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31일은 종교개혁 506주년 기념일이다. 1517년 신학 교수이자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는 독일 위텐베르그 “만인성자교회” 대문 앞에  95개조의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비성경적 요소들에 대해 강력히 항거(Protest)하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란 말이 나왔고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됐다. 

95개조 선언문을 요약한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 이른바 종교개혁의 “다섯개 솔라들” (The Five Solas of the Reformation)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다섯개의 솔라들”에서 모두 벗어나 있었다.

마틴 루터는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키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고,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마리아나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기톨릭 교회 교리를 도무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루터는 금욕주의를 주창한 고대 희랍의 스토아 학파(Stoicism)와 같이, 오랜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수많은 참회(Penance)와 금욕적이고 인위적인 고행(Affliction)을 자신의 육체에 가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정독하기 시작하였고 “오직 성경”을 통해 복음의 핵심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결코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인간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루터가 발견한 성경의 복음이다. 
이것이 신학적 용어로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로 표현된 것이다. 루터는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심장이요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거나 넘어지거나 하게 하는 결정적 교리”임을 강조했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이미 구약의 아브라함(창 15:6)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박국 선지자(합 2:4)를 거쳐, 신약의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다음 구절들에서 분명히 밝히는 바와 같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하나의 빨간 줄처럼 흘러 내려오고 있는 진리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또한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이를 강조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위의 말씀들과 같이,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자를 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신칭의의 진리가 종교개혁의 중심 메시지였다. 이 교리는 1563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포함되어 개혁주의 교회의 핵심 신학으로 자리잡혀 왔다.

그런데 이신칭의의 개혁신학에 대한 도전과 반대가 과거에도 많이 있어 왔지만 근세에 들어와 새 관점 학파라는 부류에서 이신칭의 신학을 비판하며 서구 신학계와 한국 신학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들인 샌더스, 던, 탐 라이트 등이 개혁교회들이 믿고 있는 바울의 이신칭의 신학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해석을 주장했다. 풀러신학교의 김세윤을 비롯한, 권연경, 최갑종 등 일부 한국인 교수들과 목사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새 관점학파는 오직 믿음보다는 윤리와 성화를 이신칭의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은 일차적이요 미완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 완성시켜야 할 이차적 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성화를 통해 그 의를 성취하지 못하면, 그는 최종 구원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에게 내려지는 칭의는 영원하지도 않고 종말에 가서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주의 신학의 5대 요소(TULIP) 중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대단히 비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파괴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는 완전하고 법정적(Forensic)이며 최종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화 여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인간이 성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 성화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죄로 오염된 성화이지,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의는 결코 못 되는 것이다. 일찍이 칼빈은 “성화는 칭의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결코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었다.  

따라서, 새 관점학파의 칭의 신학은 결국 인간의 성화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성화 구원론” “행위 구원론” “칭의 유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오직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와 성화 정도에 따라 완전한 칭의가 가능해지기도 하고 불가능해지기도 하기 때문에 종말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칭의 유보론”인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신인 합력설을 믿는 세마이-펠라지아니즘(Semi-Pelagianism), 알미니아니즘(Arminianism), 기톨릭의 행위구원 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단인 안식교의 “조사 심판대” 교리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선포한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칭의를 주실려고 계획하셨다면, 칭의가 되는 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아닌 율법 준수 안에서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을 주장한 샌더스, 던, 라이트 등은 모두 영국 성공회 주교들이다. 미국에서는 성공회(Episcopal Church)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영국 국교(The Church of England)이다. 영국 국교는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다 계승하지 않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간 노선을 취하면서 칼빈의 개혁신학을 엄격하게 추구하자는 청교도들을 배척하였다. 역사적으로 영국 국교는 이신칭의 신학을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을 따라 왔다. 이러한 영국 국교의 주교들인 샌더스, 던, 라이트 등이 알미니안적인 새 관점 학파를 이루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가 새 관점 학파를 환영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개혁주의 이신칭의 신학은 이런 견지에서 새 관점 학파의 칭의 신학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거부한다.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은 정통적 칭의론을 비판하며 종교개혁 신학을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써 완전하고 영원한 칭의를 값없이 선물로 얻게 되고, 칭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으면서 이신칭의의 은혜에 대해 모두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다.

황현조 목사(커네티켓비젼 교회)
황현조 목사(커네티켓비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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