면 제3의 충동이 있어야 한다. 쉴러는 이 매개하는 제3의 충동을 놀이충동(play impulse: Spieltrieb)이라고 정의하고 놀이충동의 대상은 아름다움이며 이때 그의 최종목표는 자유라고 했다.

 

●비억압적 문명의 요소들(2.9.4.)

자유란 공포와 불안이 없는 삶이다. 어떠한 강제가 있어서도 안 된다. 외적 내적 강제도, 도덕적 강제도 없고 법과 규범에 의한 모든 억압과 궁핍이 없어야 자유하다. 이것은 마르쿠제가 바움가르텐을 인용하면서 한 말인데 „에로스와 문명“의 원서에서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Man is free only where is free from constraint, external and internal, physical and moral – when he ist constrained neither by law nor by need. But such constraint is the reality. Freedom is thus, in a strict sence, freedom from established reality: man is free when reality loses its seriousness.“ 이러한 곳에서의 삶은 노고가 아니라 놀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 이끄는 도구는 놀이충동이다.

이곳에서 법과 도덕이 주는 강제가 없어야 인간이 비로소 자유하다는 말에 유의하자. 이것이 오늘날의 좌파의 주류인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존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기존의 법질서를 바꾸려고 하는 이유이다. 이들은 법의 강제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의회에서 세력을 얻어 계속 기존 법을 바꾸어나간다. 보통 사람은 이들이 어떤 법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잘 모른다.

만약 놀이충동(play impuls)이 실제로 문화의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을 변형시킬(transform)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객관적 세계인 자연은 원시사회에서와같이 일차적으로 인간을 지배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현 세계에서와 같이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관조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쉴러). 이렇게 체험의 형태가 바뀌면 체험의 대상인 자연도 바뀐다. 즉, 자연은 폭력적인 지배와 착취에서 해방되어 놀이충동에 의해 형성된다. (독일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녹색정당에 대거 입당한 이유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므로 자연보호에도 열을 올린다.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 자연수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마르쿠제는 이 자유는 관능을 해방하는 데에 있지 이성의 해방에 있지 않다고 한다. 즉, 문명의 구원은 문명이 관능에 부여한 억압적인 통제를 폐지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한다(the salvation of culture would involve aboiltion of the repressive controls that civilization has imposed on sensuousness).

여기에 마르쿠제를 비롯한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기의식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자기를 문명의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명의식을 가진 문화 선교사이다. 또한 도덕과 법이 인간을 억압한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법과 도덕을 어겨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와 문명을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국가에는 왜 그렇게 많은 불법이 성행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들은 특히 독일에서 또한 „재미(Spaß; fun)“를 거의 신성시한다. 모든 억압을 벗어나서 자기에게 흥미를 주는 것을 선택하고자 한다. 공부도, 노동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 재미라는 말은 독일사람에 가장 중요시하는 말이 되어간다. 이들은 이렇게 살아야 자기를 가장 잘 실현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온다.

이들은 이렇게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지고 활동하므로 힘이 있다. 우리가 이들의 본질을 알아야 이들을 대처할 수 있다.

 

●노동을 놀이로 전환하기(2.9.5.)

억압이 없이도 질서 유지가 가능한가? 억압은 결핍 때문에 온다. 충만 속에서는 억압이 없으므로 질서가 따른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놀이와 자기실현이 가능하다. 이성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도록 승화되면 안 되고(이성의 탈 승화: desublimation of reason), 이와 반대로 관능이 스스로 승화되어야 한다(관능의 자기 승화: self-sublimation). 이것이 새로운 성숙한 문명의 조건이 된다. 문명화된 도덕은 본능을 억압하는 도덕이므로, 억압된 본능을 해방하면 강제로 문명화된 도덕은 힘을 잃는다. 그러면 모든 억압하는 종교적 가치관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수적 기독교인들과 보수적 세계관[1]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이유이다).


X. 성욕을 에로스로 변화시킨다


이 부분은 본서의 결론이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 그의 삶과 그를 전인격적으로 에로스와(성애화) 시켜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의 논증에 비약이 있고 그의 주장이 너무나 파격적이므로 독자가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어렵다. 더욱이 앞부분을 섬세하게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마르쿠제가 말하자고 하는 바는 분명히 드러난다. 세세한 부분까지는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요점만 잘 파악하면 된다.

 

지배를 철폐하고 본능을 해방시킨다: 인류와 세상이 새롭게 창조된다[2](2.10.1.)

문명은 본능(성욕)을 억압한 대가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억압이 없는 문명과 성욕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문명이 가능한가? 본능을 억압하는 지배(가치관, 도덕, 법률, 종교)와 억압적 이성을 철폐하고 전혀 새로운 것으로 대체할지라도 문명은 유지될 수 있는가? 이것이 새로운 현실원칙 안에서는 가능하다. 그곳에서는 본능과 이성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고 인류와 세상이 새롭게 창조된다[3](created the mankind and the world). 억압 없는 새로운 현실에서는 본능의 해방(instinctual liberation)을 그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문명의 퇴행을 감수해야 하지만(놀이를 위해 노동 일수를 줄이므로 생산이 감소하여 약간의 물질적 손해를 입게 됨), 성숙한 빛 아래서 새로워진 이성에 의해 인도된 퇴행이므로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온다. 인간이 자유롭게 유희하는(„play“: 노는)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서 복지가 약간 감소하는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본능의 표출을 긍정하므로 선과 악의 개념도 바뀐다. 새로운 이성이 주도하는 새로운 철학이 와야 하며 모든 종교의 경전은 (이것은 지배로서 인간을 억압하므로) 새롭게 다시 쓰여야 한다. (성경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기독교 내의 성경비평을 생각해 보자! 이들은 성경 메시지도 세속화된 사회에 맞게 transformation돨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문명이 자기 과제를 완수하고 자유로워진 인류와 세상이 새롭게 창조된 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에로스의 해방이 인간에게 혼란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올 것이다.

 

●성 본능에 미치는 효과(2.10.2.)

성 본능 자체는 도덕을 모르므로 질서가 없다. 잘못하면 이것이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과잉억압이 제거되고 성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바뀐다면 합리적인 질서(성적 욕망의 합리성: libidinal rationality)가 가능하다. 인간이 성적으로 다시 활성화되어 몸 전체가 쾌락의 도구가 되며, 일부일처제도 폐지되어 인간에게 낙원이 올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역사적으로 길고 잔인한 길들임의 결과이다. 마르쿠제는 본 단락에서 프로이트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성과원칙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개인 육체의 성적 인력(引力)과 성관계는 보통 여가에 한정되고, 성기를 사용하는 성관계를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맞추어져 있다. 원치 않게 많은 분량의 노동을 감수해야 하므로 육체의 비성화(desexualization)는 계속된다. 그런데 반대로 노동 일수와 노동에 사용될 에너지가 최소한도로 줄어든다면 이렇게 제한할 근거는 사라지고, 시간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성욕(libido)이 해방되어 현실원칙을 통해 자기를 억제하던 제도들을 넘어서 넘쳐 흐르게(overflow) 될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만 성교를 허락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길고 잔인한 길들임의 과정의 결과이다. 인간의 삶이 가정생활 외에서는 주로 그들의 생산품과 노동력으로 규정되지만, 가정과 부부의 침대에서 이들의 삶은 신(神)과 도덕법의 정신으로 지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원칙에 순응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일은 새롭고 억압 없는 현실원칙이 등장하고 성과원칙이 부과한 과잉억압을 제거함으로써 역전될 것이다. 성적 관계에서 단지 육체로만 쾌락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육체가 더는 온종일 노동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므로 육체는 재성화(再性化)될 것이다.

이러한 성욕의 확대에 포함된 퇴행은 일차적으로 모든 성감대의 회복(재활성화)과, 이로써 전 성기적인 다양한 형태의 성욕(polymorphous sexuality)의 소생으로 나타나고 성기로만 성을 즐기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몸 전체가 매력의 대상(object of cathexis)과 즐기는 물건(a thing to be enjoyed)과 쾌락의 도구(an instrument of pleasure)가 된다. (성기뿐 아니라 몸 전체가 성적 도구가 된다). 성적 관계에서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 특히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가족을 해체할 것이다.

 

성욕이 자기 승화를 통해 에로스로 변화된다: 인격 전체의 성애화(2.10.3.)

누구나 자기 성욕을 충족하려고 한다면 색정광(society of sex maniacs)이 설치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르쿠제는 성욕이 억압된 사회에서 특별한 여건 속에서 성욕을 갑자기 풀어놓은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굶주린 군인의 떼, 집단수용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성적 광란이다.

그러나 억압이 없고 성욕이 확장된 사회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성기만을 통해 만족을 얻었던 성욕이. 인격 전체가 성애화된 경우(erotization of the entire personality)에는, 성욕이 확장되고 억압되지 않아서 자주 충족될 수 있다면 둑이 터져서 홍수가 나는 참변은 없을 것이다.

생산만을 위한 성교에서 쾌락을 위한 성교로, 성기만 사용하던 성교에서 몸 전체를 성감대화해서 쾌락을 얻는 성행위로 전환하고, 육체만을 통해서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를 성애화하는 것이 성욕이 자기 승화를 통해 에로스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의 성의 기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어 인간의 삶 자체가 욕망을 실현하는 장소요 목적이 된다. 에로스는 성욕의 양적, 질적 확장이다. 성욕의 폭발이 아니라 성욕의 확장이며 성교의 확장이다.

성기중심적인 일부일처제의 우위(monogamic genital supremacy)는 억압적 문명의 결과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의식이 바뀌고 제도가 개선(transformation: 변형)됨으로써 성욕도 자유롭게 발전하고 충족되어야 한다.

 

●억압적 승화 대 자유로운 승화(2.10.4.)

앞에서 성욕이 에로스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억압 없이 어떻게 승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마르쿠제는 ”성기를 피하는 리비도(genitofugal libido)“라는 이론으로 성기 우위를 벗어나서 유기체 전체의 에로스화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억압적인 사회적 관계가 나타나다(2.10.5.)

성욕이 억압된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자기 성욕을 제한 없이 풀어놓았다면, 이것은 공통되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는 신경증 환자로 치료받거나 색정광, 치한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면 에로스의 승화가 된다. 신경증과 승화의 차이는 그 현상이 사회적인가에 대한 질문과 관계있다[4].

만약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 동시에 개인 성욕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다양한 형태의 나르키소스적인 성욕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 더는 문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스스로 문화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쾌락을 성기의 활용으로부터만 얻을 것이 아니라, 성숙한 문명에서는 노동을 통해 지속적이며 좀 더 포괄적인 성적 관계에서 쾌락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한 확대는 더 강렬하고 높은 충족을 준다.

그 외에도 충족이 육체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어 그곳에서만 확장된다는 것은 에로스의 본질에 맞지 않는다. 유기체를 육체적 부분과 정신적 부분으로 나누어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역사적인 억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적대 관계를 극복하면 정신적 영역은 (성적) 충동에 대해 개방될 것이다. 감성적 이성이라는 미학적 개념이 이러한 경향을 암시한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결국 하나이며 같은 것(아가페도 결국은 에로스이다)이라는 생각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플라톤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추출할 수 있다.

에로스의 충족을 계속하게 되면 한 사람에 대한 육체적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육체적 사랑[5]으로, 아름다운 일과 놀이로 그리고 결국 아름다운 지식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도된다. ”더 높은“ 학문의 길은 진정한 소년사랑(동성애)를 통한다. 정신적으로 낳는 것(spiritual ”procreation“)은 육체적으로 낳는 것과 같이 에로스의 일이며 국가의 올바르고 진정한 질서도 사랑의 올바르고 진정한 질서처럼 에로틱한 질서이다. 즉, 문화를 창조하는 에로스의 능력은 억압 없는 승화이다. 성욕은 다른 것으로 전환되지 않고 목적을 이룬 후에 쉬지도 않는다. 오히려 성욕은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더 완전한 충족을 찾아 목적을 초월한다[6].

이곳에서 마르쿠제가 ”에로스와 아가페는 결국 하나“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논리적 비약이다. 즉, 인간에게 육체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를 이것의 예로 들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와 아가페는 연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다르다.

인간 능력의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노동: 본능 구조의 변화(2.10.6.)

이곳에서 마르쿠제는 인간이 가진 능력이 억압 없이 쾌락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놀지라도 노동 성과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한 문명도 발전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욕을 자유롭게 발산하도록 허락한다면 노동력이 상당히 저하된다는 염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노동 과정과 관련지었음을 상기시킨다. 프로이트는 더 나아가서 에로스는 문명의 동력이며(cultural drive)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몸 전체에 쾌락을 준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살아있는 실체를 계속해서 더 큰 단위로 만들어서 생명이 연장되고 더 높은 발전에 이르도록 추구한다(eros as striving). 생물학적 충동은 문화적 충동이 된다. 육체 전체를 쾌락의 주체와 대상으로 보존하려는 에로스의 목표는 유기체의 지속적인 세련과 감수성의 강화와 쾌락의 증가를 요구한다. 이 목적을 실현할 계획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고생을 제거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병을 극복하고 사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쾌락원칙에서 직접 나오며 개인들을 좀 더 큰 단위로 연합시키는 작업을 구성한다. 성과원칙의 파괴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은 목적으로부터 비켜나지 않고 충동을 수정한다. 이렇게 해서 승화가 있고 그 결과 문화가 있다.

에로스가 이렇게 자신을 펼칠 수 있게 하려면 사람들의 작업 관계에서 더 높은 결속(unity)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본능구조(instinctual structure)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조건을 바꾸어 노동을 놀이로 바꾸는 본능적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본능구조의 변화는 본서의 핵심 주제이다.

작업(work)에 에로스적 경향이 있다는 생각은 정신분석에서 낯설지 않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공동작업의 경우 동료 사이에 규칙적으로 리비도(성욕)의 결속이 형성된다. 이 결속은 단지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점을 넘어서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오래가게 하고 공고히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능을 억압해야 하는 이유로서 생활고(아낭케)를 드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또한 고난과 생활고 때문에 인류 문화를 억압 없는 성문화(libidinous culture)로 바꿀 수 없다고 해서도 안 된다. 문명이 에로스의 건설자(builider of eros)가 될 수 있다. 즉, 문명은 에로스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추구하는 것을(innermost trend of eros) 자연스럽게 성취한다. 삶의 결핍도 성적 전개의 일차적 영역이 될 수 있다. 즉 생존을 위해 투쟁할지라도 본능을 자유롭게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노동에 에로스적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을 개발한다면 노동이 에로틱한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심지어 본능의 충족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 문명의 기초를 형성하는 작업 관계와 문명 자신은 비성화되지 않은 본능의 에너지(성적 에너지)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승화라는 개념 전체가 흔들린다. 노동할 때에 전 성기적인 다양한 형태를 가진 성욕(eroticism)이 다시 활성화된다면 그 노동은 작업 내용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다. 결핍과 소외를 극복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성욕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된 사회적 조건은 노동을 놀이로 변화시키기 위한 본능의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리비도적 노동 관계의 가능성(2.10.7.)

앞에서 리비도적 노동 관계의 중요성, 즉 노동하면서도 성욕이 충족되는 것에 대해 말했는데 이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한지를 살핀다. 이러한 리비도적 노동 관계는 모계사회와 이러한 특성을 보이는 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선사시대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성숙한 문명에서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산업구조를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이것을 이룰 수 있다. 마르쿠제는 놀이라는 말을 성욕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진전시킨다. 즉,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노동을 성욕과 연관시킴으로써 리비도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는 노동하면서 동시에 성욕 충족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에로스를 충족시키지도 않으면서 성공적인 노동을 통해 쾌락을 얻고서 이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비인간화를 쾌락으로 찬양하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이렇게 문화막시스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직업관, 노동윤리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이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에로스가 충족되지 않는 노동, 연구, 업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주]

[1] 마르쿠제는 이러한 보수적, 종교적 가치를 지배라고 하여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2] 이것은 혁명적이고, 유토피아적이고 메시아적인 생각이다.

[3]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새상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인류와 세상을 창조하려고 한다!

[4] 이것이 또한 문화막시스트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회를 에로스화시키려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별다른 성행위(예: 소아성애, 근친상간)를 범죄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5] 이것이 마르쿠제, 문화막스주의자들이 일부일처제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성적 파트너의 수는 무제한적으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6] 성욕은 충족된 후에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충족을 찾아간다.

송다니엘 목사 이메일. daniel.song@gmx.de
송다니엘 목사 이메일. daniel.song@gmx.de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