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1)

사회학적 요한복음 읽기의 문제점

1. 민중신학자인 안병무(1922-1996) 선생의 제자인 김진호 목사는 요한복음과 관련된 급진적 자유주의자들(동연, 2009)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책상에 앉아 연구하는 학자로서보다는 현장에서 뛰는 목사로서 요한복음을 읽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양날의 칼이다. 즉 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유익한 책이지만, 잘못 읽으면 상당히 위험한 책이다. 이 책은 주로 텍스트(Text) 연구에 머문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에서 콘텍스트(Context)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이다.

김 목사는 요한복음의 콘텍스트와 이 시대의 콘텍스트(교회와 사회)와 씨름한다. 그러고는 콘텍스트 간의 접촉점을 근거로 기층 민중들의 아픔과 억울함을 읽어내고, 나아가 점점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되어 제도화, 각질화되어 가는 기독교회를 향해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야성을 일깨우려고 고뇌한다. 그러면서 그는 요한복음을 전복적 성향을 띤 불온문서라고 규정한다. 기존에는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그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는 요한복음을 전복적 성향을 띤 묵시문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책이 왜 위험한 책인지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자.

첫째, 김 목사가 요한복음의 콘텍스트를 제대로 읽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요한복음을 전복성을 담은 불온문서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한공동체가 전복시키고자 하는 대상, 즉 적군은 누구인가? 그는 세 집단을 생각하는 것 같다. 로마제국과 유대교 및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계 기독교회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세 집단 중 김 목사가 강조하는 주적의 대상은 앞의 두 집단보다 점점 예전화, 제도화되어 가면서 로마 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는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주류 사도계 기독교이다. 김 목사가 요한복음을 전복성을 담은 불온문서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그 당시에 기독교회를 박해하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을 상정하지 않고, 왜 굳이 사도계 기독교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요한공동체가 기존에 주장되어 온 것처럼 섹트적 비밀종파에 속하는 작고 힘없는 비주류 기독교회인가? 김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분명 분파적 집단이다. 그들은 유대교 체제만이 아니라 당시 예수운동 주류파 공동체들과 불화했다. 그 과정에서 연대(solidarity) 논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특히 강조했다. 반면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히 강했다. 하지만 위의 인용 구절(10:16)은 요한공동체도 자신들의 우리’(fold)밖 공동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포용적임이 드러난다. 다름에 대한 인정이며, 다른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다.”

김 목사는 지금 요한공동체(요한복음)가 기본적으로 다른 주류 기독교와 불화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 밖에 있는 다른 공동체와 어느 정도 포용적이고 연대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요한공동체를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기존 제도화된 교회의 부패, 현실적 안주 입장을 거부하는 소종파(비밀 집회)로 보고 있다. 나는 이 같은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우선, 요한공동체가 소종파(sect)’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으나, 유대교적 ㆍ로마적 입장에서 보면 초대교회는 모두 다 소종파였다. 우선 사도 요한도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으로 사도계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교회는 섹트적 비밀종파’(또는 분파적 집단)가 아닌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공동체(4)까지 포괄하는 개방적 교회였다.

또한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이 섹트적 비밀종파’(또는 분파적 집단)에서 나온 비밀문서처럼 보인 것은 분파적 비주류 교회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로마제국과 유대교로부터의 박해 받는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와 자신의 신변보호 및 문서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묵시문서로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또한 요한공동체가 싸워야 할 직접적 대상은 모세의 유대교(특히 1)와 가이사의 로마제국(특히 21)이지 사도 베드로공동체가 아니다. 사도 베드로공동체와 요한공동체는 공동의 적인 로마제국과 유대교와 맞서 싸우는 아군이지 결코 적군이 아니다. 또한 요한복음에 나타난 베드로(베드로공동체) ()을 부정적으로 보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나는 이미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29강 참조).

 

2. 둘째, 김 목사는 요한복음의 텍스트(text)를 제대로 읽었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나는 그가 민중신학적 입장에서 철저히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가지고 본문을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선이해(편견)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에 치우치게 마련이다. 성경 연구는 무엇보다도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context)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선한다. 그래서 성경연구는 먼저 마음을 비우고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그것이 과거에 무엇을 의미했는가’(What it meant)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it means)를 살피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먼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고자 한다면(eisegesis), 이것은 본말(주객)이 전도된 성경연구이다. 이럴 경우 본문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을뿐더러 해석은 여지없이 빗나가게 마련이다. 김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나친 주장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빗나간 해석이 너무 많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가령, 댄 브라운은 그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한 미지의 인물’(예수께서 사랑한 제자)막달라 마리아라고 단정하면서 그녀는 예수의 아내인 동시에 최고의 제자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제자를 남성형 관사와 어미를 붙여 남성이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소설가의 상상이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김 목사는 지금 댄 브라운처럼 소설적 상상을 하고 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며 활동했던 열두 제자는 모두 남자였다(10:2-4과 평행본문, 1:13). 다빈치가 그 미지의 제자를 여성적인 모습으로 그렸다면, 그 까닭을 다른 측면’(사랑과 관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성차별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지, 여성에 대한 아부가 아니다.

또한 김 목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들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선택했던 제도적 프로그램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일종의 적대적 의존’(antagonistic dependence)의 관계가 이 시기에 두 종교 집단의 지배적인 기획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가.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과연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본문은 없다고 본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4장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김 목사는 이 대화의 주제는 이라고 한다. 그러나 물은 이 대화의 소재이지 주제는 아니다. 이 대화의 주제는 사마리아 여인의 가장 큰 목마름인 예배이다. 지금 저자는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인가를 말하고자 이 대화를 이렇게 길게 끌고 가고 있다. 그 결론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에 있다.

나아가 저자는 숫자 상징코드를 사용하여 이전의 여섯 남편’(온갖 욕망 또는 굴레나 장벽의 상징어)이 아닌 일곱 번째 남편’(참 남편)이 되시는 메시아(그리스도) 예수께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바른 예배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본문의 주제는 이같이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런데 김 목사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로 어려운 갈등의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의 과잉을 본다.

 

3. 셋째, 이 책의 제목(급진적 자유주의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김 목사가 안병무 교수로부터 세 학기(1987-89)에 걸쳐 들은 <요한복음 세미나>를 끄집어내어 새롭게 각색해서 만든 책이다. 이 책 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안병무 선생과) 나는 요한복음속에서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을 보았다. 한데 그들은 예수에게서 지적 향락 계층의 자유를 읽어낸 것이 아니라 바닥까지 박탈당한 민중의 억눌림을 읽어냈다. 민중, 싸륵스, 한계까지 추락한 몸들, 그런 존재를 배제하고 망각하게 하는 승자들의 제도가 아웃사이더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꾸물거리고 있음을 이 문서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금 김 목사는 요한복음이 급진적’(radical)인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요한공동체는 제도화된 유대교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웃사이더인 그리스도의 교회마저 승자들의 제도에 편입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그 같은 전통을 거부하는 기층 민중으로 이루어진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요한복음을 산출한 요한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지금 김 목사는 요한복음에 대해 급진적, 영어로 래디칼(radical)’이라는 말을 통해 기존 질서를 강하게 부정하는 뜻으로 쓴 것 같은데, 나는 래디칼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과격한 책이 없는, 현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혁명적인’(revolutional) 책이라고 생각한다. 김 목사도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은 전복적 성향을 띤 불온문서인데, 여기서 말하는 전복적 성향이란 기존 질서를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혁명성은 사회적인 제도 개선이나 계급을 철폐하고 권력을 나누어 갖는 평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1:12-13)와 부활 신앙이 담고 있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하나님 나라)의 권세’(18:36-37)를 통해 이루어지는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유일신교를 믿는 유대교나 가이사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제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양립할 수도 없는 이교(異敎)이자 불순물(不純物)이다. 따라서 당시에 정치권력’(로마제국)종교권력’(유대교)를 대표하는 이 두 세력은 공동으로 예수교를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박해 상황을 묵시문학적 상황이라고 하며, 바로 그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배태된 요한복음은 그들 기득권의 핵심 근원에 도전(세상의 모든 기준을 폐하고 예수로 기준 삼음)함으로써 이보다 더 과격할 수 없는 최고의 혁명성을 띠게 되었다.

나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 “종교는 꿈이다. 현실이 악몽일수록 꿈은 더욱 절실하다. 팔레스타인 땅은 수백 년 동안 식민지 포로생활을 하던 억압과 질곡의 땅이었다.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 오셔서 흑암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었다.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혁명가이다. 그날 우리는 함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이 같은 혁명적인 불온문서를 산출한 요한공동체를 전통적인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이야말로 철저히 히브리적 전통에 충실했던 보수주의자들또는 전통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보수와 진보(자유)안정 지향변화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보수를 말할 때 두 종류가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는 기득권(현실적 소유)을 지키기 위한 보수, 다른 하나는 진리(전통적 신념체계)를 지키기 위한 보수.

기존의 로마 가톨릭에 맞서 일어선 개신교 종교개혁이 갖는 개혁성과 혁명성은 당시에 유행하는 새로운 사상’(시대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슬로건이 말해주듯이 성경의 전통’(헤브라이즘)에 충실하자는 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의 개혁성 내지 혁명성은 당시에 유행하던 새로운 사상’(시대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헤브라이즘’(구약성경) 전통에 근거한다. ‘요한복음이 얼마나 철저히 헤브라이즘 전통에 근거하고 있는가는 이미 자세히 언급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산출한 요한공동체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기보다는 혁명적 보수주의자들내지는 보수적 혁명주의자들이라고 함이 더욱 적절하다.

 

김 목사는 다 아시다시피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제자다. 따라서 그의 관점은 철저히 민중신학적 시각을 갖고 있다. 민중신학은 신학의 주제(주체)예수보다는 민중에 두고 있다. 예수가 사회적 약자인 민중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신학의 주제(주체)가 예수가 아닌 민중이 될 때 그것은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이며, 신학이라기보다는 사회학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가 지향한 궁극적 목적(목표)은 민중(인간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하나님의 영광)에 있었다(5:41, 44; 11:4; 17:4,5).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존재한다(36:22-23)는 복음의 핵심을 말했다.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과 필요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거룩)을 위하여가 인간의 궁극적 목적(목표)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나는 김 목사의 요한복음 연구는 주역이 민중이고, 예수는 주역을 돕는 조역이라는 점에서 민중신학적 사회학이라고 규정짓고 싶다. 여기서 나는 기독교 신학은 어떤 학문인가를 다시 묻고 싶다. ‘신학(theology)’은 말 그대로 (theo)에 관한 학문(logy)’, 즉 신학(神學)신학(神學)’이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가 되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학은 성 삼위 하나님에 바탕을 둔 예수학(Jesustics)’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신학이 인간학’(불트만의 경우)이 되거나 윤리학’(도올과 다석 선생의 경우)이 되거나 사회학’(김진호 목사의 경우)이 될 때 신학은 그 정체성을 잃고 변질되거나 유명무실하게 된다. 꽃은 꽃일 때 가장 아름답듯이, 신학은 신학일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이 있고, 가장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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