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9)

1. 지난 시간에 이어 다석 비판의 두 번째 시간으로 진리의 보편성과 배타성의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다석이 정통 신앙의 껍질을 깨고 비정통신앙으로 전환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한 사상적인 영향이다. 둘째는 20세에 불경과 노자 등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게 된 것이다. 셋째는 두 살 아래인 아우 영묵(永黙)의 돌연사이다. 이 세 요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다석이 역사적이고 유일신적 기독교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지 못하고 윤리적이고 범신론적 기독교인인 톨스토이를 만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성경(기독교)에 대해 깊이,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뿌리 깊은 전통적 동양 사상에 경도된, 즉 불경과 노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율법의 행위를 배운 점은 종교다원주의로 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아우의 죽음으로 낙심한 그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갖고, 죽음에 대한 사색과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알고자 종교 속으로 들어간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심일섭은 다석 류영모의 종교다원사상과 토착신앙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이처럼 다석은 그의 높은 동양철학적 토착화신앙으로써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논의에서 항상 걸림돌이 되어 온 불교와의 관계도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배타성도 넉넉하게 극복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따지고 싶다. 토착화란 그 본래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 본래의 사상을 왜곡해서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다석은 기독교를 토착화를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왜곡한 사이비 기독교 사상가일 뿐이다.

또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배타성이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나쁜 것인가. 그리고 과연 그 배타성이 타종교의 진리와 양보하거나 타협하거나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아니다(No!). 결론부터 말한다면 기독교는 철저히 배타적인 종교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진리의 배타성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타종교와 통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배타성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가 굳게 붙들어야 할 진리의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진리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리가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진리가 보편성와 더불어 배타성을 지니고 있어야 그것이 참다운 의미에서 진리이지, 이 둘 중에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부분적 진리일 뿐 전체적 의미의 참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진리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말은 인간세계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인 사랑, 자유, 정의, 평화, 생명과 같은 것을 지닐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가 배타성을 지닌다는 말은 그 하나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나 오류를 일컬을 때 하는 말이다. 진리의 보편성과 배타성을 관련하여 연애와 결혼을 비유로 말해보자. 연애도 결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렇다. 연애는 만인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다(과정[process]이자 의 의미를 지님). 그런데 결혼은 연애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정상적인)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남자(한 여자)를 선택했다면 나머지 남자(여자)는 모두 포기해야 하다(一者完成의 의미를 지님). 그렇지 않고는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은 결혼이란 그 자체가 철저히 배타성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배타성을 띤 결혼을 두고 그것은 아집이고 독선이며, 따라서 극복해야 할 나쁜 제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혼은 배타성을 띠기도 하지만 그 동안 혼자 살던 사람이 결혼하여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살면서 나 밖에 있는 나와 성()이 다른 남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만인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수 이전의 타종교의 성현들은 예수라는 일자(一者)와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를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말, 즉 신랑 되신 예수는 복음시대를 연 결혼의 주인공이고, 자신을 비롯한 구약의 성현들은 율법시대에 속한 자들로서 신랑 되신 예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들러리를 선 자의 기쁨으로 비유하고 있다(3:29-30). 예를 들어 보자.

수학에서 2 + 2 = 4이다. 이것은 수()의 진리이고 배타적 진리이다. 그 누군가가 2 + 2 = 4가 아니라 3도 될 수 있고 5도 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수학적 진리가 아니다. 이 공식을 두고 1명이 4라고 말하고, 99명이 3이라고 말했다 하자. 그럴 경우 보편적인 대다수가 말한 3이 진리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 말했다 할지라도 4라고 말한 그 사람이 진리이다. 4만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그것이 아집과 독선인가. 수학적 진리는 철저히 배타적이며, 이 같은 배타적 진리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다. 계약법전(20:22-23:33)의 전체 포인트가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야웨와의 배타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듯이, 요한복음의 전체 포인트는 예수와의 배타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는 수학적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진리가 있다. 그러한 진리를 모두 합쳐 한마디로 ()라고 하고, 이 진리를 ()의 진리라고 하자. 그 도에는 예수의 도만이 아니라 석가의 도’, ‘공자의 도’, ‘노자의 도등 기독교 외에 타종교의 도가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술가의 도, 군인의 도, 정치가의 도, 상업(상인)의 길인 상도(商道)도 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나온 도인지, 그리고 어떤 도를 말하는 것인지를 철저히 살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석은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절대인 하나에서 나와서, 마침내 하나를 찾아 하나로 돌아갑니다. 대사상가나 대종교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한다는 말이요 믿는다는 것입니다. ‘원일물(元一物)’,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입니다. 본디의 하나원일물입니다원일물유일불이’(唯一不二)이기도 합니다. ‘원일물불이’, 이것이 부처요 여호와 하느님입니다. 나는 원일물불이를 믿습니다.”

다석이 정통신앙을 떠난 것은 정통신앙의 그리스도 관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란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 아들이다. 전구는 달라도 전원(電源)은 하나이듯이 개체는 달라도 말씀의 영원(靈原)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석가의 마음에서 빛났던 진리의 빛이나, 공자의 마음에서 빛났던 진리의 빛이나, 노자의 마음에서 빛났던 진리의 빛이나 한 얼이다. 다를 까닭이 없다. 한얼의 생명이라 독생자(獨生子)라 한다. 윤리적 표현인 독생자를 철학적으로 나타내면 일원(一元)이다.”

다석은 말한다. “석가의 법성(法性), 예수의 영성(靈性), 노자의 덕성(德性)이 모두가 같은 말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일컫는다.” 다석은 종교 다원주의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독생자)는 예수만이 아니라 석가 · 공자 · 노자가 다 그리스도(독생자)이며 한 얼의 생명을 말한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와 동양의 제종교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 하나를 말한다면 기독교는 세 분(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주어인 종교인 데 반해, 타종교는 인간()이 주어인 종교라는 사실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하늘(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주어가 되어 내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하나님이 오시는 나라이다.

 

필자에게 이 같은 깨달음은 20111210일 아침에 계시처럼 왔는데, 이를 산동성의 청도대오(靑島大悟)’라고 부르고자 한다.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1472-1529)은 귀주성 용장(龍場)에서 37세 때인 1509년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문득 한밤중에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의미를 크게 깨달았다”(忽中夜大悟格物致知之旨). 이를 용장대오(龍場大悟) 또는 용장오도(龍場悟道)라고 한다. “聖人가 나의 마음에 있으니 진리를 사물에서 구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이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 후 왕양명은 이 같은 심즉리(心卽理)의 심학(心學)을 실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진리를 역설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하면 동양의 종교는 도불외구’(道不外求), 진리는 인간 안(마음)에 있기에 밖(하나님)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도불내구’(道不內求), 진리는 밖(하나님)에 있기에 인간 안(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이다. 즉 기독교는 유신론이요, 신본주의요, 은혜 복음의 종교인 데 반해, 동양의 제종교는 모두 무신론이요, 인본주의요, 행위 율법의 종교이다.

여기서 대표적인 동양종교인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사실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불교의 교조 붓다(Buddha)의 기본적 교리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啼),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중도설(中道說)이다. 그런데 붓다는 일반철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과 대결한 무신론자이다. 불교는 신 없는 세계적 고등종교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르다. 본래 불가에서는 불교가 신 없는 종교라는 것은 자고로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불교에서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면 모두가 다 부처(붓다)가 된다. 독일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게오르그 그림 박사는 불교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같은 그런 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오직 인격적 신의 관념을 완전히 버린 자라야만 비로소 불교를 알 수 있으리라고 확언하였다

범신론을 넘어서 무신론까지 이어지는 불교
범신론을 넘어서 무신론까지 이어지는 불교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어인 신본주의이고, 동양의 제종교는 인간이 주어라는 점에서 인본주의이다. 헤브라이즘은 신본주의요 헬레니즘은 인본주의라는 점에서 이 둘은 사상적으로 같은 하나로 볼 수 없다. 이는 유신론인 기독교와 무신론인 공산주의를 사상적으로 같은 하나로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는 물질적 무신론’(인본주의)이고, 동양의 제종교는 정신적 무신론’(인본주의)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동양의 제종교와 서양의 헬레니즘은 인()을 본()으로 한다(인본주의)는 점에서 사상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일찍이 키르케고르는 헤겔식의 사변적 종교철학과 기독교는 통합될 수 없음을 확신했고 이를 위해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동양철학은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통합될 수 없다. 그 까닭은 기독교는 동양종교와 철저히 다른 배타적 진리를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타종교는 아래에서, 안에서, 인간()이 주어인 종교이다. 즉 인간 역사를 구성하는 3차원(時空人)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위에서, 밖에서, 하나님(성 삼위)이 주어인 종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4차원(時空人神)의 종교이다. 다석이 모든 것을 종합한 절대 진리인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 하나가 같은 차원이라면 모르겠는데, 차원이 다른데 이를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같은 진리, 같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기독교의 배타성을 버리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성경)가 원하는 길이 아니다. 누가복음 12:49-51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즉 이전의 모든 부분 진리를 다 불태우고 절대() 진리를 이 세상에 들려주고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답답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죽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참 진리, 즉 진리의 배타성 때문에 이 세상에 분쟁하러 오셨다고 했는데, 어찌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상과 평화를 모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의 말씀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려고 하는가. 이는 속 좁은 편협성을 갖자는 뜻이 아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참 진리를 스스로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기독교인)가 진리의 배타성을 지켜야 하는 까닭은 정체성을 잃은 종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몽골제국의 몰락은 정체성 상실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그래서 바다 태풍 칭기스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손들이 유목민의 야성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자손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예수의 주기도는 영원한 진리이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분명히 선언한다. 진리의 배타성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에게 복 있을진저(11:6)! 그리고 진리의 배타성을 허물어뜨리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6:26)! 바울이 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분노했는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십자가 복음을 떠난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행함(율법, 할례)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유대 거짓교사들의 주장은 십자가의 은혜를 무효화하는 것이기에 목숨을 걸고 항변했다(고전 1:18; 2:21; 6:14).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1:6-9)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예수가 말하는 진리의 배타성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either ~ or)이지, 이것도 저것도(both ~ and) 다 같은 진리를 말한다는 종교다원사상은 올바른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포기해야 하듯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다를 붙드는 것은 죽도 밥도 안 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치는 꼴이다. 다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진리는 항상 사랑과 함께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빠진 진리는 파괴적 진리요 폭력일 뿐 참 진리가 못 된다. 배타적인 예수의 진리는 항상 사랑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 개신교는 진리의 배타성을 강조한 나머지 예수가 보여준 사랑(평화)의 포괄성을 잃었고, 현대 가톨릭은 사랑(평화)의 보편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배타성을 잃었다.

서양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인 십자가의 종교를 전쟁과 폭력의 종교인 십자군의 종교로 변질시켰다.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빠진 서양 기독교는 이 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즉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며 이를 위해 한 알의 밀처럼 희생했던 예수의 정신과 배치되는 길을 갔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진리의 배타성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배타적 절대 진리를 모르는 자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배타적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있다면 예수의 마음으로 그를 품고 긍휼히 여기며 섬기면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처럼 그를 위해 희생하고 대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힘이나 총칼로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죽여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할 짓이 아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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