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0)

지난 시간에 이어 다석 비판의 세 번째 시간으로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다석은 1937년 정초에 요한복음 3:16을 해석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김교신의 제자 류달영은 그 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석의 생각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하였다. 다석은 말하기를 하느님이 사람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성령)을 사람의 맘속에 넣어 주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를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한13:9). 사람은 제 맘속에 하느님의 본성()을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하였다. 석가의 불성, 공자의 인성, 예수의 영성은 같다고 말하였다.”

복음의 핵심 구절인 요한복음 3:16을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가?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이 당치도 않다니? 뭘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러고도 기독교인이고,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한이 예수를 성육신한 분이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높이 달게 하시고 부활로 다시 높이 들어 올리신 것은 인간의 영원한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참사랑의 행위임을 모른단 말인가. 상식에 속하는 것조차 모르고 어찌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기독교를 제일 잘 아는 양 떠들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다석은 삶의 목적을 제나(몸나)가 얼나로 거듭나 아버지 하느님에게 다다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인생의 목적은 완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다석은 언제나 성령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불변의 진리라고 말하면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멸망의 육체를 버리고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예수나 석가가 보여준 삶,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가 보여준 삶, 즉 삼독(三毒)의 나를 초월하자고 말하고 있다.

다석은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인 삼독(三毒)의 탐진치(貪瞋痴)의 뿌리를 뽑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리하여 탐욕(貪慾)의 뿌리인 식욕을 버리기 위해 하루에 한 끼니만 먹었으며, 진에(瞋恚)의 뿌리인 증오를 버리기 위해 누그러지기로 하였고, 치정(癡情)의 뿌리인 색욕을 버리기 위해 52세 때부터 해혼(解婚)하여 부부가 남매처럼 지내는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성령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예수를 화육하신 분으로 보고 있는 요한은 육체를 멸망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다석 류영모와 그의 아내 김효정
다석 류영모와 그의 아내 김효정

요한복음 6:63은 이렇게 말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다석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고깃덩이요 짐승의 수성에 불과한 몸나(육신)는 멸망하는 상대적 생명이고, 얼나는 영생하는 절대적 생명이기에 결국 몸나는 얼나로 솟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나는 성령으로 된 하늘나라에 속한다고 하였다. 과연 그런가.

우선 요한복음은 육을 결코 고깃덩이요 짐승의 수성에 불과한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가 몸(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지 않았는가. 단지 영생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담지(믿지) 않은 몸(육신)은 무익하다(쓸데없는 죽은 시체)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 않거나 예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영이 없는 얼간이이고, 영원한 생명(영생)을 갖지 못한 죽은 사람이라는 그런 말이다.

또한 다석은 거듭난다(위로부터 난다)는 말을 인간론적 의미에서 몸나(제나)가 얼나(靈我), 즉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는 말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이는 인간론적 의미가 아닌 신론적(기독론적) 의미이다. 이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예수의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α)하나님이 왕이 되어 (나와 세상을) 통치하는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주어인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하늘 어딘가에 있는 장소(천당) 개념 또는 미래에 죽어서 가는 어느 나라가 아니다. 다음으로, 예수가 말하는 거듭난다는 것은 자연인에서 (기독교) 신앙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주어가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나에서 예수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얼나로 갈 수 있는 곳인가?

그래서 거듭나야, 즉 주어가 인간()에서 하나님(예수)으로 바뀐 사람을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예수)이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3:5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거듭나야, 즉 기독교 신앙인이 되어야 인간, 즉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 통치하는 세계가 아닌 하나님(예수)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세계 속에 들어가 사는 자가 된다는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셔야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뜻의 철저히 신론적(기독론적) 의미이지 내가 노력하면 갈 수 있는 인간론적(자아적) 의미가 아니다.

요한은 3장에서 인간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몸나가 얼나로, 즉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성화(聖化)를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론적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아는, 들어가는) 데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내 안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이 살아 계셔 나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거듭남의 의미이다. 또한 성령으로 된 하늘나라는 얼나인 내가 주체(주인)가 아니다.

나아가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란 내 안에 주인이 되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을 찬송하고 경배하며(예배, 67:3; 43:21), 그분의 이름을 널리 전하는 선교(28:18-20; 4:34-35)에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 나라가 예수 나라’(주와 그리스도의 나라, 11:15)가 되어 나만이 아니라 온 만민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데 기독교인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3:10-11). 이것을 한마디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고 말한다.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곧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져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데 있다(9:16; 14:4; 40:35). 이를 요한복음으로 말하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론’(인간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그리스도의 영광)에 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모든 과학, 예술, 종교,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2.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아들 노릇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자는 존재이다. 이것이 본디는 참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3차원)은 죽었다 깨어나도 차원이 다른 하나님(4차원)과 결코 같아질 수가 없다. 창세기 3(5)3차원의 인간이 4차원의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이 인간을 원죄에 빠뜨렸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기쁨(즐거움)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거나 하느님께 올라가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이 세상에 예수님을 내려 보내주셨다. 그분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해 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는 데 기독교인의 기쁨(즐거움)이 있다.

다석은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은 거의 같다고 하였다. 다석은 율법의 종교, 즉 노력을 통한 깨달음과 성화를 통한 구원(해탈)의 길을 말하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의 종교가 은혜’(노력이 아닌 선물)의 종교임을 몰랐고, 따라서 끊임없이 예수의 주변만을 돌면서 변죽만 울렸다. 이 같은 다석의 모습은 그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김흥호 선생은 부처가 되는 길은 노력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불도의 핵심은 얼을 되찾는 것이다. 세상에 얼을 찾는 것(見性)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얼을 찾아야 어른이 된다(成佛). 세상에 할 일이란 무엇이냐. 얼 찾기가 아니냐.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할 일이다. 얼 찾는 일이 할 일이다.” 김흥호에게서 얼이 곧 하나님이 되었다. 제자 김흥호는 스승 류영모를 제대로 따라갔다.

김교신의 제자였던 류달영은 훗날 스승의 정통신앙보다 다석의 종교다원주의적 비정통신앙이 옳다고 따라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교신은 19361월 일기에 부활의 진리처럼 고귀한 것이 없으나 부활론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썼다. 김교신이 나처럼 80살을 넘어 살았다면 30살 전후의 정통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왔을 것인지 나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나는 하나님이 김교신 선생을 지극히 사랑하여 종교다원주의에 빠져 있는 다석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일찍 데려가셨다(1945425)고 생각한다.

김선보는 그의 논문 다석 류영모의 종교관에서 다석을 이렇게 칭송하였다. “우리에게서 다석의 종교와 철학의 세계는 손색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지금은 말만 무성할 뿐 말씀이 사라진 시대이다. 참 말씀이 그립고 참사람이 그립고 참 진리가 그리운 시대이다. 다석은 평생 하느님만을 만나기 위해 얼로 하나 되기 위해 몸나를 죽이는 방법으로 식색(食色)을 절제했으며, 여러 종교의 진리를 마치 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모아들이듯이 말씀의 꿀을 모아 오늘의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 다석의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면 제나(自我)를 이겨 얼나(靈我)를 깨달아 제소리를 하고 해탈(解脫)을 누리는 것이다.” 다석 사상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3. 이제 다석 선생의 사상에 대해 정리해 보자. 다석은 참되게 살려고 노력한 훌륭한 종교인이지, 은혜 속에 살려고 한 기독교인은 아니다. 다석은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진리보다 크신 분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는 예수를 믿는 진리이지, 막연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제자 함석헌도 진리가 예수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스승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성경(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든지 아니 믿든지 둘 중 하나이지 제3의 길은 없다. 요한복음과 관련하여 다석에게 요한복음의 배경, 문학적 장르, 구조, 묵시문학, 상징코드니 하는 말은 꺼내고 싶지 않다. 다석은 이런 것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예수를 자신의 한 분 스승이라고 말하기에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그의 생각들을 비판해 보면 이렇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기본 사상에 대해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말한 것이 없다. 다석은 요한복음을 본문이 말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읽지 않고, 단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읽었을 뿐이다. 다석에 대한 존경 내지 우상숭배는 가장 형편없는 그의 요한복음 해석마저도 대단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죄송한 얘기지만 다석은 요한복음을 단지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읽었을 뿐, 성서신학적으로 볼 때 그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갔다. 한마디로 다석의 사상은 철저히 노력과 고행을 통해 자기를 고양(해탈)하는 불교적 성인지학(聖人之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한 노력과 고행을 통한

자기고양을 구원의 길로 오해

다석은 얼굴은 예수요, 학문은 공자요, 정신은 석가요, 삶은 노장의 모습을 종합해 놓은 그로테스크한’(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 같은) 모습이다. 불교는 고()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나 기독교는 그 고통의 근원이 죄()에 있으며 죄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다석은 구원을 위한 출발점인 죄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이 없다. 또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 하나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기본 사상인 성육신, 십자가, 부활, 재림을 믿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석가의 가르침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종교다원주의적 진리를 역설했다.

그의 제자 함석헌도 스승을 따라 같은 사상의 길을 갔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간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고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함석헌 선생은 말한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다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기성 종교로써 세계 종교를 통일하자는 생각은 어리석은 욕심이다. 낡아빠진 생각이다.” 그는 내가 믿는 종교만이 옳고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는 틀렸다는 배타주의를 철저히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기독교가 배타성을 지니는 것은 예수의 진리가 차원이 다른 배타적 진리이기 때문이지 타종교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즉 모든 종교는 그 나름의 진리를 갖고 있다. 단지 어떤 진리냐 할 때 주어가 3차원인 인간()인 진리(타종교)와 주어가 4차원인 하나님(예수)인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어가 전혀 차원이 다른데 이를 같다고 더 이상 우기지 말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42:3).

나는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모든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하나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모든 종교는 다 같이 진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진리를 말한 예수라는 그 하나를 지향하는 것이다. 헬레니즘을 포함하여 동양의 제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주어인 3차원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성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이 주어인 4차원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3차원은 아무리 커도 3차원이고 4차원은 아무리 작아도 4차원이다. 즉 돌은 아무리 커도 돌이고 다이아몬드는 아무리 작아도 다이아몬드이다. 보다 큰 4차원은 보다 작은 3차원을 포함할 수 있으나 보다 작은 3차원은 보다 큰 4차원을 포함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와 배타적일 뿐 아니라 타종교를 다 포함하는 예수 일원론적 지향을 가능케 한다. 이는 타종교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주어가 전혀 다르고 삶의 궁극적 목적이 전혀 다른 데 이를 어찌 함께 묶어 도매금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참 진리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진리는 참진리가 아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배타적 종교이고, 예수의 진리는 배타적 진리다. 이 때문에 예수교는 타종교와 대립하고 갈등한다.

다석 선생의 실패는 그의 제자인 함석헌 선생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다석은 함석헌 선생이 자신처럼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난 존재로 알았다. 그런데 함 선생이 여자 문제로 몸나의 모습을 보이자 지극히 당황했고 그를 제자라고 생각한 것을 크게 후회하며 통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석의 제자인 박영호는 다석의 추모 2주기에서 퀘이커 신자가 된 함 선생이 구경각(九竟覺)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다석의 표현으로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났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4차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4차원의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인간은 몸나이든 얼나이든 여전히 3차원이고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현대 중국의 사상가인 리쭝우(李宗吾) 선생은 말한다. “우주의 진리는 하나다. 철저히 연구하면 동서 모두 피차 충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인, 인도인, 서양인이 각각 독립적으로 하나씩 굴을 파고 들어갔는데, 이제 이를 하나로 융합할 때가 왔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하나로 통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노자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본 도올은 하나로 통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공자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석 선생은 하나로 통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석가의 길로 보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예수와 다석이 오늘 살아서 두 분이 마주앉아 대화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예수의 질문: “다석아,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석의 대답: “나는 당신을 석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대답: “다석아, 너는 나를 안다고 할지 모르나 나는 너를 모른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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