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21)

1. 감악산에서 40일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잃은 상태에서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새벽마다 노량진 본동 아파트 집 앞에 있는 상가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것이었고, 낮에는 집에서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집 앞에 있는 상가교회는 성결교단에 속한 교회였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가 마치면 긴 의자에 올라가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6개월을 그렇게 했다.

그 교회 담임목사(엄태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 낯선 한 중년 남자가 나왔는데, 그 남자분이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통곡하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통곡도 하루 이틀이지 무려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도대체 저분이 무슨 원한이나 억울한 사연이 있길래 저토록 날마다 통곡하며 기도할까?” 그 목사님은 말을 잘 못 꺼냈다가는 큰일 날 듯싶어서인지 내게 말을 걸어오지 못했다. 2년 동안 내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20076요한복음서 재발견이 출판되고 나서 내 신분을 밝혔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깜짝 놀라셨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늘에서 계시처럼 많은 신학적 통찰이 밀려왔다는 사실이다. 난 낮에는 별 할 일이 없어 요한복음을 주로 연구하고 새벽기도회에 나가서는 연구하다가 떠오른 의문점들을 기도로 물었다. 저자 요한에게 묻는 방식이었다. 가령, “요한아, 너는 왜 진리어휘와 진실로 진실로어휘를 똑같이 25회 썼니?” 그러면 신기하게도 하늘에서 그 뜻을 계시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미리 준비한 필기도구를 기도하는 자리에 갖다 놓고 계시가 오면 어둠 속에서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그 내용을 정리했다. 이는 나의 요한복음 연구가 헬레니즘 방식(이성적으로 궁구하는 것)만이 아닌 헤브라이즘 방식(기도로 하나님께 묻는 방식)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고자 한다).

 

헬레니즘 방식의 연구가 아닌

헤브라이즘 방식의 묻고 답한

요한복음 연구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중에 세 차례 결정적인 신학적 통찰이 왔다. 첫째, 기존의 요한복음의 구조를 새롭게 보는 것이었다. 둘째,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처럼 상징코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셋째, 요한복음은 장르상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으로, 두 책을 비교할 때 사상적 측면(묵시문학의 완성과 삼위일체론의 완성)에서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을 넘어서는 신구약성경(66)의 마지막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먼저 요한복음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감악산에서 하산한 후 감악산의 두 돌판을 출판하려고 준비하던 중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다. 내 생각에는 요한복음이 11장을 정점으로 하여 앞의 열 장(1-10)’뒤의 열 장(12-21)’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요한복음은 1-11(1)12-21(2)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세기 요한복음 연구의 권위자인 불트만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1-12장을 제1부로, 13-21장을 제2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당시 내가 보고 있던 오픈성경만 나와 같은 견해). 다드(C.H.Dodd)라는 영국학자가 요한복음의 구조를 크게 두 부분, 표적의 책(2:1-12:50)’수난의 책(13:1-20:31)’으로 나눈 이래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견해를 따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과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1623-1662)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69-30 BC)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이 말은 작은 차이가 엄청나게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일컫는 경구로 쓰인다. 요한복음 연구의 클레오파트라의 코한 장’, 12장에 있었다. 12장을 제1부의 끝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2부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 한 장의 차이가 나로 하여금 7년 반(2005.4-2012.10) 동안 요한복음을 연구케 하였고, 마침내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950)으로 출판되었다.

'감악산 두 돌판' (요한복음연구의 효시가 된 책)과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
'감악산 두 돌판' (요한복음연구의 효시가 된 책)과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

 

2. 어떤 문서()의 구조를 살피는 것은 그 책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점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구조란 건축으로 말하면 설계도와 같다. 설계도가 다르면 다른 건축물이 되는 것처럼, 구조를 다르게 보면 전체 해석이 달라진다. 따라서 구조는 그 문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기존의 대부분의 요한복음 학자들은 12장까지를 제1부로 보았다. 그 까닭은 1237절의 말씀에 기인한다(“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에 대한 12장까지를 제1부로 보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학자들도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목(12:44-50)12장 끝에 붙어 있다는 사실 대문에 곤혹스러워한다. 이는 12장까지를 제1부로 보는 견해가 적절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필자가 12장을 제1부의 마지막 장이 아닌, 2부의 시작으로 보려고 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1부를 1-12장까지로 보고, 2부를 13-21장으로 보게 되면, 1부는 12장이고, 2부는 9장이 된다. 이러한 불균형적 구조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한 자연스러운 구조는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11장을 중심축으로 하여 앞의 10(1-10)과 뒤의 10(12-21)으로 보는 것이 균형적으로 어울린다는 점에서 더욱 바람직하다.

둘째, 요한복음은 세 번의 유월절로 구성된 책인데, 마지막 세 번째 유월절을 시작하는 장이 12장부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 두 번의 유월절은 구체적인 시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기술되나(2:13; 6:4), 세 번째 유월절에는 유월절 엿새 전에”(12:1)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12장은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 이하)이 시작되는데, 이를 후반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셋째, 예수께서 행한 일곱 표적이 11(나사로의 소생사건)으로 끝나고, 12장부터 영광 주제와 관련된 예수의 때에 대해 12장 이전까지는 그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하나 12장부터 그때가 왔다”(12:23)고 말함으로써 12장부터 제2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 요한은 두 전선(유대교와 로마제국)과 싸우는데, 1(1-11)까지는 유대교와의 대결을 강조하고, 2(12-21)은 로마제국과의 대결을 주로 강조한다. 이를 잘 말해주는 용어가 사탄 또는 가이사 황제를 상징하는 이 세상 임금어휘를 12장 이후부터 3(12:31; 14:30; 16:11) 사용하고 있다. 본격적인 영적 전쟁을 12장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12장부터를 제2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섯째, 12장이 둘로 나누어지는 결정적 단서는 1236절까지는 구약성경이 기록된 바...과 같더라”(καθς γεγραμμένον)의 형태로 인용(2:17; 6;31,45; 10:34; 12:14; 비교 1:23; 7:38; 7:42)되는 데 반해, 12:37 이하부터는 말씀(구약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ίνα πληρωθη ̑) 형태로 인용(12:38; 15:25; 17:12; 19:24; 19:36; 비교 19:28)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11장을 중심으로 9=12:37-50, 10=12:1-36이 교차대구구조(chiasm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째,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출교어휘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교라는 말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 회당으로부터의 축출당하는 요한공동체의 박해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 단 3(9:22; 12:42; 16:2)가 나오고 있다. 9장의 출교(9:22) 상황과 교차대구구조를 이루는 12장 후반부(12:37 이하)가 또한 출교(12:42)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12장부터 제2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곱째, 히브리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히브리 문장법 중의 하나가 키아즘 구조(교차대구구조)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 구조가 11(나사로의 소생사건, 부활의 의미)을 중심으로 교차대구구조로 되어 있다(1=21, 2=20, 3=19-18, 4=17, 5=16장 등등). 이에 근거할 때 요한복음은 제1(1-11)와 제2(12-21)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진다(더 자세한 설명은 유레카 익투스 요한복음, 236-240쪽 참조).

요한복음서 구조
요한복음서 구조

요한복음 전체가 11장을 중심으로 교차대구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안식일을 넘어 부활절의 종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더 자세한 것은 표적상징코드에서 다룰 것이다). 감악산에서 하산한 지 약 100여 일 만에 요한복음 전체 구조를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3. 요한복음의 구조 문제를 연구하던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모세오경처럼 <5중 하강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상식에 속하는 올라가는 것’(상승)내려가는 것’(하강)을 알아야 한다. 왕이 계신 수도를 향해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고, 그 반대는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북쪽의 갈릴리에서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고, 반대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cf. 2:13; 7:8; 10:30; 9:51). 북쪽의 하얼빈에서 남쪽의 베이징으로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고(上行線), 베이징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下行線).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는 하늘에서 땅으로의 성육신(첫 번째 하강, 1:1-18)을 시작으로, 네 차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는 하강구조로 되어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는

하강구조의 요한복음

첫 번째 - 하늘()에서 땅(아래)으로(성육신 사건, 1:1-18)

두 번째 - 유대(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1:19-2:12)

세 번째 - 유대(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2:13-4:54)

네 번째 - 유대(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5:1-7:9)

(예루살렘 활동기: 7:10-20:29)

다섯 번째 - 유대(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21:1-23)

그 동안 학계에서는 요한복음이 예루살렘 중심적 복음서인가 아니면 갈릴리 중심적 복음서인가?” 하는 문제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5중 하강구조>로 되어 있는 모습을 통해 요한복음은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기독교(예수의 정신)는 어떤 종교(진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 진리가 말하듯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높아지고 올라가는 진리(종교)가 아니라 내려가는 진리(종교)이다. 성육신의 종교, 즉 아래로 내려가는 섬김의 종교’(10:45)가 기독교이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발의 종교,’ ‘발의 진리’(13:1-16)가 기독교다. 맨 위의 머리(이성)의 진리(헬레니즘)에서 중앙의 가슴(마음)의 진리교(동양종교)를 거쳐 맨 아래 발의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예수님)은 진리의 끝(종언)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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