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24)

1. 중국선교사로 온 지 13개월 후인 200811월에 <청도은혜교회>를 개척하였다. 선교사로서 난 한인 교회 사역과 더불어 신학교 사역, CBMC 사역, ‘사랑의 집’(장애인과 불우아동) 봉사 사역 등을 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족 CBMC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박창문(박미란) 부부가 내게 성경공부 모임을 요청하였다. 교회 개척 1년이 지난 200911월부터 조선족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한 꼭지씩 창세기부터 교재를 만들어 나누어 주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구약성경을 40차례에 걸쳐 1년 동안 공부하고 마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신약성경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 전공이 아니라 거절했으나 계속 요청을 해왔다.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요한복음을 연구한 것을 기초로 해서 신약성경도 공부했다. 이전처럼 매번 한 꼭지씩을 만들어 마가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20차례에 걸쳐 반년 공부하고 마쳤다. 거의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공부가 끝나니 공부한 자료를 책으로 내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전에 공부한 원고를 다듬고, 성경연구에 도움이 될 부록을 첨가하여 성경개관으로 출판하였다(쿰란출판사, 2010.9). 또한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旧約槪觀》, 《新約槪觀》으로 출판하였다(BonGreen, 2016.2).

박호용 교수의 저서, 순서대로 : '성경개관', '구약개관' , '신약개관'
박호용 교수의 저서, 순서대로 : '성경개관', '구약개관' , '신약개관'

 

2. 여기서 성경개관출판을 굳이 말하고자 하는 까닭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과 같은 장르상 묵시문서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똑같은 전기문학으로 취급되었고, ‘묵시문서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형식상으로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문학으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장르상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서’(묵시문학)라는 사실을 밝혔다.

묵시문서란 신앙적 박해 상황에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배교하지 말고 신앙의 정절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위로와 격려를 위해 쓴 문서이다. 요한계시록이나 요한복음은 거의 같은 시기(주후 90-100년경)에 로마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절에 쓰인 묵시문서이다. 그 시절은 생존이 위협당하는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이기에 문서를 쓰는 저자들은 필화(자신과 교회와 문서 보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상징 기법(상징 코드)을 사용하였다. 가령 로마라는 표현 대신 큰 성 바벨론’(18;2,10,16, 21)이라고 쓴다든지, 동물, 숫자, 지리, 색깔, 환상, 천사, 마귀(사탄)와의 투쟁, 저 세상으로의 여행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실명이 아닌 가명(익명, 차명)을 사용한 것도 묵시문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요한복음이 문시문학이라는

증거 중 하나는 상징 코드

실명이 아닌 가명 사용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공관복음서에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세례 요한은 나오지만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나와야 할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애제자)로만 5(13:23; 19:26; 20:2; 21:7, 24) 나올 뿐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다른 이라면 모르지만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21:24)가 저자라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암시적으로 볼 때 21:2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21:7그 제자’(애제자)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는 곧 사도 요한임이 드러난다. 일제하에서나 독재 시절에 실명을 쓰지 않고 암호와 같은 익명이나 가명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묵시적 박해 상황에서 쓰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이름(1:1,9; 22:8)도 실명이라기보다는 가명(익명)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한 까닭도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에서 필화를 방지하기 위한 뜻에서이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중국선교사로서 몸소 체험하였다. 즉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난 실명을 사용하면 선교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에 처음부터 가명을 사용하였다. 내 이름은 이사야 43:19(“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니~”)에 근거하여 박새일(朴新事, 박신사)을 사용했다(위의 <중국어 구약개관, 신약개관> 참조). 외람된 얘기지만 학자들이 책상에 앉아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머리에 쥐나도록 연구하지만 별 소득이 없는데, 그 까닭은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을 몸소 경험해보지 못하고 관념적으로만 연구하고 사색하기 때문이다. 박해가 심한 선교현장에 가 보면 그냥 저절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나로서는 정말 감사할 일이다).

 

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요한복음이 장르상 묵시문서에 속한다는 사실을 왜 학자들은 그동안 잘 인식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언급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다양한 묵시문학적 상징 표현들이 요한복음에서는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일곱 상징 코드를 비롯한 다양한 상징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요한의 천재성: 상징 코드에서 밝혔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노출 기법을 사용한 요한계시록과 달리 요한복음은 더욱 정교한 은폐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한 요인이다.

이를 음악으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베토벤의 음악이고, 요한복음은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비유할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을 노출시켜 그것을 운명적으로 극복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와 달리 모차르트의 음악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베토벤의 음악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요한복음이 장르상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연유도 요한복음 저자가 사용한 은폐기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묵시 문학은 역사적 이원론’, 현세대와 다가올 세대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이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묵시 문학에서 말하는 현재(현세대)는 의인이 박해를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사탄(마귀)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시간이고, ‘다가올 미래’(다가올 세대)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탄(마귀)과 싸워 이겨 새 세상(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묵시 문학은 한마디로 세상의 주권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신앙적 응답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의 주요 쟁점은 현재 세상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다. 이에 대해 신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세 묵시문서인 다니엘(),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은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역사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묵시문서인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을 순차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 현재는 악한 세력인 사탄이 지배하고, 곧 다가올 미래는 하나님이 지배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현재 하나님과 사탄이 싸우고 있으니 배교하지 말고 충성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요한복음은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사탄조차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완전히 실현된 묵시문학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묵시문학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다니엘서는 현재 세상의 주권은 악의 세력(사탄)에게 있으며, 장차 하나님이 하늘에서 악의 세력(사탄)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올 그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라고 말한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 7:25; 12:7)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주권을 놓고 현재 악의 세력(사탄)과 하나님이 치열하게 전쟁 중에 있으며 곧 하나님의 승리로 끝날 것이니 조금만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말한다. 즉 잠깐(10, 2:10))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은 악의 세력(사탄)과의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이미 끝나 현재 세상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역사적 이원론이 없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사탄론(마귀론)이 없다. 요한복음은 당시에 유대교와 로마제국과 치열한 사상(영적) 전쟁을 벌인 책이지만 전쟁 용어 자체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탄(마귀)조차도 하나님이 장중에 있는 하수인(심부름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신자들에게 이미 승리한 하나님을 믿고 승리자로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과 같은 장르상 묵시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연구했던 요한복음의 전체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신앙생활 40주년이 되는 201210, 나의 신앙과 학문을 총결산하고, 지난 7년 반 동안의 요한복음 연구를 총결산하는 한 권의 책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쿰란출판사, 950, 각주 1484, 참고자료 576)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여섯 분의 추천서를 받았고, 각 추천서를 한 줄로 요약해서 실었다.

박호용 교수의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
박호용 교수의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

 

저자가 현재 몸 담고 있는 선교현장 푸른 섬칭다오(靑島)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Pax Christina’(그리스도의 나라)의 신세계를 꿈꾼 요한의 밧모섬이다. - 김덕기 교수(대전신대, 신약학)

 

지난 40년 동안 저자의 영적 순례의 여정은 이 한 권의 책을 낳기 위한 소쩍새의 울음이었다. - 박신배 교수(그리스도신대, 구약학)

 

대기만성(大器晩成), 청출어람(靑出於藍), 후생가외(後生可畏)란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박준서 교수(연세대, 구약학)

 

철학자요 구약학자요 선교사인 저자가 신약학자들도 쓰기 어려운 이토록 방대하고 독창적인 요한복음 연구서를 썼다니, 그저 놀랄 뿐이다. - 소기천 교수(장신대, 신약학)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저자에 주목할 것이고, 저자는 수없이 날아오는 비판의 화살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 장영일 총장(장신대, 구약학)

 

저자가 요한복음을 통하여 발견한 놀라운 비밀들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성령의 새바람이 되기를 기원한다. - 최동환 목사(영동교회, 신약학).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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