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28)

 

지난 두 시간에 걸쳐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는 왜 철저히 빗나갔는가?”에 대해 요한이 예수와 만나 느낀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감성적 차원의 결여에 이어 역사의 해체와 재구성을 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가 결정적으로 빗나간 원인을 신학적(학문적) 측면에서 본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약적 배경(헤브라이즘)에 대한 무지, 특히 구약전승의 맥락을 전혀 몰랐다. 둘째, 같은 문학적 친척관계에 있는 요한계시록과의 비교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요한복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셋째, 묵시문학에 대한 외면과 이해의 결여로 요한복음이 장르상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이며, 따라서 묵시문학적 상징코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를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체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대한 이해의 빗나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자리의 중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세계 4대 문학시대가 있었다. 히브리 예언문학시대(주전 8-5세기), 소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 비극문학시대(주전 5-4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극(주후 17세기),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시대(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가 그것이다. 같은 유럽에 속하지만 프랑스 문학이 내추럴리즘(Naturalism, 자연주의)문학, 독일 문학이 아이디얼리즘(Idealism, 이상주의)문학인데 반해, 러시아 문학이 리얼리즘(Realism, 사실주의) 문학인 것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러시아 리얼리즘을 잘 말해주는 한 그림이 있다. 페로프(Perov, 1833-82)가 그린 <차 마시는 사제>라는 그림이다.

페로프(Perov, 1833-82)가 그린 "차 마시는 사제"
페로프(Perov, 1833-82)가 그린 "차 마시는 사제"

이 그림을 보면 러시아 정교회 사제는 비단옷에 잘 먹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습으로 거만하게 앉아 차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거지옷 행색의 한 불구 노인이 아이와 함께 와서 차 한 잔을 달라고 하자 거절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19세기 러시아의 리얼한 현실이었다. 공산주의는 민중들에게 빵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러시아 정교회(사제들)는 빵도 주지 않으면서 사랑이니 천국이니 떠들어대면서 민중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향유하는 모습에 민중들은 분노했고, 마침내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이것이 러시아 리얼리즘을 낳게 한 리얼한 현실이다.

서구신학이 생명력이 깃든 살아있는 신학이 되지 못하고, 사변적, 관념적, 추상적인 신학으로 흐르게 된 이유는 바로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떠난 신학을 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불트만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한가로이 텍스트(Text)를 분석하는 일에 몰두한 불트만은 텍스트 이면에 자리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인 컨텍스트(Context)에 대해 깊이 사려 하지 못했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가 근본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바로 요한(요한복음)과 관련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의 빗나감에 기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한 자연 환경, 대대로 어부 집안으로 살아온 출신 배경, 갈릴리 사람으로서 수백 년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왕국 유다(또는 유대인)로부터 받은 소외감과 박탈감, 거기에다 주후 1세기 말경 로마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받은 기독교 박해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 저자가 안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가정적 배경을 불트만은 깊이 천착하지 못했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면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사도 요한인가 제3자인가)에 있는 사람이며, 그는 어떤 구약 전승(북왕국 전통인가 남왕국 전통인가)에 서 있으며, 그는 지금 어떤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 처해 있으며(묵시문학적 박해상황인가 평화로운 상황인가), 그런 상황에서 그는 어떤 식으로 글쓰기(상징코드적 암호식 묵시문서냐 교훈적이고 영웅적인 전기문학이냐)를 하고 있는지, 역사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서를 쓰고자 한 요한의 의도는 무엇인지 등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 이제부터 그의 요한복음 연구가 왜 근본적으로 빗나갔으며, 의미(생명력)를 상실했는지를 그의 복음서 연구방법부터 삶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다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자. 구전 전승으로부터 현재의 복음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승층이 있거나 편집의 과정이 있다는 것은 이제는 학계의 상식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모든 과정은 현재의 복음서라는 완성된 책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또는 신앙에 도움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해야 한다.

부분적인 분석에 매달리다 보면 전체와 동떨어진 작업이 될 경우가 많다. 부분적인 것의 종합이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 몸의 여러 지체가 하나의 몸이라는 전체와 관련성을 가질 때 그 여러 지체는 자신의 본래적 의미를 갖는다. 몸 전체를 해체하여 그 잘려진 지체들을 모두 모아 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연구가 부분적인 이해의 나열이 되거나 부분적인 것의 단순한 결합으로서는 진실로 천재적인 작품의 참된 깊이와 감동을 도저히 접할 수 없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가 빗나갔고 감동이 없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본문이 말하는 음성을 겸허하게 듣거나 저자에게 그 의도를 물어보는 것을 우선하기보다는 자신의 좋은 머리와 많은 언어 지식 및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본문 속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기 바빴다. 나는 이를 ‘New telling’(새로 말하기)이라고 명명한다. 불트만은 자신의 생각을 성경 본문 속에 집어넣어 ‘New telling’, 새로운 신학’(‘환치이론을 비롯하여 비신화화론)을 말했다. 이와 달리 본문이 말하는 것을 겸허히 듣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다시 설명해 주는 것, 이를 나는 ‘retelling’(다시 말하기)이라고 명명한다. 아래에서 난 이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불트만은 요한복음 연구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지, 저자 요한의 의도(마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단순비교할 뿐 왜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거의 말하지 않는지, 왜 요한은 기독론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왜 율법, 비유, 이방 선교를 말하지 않는지, 이적’(기적) 어휘 대신 표적어휘만을 쓰는지, 왜 사건은 짧게 쓰고 강론을 길게 언급하고 있는지. 왜 공관복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생명, 진리, 사랑, 영광과 같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지, 왜 공관복음과 다른 독특한 에고 에이미말씀이나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고별사나 수난사, 부활 기사를 말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해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다. 수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으나 요한복음의 전체 장수(21)만큼만 요한에게 직접 질문해 보고자 한다.

1. 요한아, 너는 왜 공생애 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신 예수를 언급하지 않니?

2. 요한아, 너는 왜 베드로가 아닌 안드레가 먼저 부름을 받았다고 했니?

3. 요한아, 너는 왜 가나의 혼인잔치를 첫 표적으로 삼았니?

4. 요한아, 너는 왜 성전정화사건은 사역의 말기가 아닌 사역의 초기인 본론의 첫 장(2)에 두었니?

5. 요한아, 너는 왜 공관복음에서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3장과 18장에서만 쓰고 있니?

6. 요한아, 너는 왜 진리어휘와 진실로 진실로어휘를 똑같이 25회 사용했니?

7. 요한아, 너는 왜 사랑하다어휘와 구원하다어휘를 3:16-17에서 처음 사용했니?

8. 요한아, 너는 왜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을 여섯으로 말하고 있니?

9. 요한아, 너는 왜 유월절을 한 번이 아닌 세 번으로 했니?

10. 요한아, 너는 왜 오병이어 표적물 위를 걷는 표적을 함께 붙여 놓았니?

11. 요한아, 너는 왜 공관복음에서 사용하지 않는 메시아어휘 또는 디베랴어휘를 굳이 사용했니?

12. 요한아, 너는 왜 열두 제자6장에서 3, 그것도 생명의 떡말씀 강화에서 사용하고 있니?

13. 요한아, 너는 왜 다윗을 단 한 구절(7:42)에서만 언급했니?

14. 요한아, 너는 왜 이적이 아닌 표적어휘를, 그것도 17회를 사용했니?

15. 요한아, 너는 왜 실명이 아닌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라는 익명을 쓰고, 그것도 13장에서 처음 나타나게 했니?

16. 요한아, 너는 왜 예수의 정체성을 일곱 에고 에이미 말씀으로 표현했니?

17. 요한아, 너는 왜 공관복음보다 훨씬 길게 빌라도와의 대화를 다루고 있니?

18. 요한아, 너는 왜 부활절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혼자 무덤에 찾아간 것으로 했니?

19. 요한아, 너는 왜 부활하신 주님이 제 팔일에 다시 도마에게 나타나게 썼니?

20. 요한아, 너는 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부활장인 20장 끝에 놓았니?

21. 요한아, 너는 왜 시몬 베드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호칭을 쓰고, 그것도 번거롭게 세 번씩이나 사용했니?

 

3. 불트만은 가장 기본적인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위의 질문 가운데서 먼저 ‘5번 질문’(“요한아, 너는 왜 공관복음에서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3장과 18장에서만 쓰고 있니?”)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 θεoυ ̑)’는 예수 선포의 핵심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이 어휘가 120회 이상이나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5, 그것도 3(3,5)에서 2회가 나오고, 상응하는 장인 18(36)에서 내 나라’(βασιλεία ἡ ἐμη)라는 용어로 3회 나타나고 있다. 공관복음과 너무도 다른 이 같은 사실을 놓고 불트만은 요한이 하나님 나라어휘를 생명어휘로 대체했다는 전혀 근거없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요한복음이 장르상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서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교차대구구조를 통한 대표성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주후 70-80년대 쓰인 공관복음과 달리 90-100년경에 쓰인 요한복음은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라는 생존이 위협당하는 묵시문학적 박해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나라’(인간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전복적 성향’(혁명성)을 띤 하나님 나라’(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 어휘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묵시문서인 요한계시록에 하나님 나라어휘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까닭도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예수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여기서 요한이 채택한 방식이 바로 교차대구구조에 따른 대표성의 원리.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유대인의 대표로 선택된 자가 니고데모이다(3) 그는 유대 관원이요 바리새인이자 이스라엘 선생이다. 쉽게 말해 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방인의 대표로 선택된 자가 로마 총독인 빌라도이다(18-19). 하나님 나라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니고데모하고는 밤에 둘이서 만나 몰래 하나님 나라 얘기를 하고, 빌라도 하고는 관정 안에서 아무도 못 듣게 둘이서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논쟁하는 것으로 그렸다. 이 같은 대표성의 원리를 요한은 교차대구구조를 통해 은연중에 말했던 것이다.

교차대구구조란 히브리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글쓰기 방식으로 요한은 이를 요한복음 전체 구조에 적용하였다. 요한복음 전체를 11장을 정점으로 하여 앞에 10(1-10), 뒤에 10(12-21)으로 구성한 뒤에 신학적 주제별로 1=21, 2=20, 3=19-18, 4=17...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구조화했다. 십자가장인 3장과 19-18장에 니고데모와 빌라도를 대조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즉 니고데모는 세상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해서 구원과 영생을 얻었지만, 빌라도는 세상 권력을 내려놓지 못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고 멸망과 죽음의 길로 간 것으로 그렸다.

그런데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위기와 박해상황에서 기록된 묵시문서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나아가 요한복음의 구조를 제1(1-12)와 제2(13-21)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정교한 교차대구구조로 되어 있는 요한복음의 구조에 대한 이해에 실패했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교차대구구조(3=19-18)와 그 안에 대표성의 원리’(니고데모와 빌라도)를 적용시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하고자 했던 요한의 재치(하늘의 지혜)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어휘를 생명어휘로 대체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결국 장르를 잘못 인식하거나 구조를 잘못 보면 전체 해석이 빗나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주제가 바로 요한복음의 하나님 나라어휘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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