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0)

하던 얘기를 잠시 멈추고 내가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현학적인 사변놀이를 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인류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천하제일지서라고 할 정도로 참 진리와 생명력과 감동을 지닌 최고의 명작이다. 이런 책을 해석의 오류로 인해 상실되거나 반감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람된 얘기지만 지난 세기 최고의 요한복음 연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불트만의 요한복음 해석은 부분적인 해석의 차이가 아닌 근본적으로 철저히 빗나갔다. 따라서 왜 빗나갔는지를 밝히고, 그동안의 오류를 바로잡는 재해석을 통해 천하제일지서로서의 요한복음의 위상을 되찾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중요시한 네 핵심가치는 성전(聖殿), 성경(聖經), 성지(聖地), 성민(聖民)이다. 이에 상응하는 요한복음의 네 핵심가치는 영광, 진리, 생명(부활), 사랑(하나됨)이다.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 ‘진리의 책’, ‘생명의 책’, ‘사랑의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네 핵심가치를 강조한다.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요한복음이 얼마나 이 네 핵심가치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영광의 책

진리의 책

생명의 책

사랑의 책.

이 네 단어의 빈도수를 복음서의 순서(, , , )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광(을 돌리다)(명사: 7,3,13,19, 동사: 4,1,9,23), 진리(2,4,14,25), 생명(7,4,5,36), 사랑(하다)(명사: 1,0,1,7, 동사: 8,5,13,37). 이 네 단어의 빈도수에서도 나타나듯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이 네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요한이 처해있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 즉 생존의 위협당하는 묵시문학적 박해(위기)상황에서 이 핵심가치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주후 150-216)는 요한복음을 영적 복음서’(Spiritual Gospel)라고 말했다. 그 이후 요한복음의 역사성은 많은 의심을 받았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무시간적 진리를 말하는 책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만이 아닌 역사적 복음서이다. 요한복음만큼 묵시문학적 박해와 위기상황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과 아우성(함성)으로 외친 역사적 복음서는 다시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요한복음의 네 핵심가치는 이런 상황에서 탄생했다. 이제부터 요한의 네 핵심가치가 탄생한 요한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살펴보자.

 

2. 요한복음이 쓰인 주후 1세기 말(90-100년경)은 로마제국과 유대교와 기독교, 이 삼자 간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것은 사상(진리) 전쟁이었다. 헬레니즘의 후예였던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의 정점인 인간 숭배의 일환으로 로마 황제(가이사)를 신격화하고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거대한 대제국을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화적 세계관은 이제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즉 인간 왕을 신격화하는 황제숭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그럼에도 도미티안 황제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모든 세력들을 박해하면서 대제국을 유지하고자 했다.

한편, 유대교는 주후 70년 유대-로마 전쟁 이후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민족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지는 민족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회가 날로 성장해 가자 민족의 생존과 유대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절체절명의 시대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유대교는 90년경 얌니아에서 유대교 경전’(TaNak, 우리의 구약성경)을 확정짓고, 그리스도인을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출교, cf. 9:22; 12:42; 16:2) 하면서 쥬다이즘’(Judaism, 유대교)을 구축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런 상황에서 태동한 지 몇 십년 밖에 안되는 초대교회(그리스도교)두 전선’(로마제국과 유대교)으로부터 협공을 받으면서 생존의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손권과 조조가 천하를 놓고 3파전의 진검승부를 벌였듯이, 로마제국과 유대교와 예수교회는 운명을 건 싸움’(세키가하라 전쟁, 1600년 일본 전국시대의 마지막 승부를 건 통일전쟁)에 돌입하였다. 주전 167년 헬레니즘(인본주의)과 헤브라이즘(신본주의)이라는 1차 세계사상전쟁에 이어, 이번에는 전선이 확대된 헬레니즘의 후예’(로마제국)민족 특수주의’(유대교)인류 보편주의’(기독교) 간의 운명을 건 2차 세계사상전쟁에 돌입하였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싸움은 다윗과 두 골리앗과의 싸움이었다. 갓 태어난 연약한 기독교회는 다윗이었고, 장구한 종교적 역사를 지닌 유대교와 강력한 군사적 힘을 자랑하는 로마제국은 두 골리앗이었다. 만일 이 사상전쟁(진리전쟁)에서 기독교회가 패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골리앗을 다섯 개의 돌과 물매을 들고 나가 골리앗을 쳐 이긴 다윗처럼 요한이 구사한 승부수는 다섯 복음이라는 진리였다. 성육신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의 쌍검전략

내적, 예수에 대한 사랑과 하나됨

외적, 유대교와 로마제국을 격파하는 복음

요한에게는 모략이 필요했다. 인간적 모략이 아닌 하나님의 모략(46:10-11)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요한이 구사한 전략은 쌍검 전략이었다. 내적으로는 예수에 대한 사랑과 충성 및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전략이고, 외적으로는 두 전선인 유대교와 로마 제국을 예수 복음으로 격파하는 전략이었다. 헬레니즘(인본주의)의 최정점인 황제 숭배에 빠진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헤브라이즘(신본주의),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3:3; 18:36) 부활의 복음’(11:25-26; 14:6)으로, 그리고 쥬다이즘(유대교) 곧 유대 민족주의라는 좁은 게토(ghetto) 속에 빠진 유대교에 대해서는 세계적 보편성을 띤 하나님 은혜의 복음’(1:17; 5:19) 십자가의 복음’(11:16; 19:30)이라는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요한은 하늘의 지혜로써 이 같은 전략을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구사함으로써 사상 전쟁에서 최후 승리를 쟁취하였다. 세상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말하는 기독교의 승리는 땅에 속한 3차원, 즉 세상적(인간적) 힘에 대한 하늘에 속한 4차원의 승리, 복음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아, 너는 왜 진리어휘와 진실로 진실로어휘를 똑같이 25회 사용했니?”라는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상전쟁(진리전쟁)에 대한 요한의 치밀한 전략(하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요한은 공관복음 저자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진리(ἀλθεια)’ (1, 3, 3) 어휘를 25회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와 관련된 여러 어휘들, 가령, ‘참된’, ‘진실한’, ‘실제로를 뜻하는 알레데스(ἀληθς, 5:32; 10:41; 19:35; 21:24)’, ‘알레디노스(ἀληθινός, 4:23; 6:32: 7:28; 15:1; 17:31; 9:35)’, ‘알레도스(ἀληθς, 1:47; 8:31)’ 등의 어휘를 자주 사용하였다. 또한 요한은 진실로 진실로(Ἀμήν μήν)’ 어휘를 진리 어휘와 똑같이 25회 사용하고 있다. 요한은 다른 어휘들은 되도록 아끼면서 왜 이 두 어휘에 대해서는 똑같이 무려 25회씩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요한은 숫자 25(‘숫자상징코드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를 사용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한 바를 은밀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숫자 25숫자 5’(모세오경을 뜻함)를 곱한 수(5×5=25)로써, 이는 모세(5)×모세(5)=새 모세(25)를 의미한다. 요한이 진실로 진실로어휘와 진리어휘를 똑같이 25회 사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ἀλθεια). 이 사실을 믿어라 믿어라(아멘 아멘, Ἀμήν μήν)”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여기서 요한이 사용한 숫자 25’는 유대교가 고백하는 모세의 진리나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따르도록 강요하는 로마 제국의 진리가 참된 진리가 아니라 요한공동체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진리임을 선포하는 비밀코드(암호)였다. 불트만은 요한이 사용한 이같은 숫자상징코드에 담긴 깊은 뜻을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로마 제국을 이기는

예수 복음의 진리와

상징코드

3. 요한복음은 진리가 무엇이냐?”(18:38)라는 물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다”(14:6; 8:32)라고 답변한 책이다. 요한이 사용한 다양한 상징코드는 모두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은밀하게 진리를 들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오랜 사색과 깊은 묵상을 통해 탄생한 진리의 복음서이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4)라는 말씀처럼 요한은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였다. 요한은 가장 가까이에서 진리 되신 예수를 목격한 자였다. 그는 예수 안에서 진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자였다(요일 1:1 참조). 그래서 그는 진리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요한이 사용한 상징코드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암호 같은 상징코드를 제대로 풀어내야만 요한이 들려주고자 한 진리의 음성을 바르게 들을 수 있다.

요한이 이토록 진리에 깊은 관심을 가진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모든 싸움은 결국 진리(사상) 싸움이고, 최후 승리는 참 진리에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진리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진리의 문제임을 정확히 통찰했고, 참 진리를 예수에게서 발견한 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일생을 두고 치열하게 씨름하여 마침내 요한복음이라는 인류 최고의 걸작품을 창조해 냈다.

요한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를 진리로, 즉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그리스도)로 만나야 한다는 것(1:41), 그 예수 안에 하나님 나라(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3:3), 그 하나님 나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것(3:16), 그리고 율법 체계인 인간적 노력과 능력과 헌신이 아닌 은혜 체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15:5),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10:10)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좋고 귀하다고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죽을 힘을 다해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했다 하더라도인생이 갖고 있는 허무감, 공허감, 무상감(無常感)에 치를 떨게 될 것이다. 이 진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대는 결코 자유할 수 없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송대(宋代)의 주자학을 이어 명대(明代)의 양명학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원효는 진리는 마음에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一切唯心造). 그러나 요한은 진리는 내 밖에 있는 것도, 내 안(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고자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행복이 가까운 데 있듯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듯이(17:21), 진리는 아주 가까운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4:21). 또한 예수는 진리의 왕이다(18:37). 그러기에 요한은 말한다. “진리(예수)를 알지니 진리(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종교) 10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전 6세기 이전에 나타난 샤머니즘(Shamanism), 즉 무교(巫敎) 사상

2. 불교 즉 석가(주전 566-486) 사상

3. 유교, 즉 공자(주전 552-479) 사상

4. 도교, 즉 노자(공자와 비슷) 사상

5. 유대교(주전 5세기), 즉 모세 사상

6. 헬라 사상, 즉 소크라테스(주전 469-399)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주전 427-347)과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 사상.

7. 기독교(주후 1세기), 즉 예수 사상.

8. 이슬람교, 즉 무함마드(570-632) 사상

9. 공산주의 사상, 즉 마르크스(1818-1883)-레닌(1870-1924) 사상

10. 현대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과학 기술 사상

기독교회는 그동안 역사 속에 나타난 무수한 사상들과 싸워 왔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사상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교, 그리고 종교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면서 최첨단 과학기술을 만능으로 신봉하는 과학기술 사상과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과연 무엇으로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장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승리공식을 증명해 보여준 초대교회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복음의 힘이 유대교의 힘과 로마제국의 힘을 이기고 승리했다면, 모든 것을 능히 이기는 강력한 힘을 지닌 복음을 다시 붙드는 수밖에 없다. 나는 초대교회에 최후 승리를 안겨준 복음을 요한복음을 통해 다시 들려주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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