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5)

요한복음은 무시간적 진리를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유대교와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묵시문학적 위기 상황에서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변증하고자 쓰인 책이다. 이를 위해 요한은 다양한 상징 코드를 사용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나아가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였다. 요한이 사용한 모든 상징 코드는 기본적으로 숫자 상징으로부터 시작한다. 가령 요한이 사용한 일곱 표적이나 일곱 에고 에이미 말씀일곱’(7)이라는 숫자가 기본 전제가 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상징 코드’(숫자, 표적, 말씀, 구조, 지리, 절기, 인물)일곱’(7)이라는 숫자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만물은 ()라고 말한 피타고라스(주전 570년경) 학파 이후 숫자에 대한 관심은 비단 수학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가령, 정사각형의 면적을 100이라 한다면 그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은 약 78이 되고 나머지는 22가 된다. 또 공기의 성분 중 질소 대 산소의 비율도 78:22, 사람의 신체 중 수분 대 기타 물질의 비율도 78:22, 지구의 바다 대 대륙의 비율도 78:22의 비율로 되어 있다. ‘78:22의 법칙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대자연의 법칙 위에 유대인의 상술[‘78(성공) 22(실패)의 법칙’]은 기초하고 있다.

특히 유대인은 숫자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가령, 318(14:14)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라라는 뜻의 엘리에젤’(אליעזר)을 상징하는 숫자이다(318=1+30+10+70+7+200). 유대인들은 짝수보다 홀수(1,3,5,7 )를 좋아한다. 중국인들은 홀수보다 짝수(특히 8,88,588 )를 좋아한다. 중세기 유대교의 신비주의 카발라’(Kabbalah, 전승)조하르(빛남)를 통해 숫자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10개의 쓰피로트’(頂點)에서 발산하는 과정에서 찾았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창조서32(히브리어 철자 22개에다가 10개의 쓰피로트)의 숫자로 하나님의 비밀을 밝히는 교서이다.

유대인 요한은 숫자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의도를 수비학’(數秘學, gematria)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런데 숫자(횟수) 상징코드는 모든 것을 숫자로 풀려는 알레고리칼(풍유적) 해석과 같은 영해(靈解)에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따라서 지나친 자의적 해석을 삼가면서 통전적 시각에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요한이 모든 숫자(횟수)에 암호상징을 사용한 까닭은 그가 처한 삶의 자리가 암호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묵시문학적 박해상황 때문이다.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숫자를 암호로 사용할 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접근방법이 다르다. 요한계시록은 노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은폐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곱(7)을 사용할 때 요한계시록은 기수와 서수를 포함하여 무려 60(가령, 일곱 교회, 일곱 천사, 일곱 나팔 등)를 사용한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일곱 시’(4:52)를 제외하고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전부 은폐시키고 있다. 그래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숫자(횟수) 7을 알려면 일일이 세어보아야 한다. 따라서 컴퓨터의 등장 이전까지

는 이러한 사실을 알기 어려웠다. 요한이 사용한 숫자(횟수)를 컴퓨터가 통계로 알려줌으로써 그의 실체에 가까이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는 이러한 컴퓨터의 혜택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숫자 상징 코드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요한이 얼마나 숫자(횟수) 7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일곱 시(4:52), (1:4-9), 선생(랍비)(1:38; 3:2, 10; 11:28; 13:13, 14; 20:16), 구원(구주)(3:17; 4:22, 42; 5:34; 10:9; 12:27, 47), (4:10-15), 일곱 표적(2-11), 일곱 신앙고백(1:49; 4:42; 6:14; 6:68-69; 9:38; 11:27; 20:28), 마지막 날(6:39, 40, 44, 54; 7:37; 11:24; 12:48), ‘에고 에이미의 비유적 용법(6:35; 8:12; 10:7; 10:11; 11:25; 14:6; 15:5), 증인 본문(1:19-51)의 기독론(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이스라엘의 임금, 인자), (10:1, 2, 7, 9; 18:16; 20:19, 26), 도마(11:26; 14:5; 20:24, 26, 27, 28; 21:2),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12:38; 13:18; 15:25; 17:12; 19:24, 28, 36), 빌라도 일곱 단락(18:28-32, 33-38a; 38b-40; 19:1-3, 4-8, 9-12; 13-16), (3:2; 7:50; 9:4; 11:10; 13:30; 19:39; 21:3), 일곱 부류의 여인들(예수의 모친 마리아[2:1-11]; 우물의 여인[4:4-44]; 마르다와 마리아[11:1-45; 12:1-12]; 해산하는 여인[16:20-21]; 대제사장의 뜰에 있었던 여인[18:15-17]; 십자가 곁에 있었던 여인들[19:25-26]; 막달라 마리아[20:1-18]) .

 

2. 특히 요한은 분할기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분할기법이란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상징어를 여러 개의 조각으로 분할시켜 놓는 기법을 말한다. 아래에서 다룰 숫자(회수) 7과 관련된 표적 상징 코드말씀 상징 코드가 그 좋은 실례이다.

먼저, ‘일곱 표적에 대해 살펴보자. 요한은 공관복음이 사용하는 이적’(δναμις) 어휘(12, 10, 15)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적’(σημεον) 어휘만을 17(십자가 숫자) 사용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요한복음의 표적’(세메이온)은 메시아적 능력(miracle)을 나타내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배후의 그 무엇을 나타내는 암시(sign), 즉 묵시문학적 암호상징(상징코드)이다. 손가락 자체가 아닌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무엇을 말한다.

요한은 많은 기적 이야기를 전해 주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수, 곧 일곱 표적만을 선별하여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일곱 표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 표적: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1), 두 번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세 번째 표적: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심(5:1-9), 네 번째 표적: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6:1-15), 다섯 번째 표적: 물 위를 걸으심(6:16-21), 여섯 번째 표적: 태생 소경을 치유하심(9:1-41), 일곱 번째 표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44).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일곱 표적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절기(가령, 유월절), 지명(가령, 요단강 건너편), 인명(가령,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등 수많은 단어들이 그 어떤 것을 암시(sign)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표적(sign)의 책’(1:50; 12:37; 20:30-31; 21:25 참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곱 표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한은 왜 일곱 표적을 현재와 같은 순서로 배열했는가 하는 점이다. 표층적으로 보면 일곱 표적은 두 개씩 짝을 이루어 처음 두 표적은 가나라는 장소와 연관되어 있고, 그 다음 두 표적은 유월절절기와 연관되어 있고, 마지막 두 표적은 안식일과 연관되어 병자를 치료하신 표적이다. 그런데 심층적으로 보면 배열순서는 구약의 7일간의 창조구조와 상응한다. 이 같은 사실은 요한복음이 부활신학’, ‘구약적(히브리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일곱 날의 창조순서(1:1-2:3)는 제7일인 안식일을 중심으로 여섯 날이 그 주변을 형성하며, 첫째날-넷째날, 둘째날-다섯째날, 셋째날-여섯째날이 대칭을 이루는 구조(다윗의 별)로 되어 있다. 첫째날은 빛 창조, 대응하는 넷째날은 빛의 발광체 창조, 둘째날은 물과 궁창의 분리, 대응하는 다섯째날은 물에는 물고기, 궁창에는 새를 창조, 셋째날은 땅과 식물 창조, 대응하는 여섯째날은 땅에는 인간창조, 식물에는 동물창조, 그리고 일곱째날은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셨는데, 이날이 다른 여섯 날과 구별되는 것은 이날에만 거룩하게’(2:3)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구약에서 거룩개념은 구별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표적도 7일간의 창조구조와 똑같이 일곱 번째 표적인 나사로 소생 표적을 중심으로 여섯 표적이 그 주변을 형성한다. 첫째 표적-넷째 표적, 둘째 표적-다섯째 표적, 셋째 표적-여섯째 표적이 대칭을 이루는 구조(다윗의 별)로 되어 있다. 첫째 표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인데, 넷째 표적은 오병이어 표적이다. 이 두 표적은 둘 다 자연과 관련된 표적들이다. 둘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 치유 표적이고 다섯째 표적은 물위를 걸으신 표적이다. 언뜻 보기에 이 두 표적은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나 두 표적 모두 죽음이 경각에 달린 혼돈의 상황에서 구원을 얻는 표적을 말하고 있다(히브리적 사고에서 물 또는 바다는 혼돈과 죽음의 상징). 셋째 표적은 38년 된 병자 치유 표적이고, 여섯째 표적은 태생소경 치유표적이다. 이 두 표적은 모두 인간의 질병과 관련된 표적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표적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이다. 이는 나중에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건인 예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의미에서 표적 중의 표적이며, 앞의 여섯 표적과 구별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는 예수의 말씀은 부활신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사로의 소생사건을 요한복음 전체의 정가운데 장인 11장에 위치시켰다는 사실이다. 7일간의 창조순서와 일곱 표적의 구조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이 일곱 표적을 7일간의 창조구조와 상응하는 방식으로 배열한 것은 다윗의 별이 보여주듯 유대교의 안식일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주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대체와 승리를 변증하고자 하였다. 주일은 주의 날로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기독교의 출발이 되는 날이다.

 

3. 다음으로, 일곱 에고 에이미(Ἐγεμι) 말씀을 살펴보자. 요한은 예수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로고스개념만이 아니라 내가 왔다라는 표현, 그리고 독특한 말씀기법인 소위 에고 에이미용법을 정형화(양식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에고 에이미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는이다가 된다. 불트만은 이 용법이 영지주의 자료가설에 근거한 헬라적 배경 아래 있다고 했으나 이 용법은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철저히 구약적 배경에서 온 것이다.

이 용법은 출애굽기 3:14에 근거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또는 제2이사야에서 많이 나오는 내가 그다”(41:4; 43:10,13), “나는 야웨다”(43:11; 45:5,6,18), “나는 하나님이다”(43:12; 45:22; 46:9)에서 유래한다. ‘에고 에이미 말씀에는 세 용법이 있는데, ‘절대적 용법’(“나는 나다”), ‘서술적 용법’(“나는 그다”), 그리고 비유적 용법’(“나는...이다”)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에고 에이미의 일곱 비유적 용법성막(성전)의 일곱 주요 기구와 상응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48) - 떡상(25:23-30).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 등잔대(25:31-40; 37:17-24).

나는 양의 문이다”(10:7,9) - 성막문(27:13-16).

나는 선한 목자다”(10:11,14) - 번제단(27:1-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 법궤(25:10-2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 분향단(30:1-10).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 물두멍(30:17-21)

요한은 일곱 비유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대제사장 아론을 대신한 새 언약의 대제사장(9)으로서, 유대교의 성전을 대체하신 분임을 천명한다. 동시에 그 중심에 번제단을 놓음으로써(10) 자신을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드림으로써 유대교의 성전제사제도를 대체하신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나아가 요한은 전반부의 절정인 11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예표하는 나사로의 소생사건을 둠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유대교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잣대로 삼고 있다.

우리는 <표적상징코드><말씀상징코드>를 통해 요한복음이 헬라적 배경이 아닌 철저히 히브리적(구약적) 배경 아래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서 다룰 <지리상징코드><절기상징코드>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이 헬라적 배경 아래 있다고 주장한 불트만의 주장이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요한은 이러한 상징코드를 통해 당면한 현실, 즉 유대교와 로마제국으로부터 당하는 박해와 위기상황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및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기독교의 대체와 승리를 역설하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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