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26)

지난 시간에 나는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 연구(기독교 비판)가 왜 빗나갔는지에 대해 비판하였다.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에서 도올 선생에 대한 비판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냈다. 한마디로 논어천하제일지서라고 말하는 도올의 철학은 유교적 경세지학’(經世之學)’이다. 그가 세상을 경영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공자와 삼봉 선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도 결국 그의 사상이 경세지학임을 잘 보여준다. 죄송한 얘기지만 도올은 거듭난 니고데모’(19) 이전의 니고데모’(3)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발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보다 만세구주(萬世救主)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기를 간절히 기원드린다.”

도올 선생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만나는 체험(유레카 체험)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cf. 고전 8:1-3). 그러면서 난 도올 선생과 관련하여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음을 하였다.

바보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국민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였다. 도올 선생이 꿈꾼 나라는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 ‘多衆을 뜻하는 plathos지배하다를 뜻하는 archia를 합성한 신조어, 번역하면 민본성’[民本性]이라 할 수 있다)의 신세계이다. 도올이 꿈꾼 신세계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반기로서 21세기 아시아적 가치인 민본성에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는 고독한 지적 방랑자’(이 말은 도올 선생이 직접 자신을 두고 한 말로서 아직도 참 진리를 찾지 못해 지적으로 방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필자인 나 天命 (John Park)이 꿈꾸는 신세계는 이 땅에 예수가 다스리는 지저스크라티아’(Jesuscratia, 예수 나라)의 신세계이다. 이를 위해 난 치열하게 씨름하는 고독한 영적 순례자가 되고 싶다.”

 

도올 선생에 이어 지난 세기 가장 대표적인 신약성서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1886-1976)을 비판하고자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개신교 신학자를 거론할 때 바르트(1884-1968)와 불트만을 든다. 신약성서 연구사에서 불트만의 위치는 불트만 이전’(pre-Bultmann)불트만 이후’(post-Bultmann)로 나눌 만큼 그는 독보적 존재다. ‘불트만 학파’(Bultmann’s School)을 형성할 만큼 그는 많은 제자를 배출한 불트만 학파의 좌장이다.

불트만 이전에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은 모두 다 예수가 직접 하신 말씀’(logion)으로 생각하였다. 불트만은 1921공관복음서 전승사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중요시하는 양식비평 방법을 이 책에 적용하였다. 그 결과 그는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인 초대교회’(Early Church)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20세기 후반, 학자들은 편집비평 방법을 사용하여 공관복음서를 연구한 결과 최종적인 형태의 현재의 각 복음서에는 복음서 저자의 신학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복음서 저자는 단순히 전승 수집가나 자료 배열자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신학적 관점을 갖고 복음서를 편집, 구성한 개성 있는 신학자라는 것이다.

이 말이 같는 함의는 편집비평의 결과 공관복음이 요한복음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더 정확한 사실을 담지하고 있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불트만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의 요한복음연구는 결정적으로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편집비평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막센(W. Marxsen, 마가복음 연구), 보른캄(G. Bornkamm, 마태복음 연구), 콘첼만(H.Conzelmann, 누가복음 연구)이 있다. 공관복음서 연구사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불트만은 공관복음서 전승사를 출판한 지 20년이 지난 1941, 그는 최후의 학문적 대작인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연구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20세기 성서학 연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외람되지만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빗나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 그런가를 이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불트만은 사복음서 전체를 연구한 학자이다. 앞으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복음서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사복음서를 동일선상에 놓고 연구하였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의 결정적 패착은 바로 이로부터 연유한다.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르상 사복음서는 모두 똑같이 예수의 생애와 행적을 기술한 전기문학처럼 보이지만 요한복음은 전기문학 형식을 띤 묵시문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처럼 거의 같은 시대에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나온 묵시문서임을 전혀 몰랐다.

둘째, 요한복음은 앞선 복음서인 공관복음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복음서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역으로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요한복음을 재구성하는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

셋째,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감성적 차원이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연구에서 이성적 차원만이 아닌 감성적 차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 같은 세 가지 측면의 결정적 패착으로 인해 그의 요한복음연구는 철저히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역으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3. 불트만은 기본적으로 가까이는 19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아들이고, 멀리는 데카르트(1596-1650) 이후 근대의 아들이다. 이 말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는 진리의 잣대를 오직 이성에 두었다. 그 이성의 시대가 파국을 맞고 종언을 고한 때가 핵폭탄 투하로 인해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이다. 그러니까 불트만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시대의 마지막 끝자락을 장식한 신학자다. 그에게는 오직 이성만이 진리의 잣대였고, 감성적 차원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고, 요한복음연구의 결정적 빗나감을 초래하였다. 이를 부연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철학으로 비유하면 전자는 헤겔 철학’, 즉 이성적인 객관철학이라면, 후자는 키에르케고르 철학’, 즉 감성적인 주관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관복음은 제3자의 관점에서 주관적 감정이나 견해를 배재한 채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처럼 예수 사건을 보도하는 데 치중한 객관적 문서라면, 요한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와의 구체적 만남을 통해 예수 사건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랜 세월 묵상한 결과로 나온 개인적 편지와 같은 주관적 문서라는 사실이다. 가령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하고(5:1-9a), 그 사건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길게 강론하고 있다(5:9b-47). 또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하고(6:1-15),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길게 강론하고 있다(6:22-71).

따라서 보도 중심의 공관복음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구하면 그만이지만, 강론 중심의 요한복음은 그것만이 아니라 저자가 그 사건을 통해 느낀 주관적인 감정과 견해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예수와의 관계로 말한다면 양자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보다도 역사적 예수와의 구체적 만남을 통해 느낀 사랑의 감동’(감성)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공관복음이 예수와의 구체적 만남이 없이도 저술이 가능한, 감성이 중요하지 않은 이성적인 문서라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최측근 제자(목격자)로서 역사적 예수와의 구체적 만남을 통해 느낀 감성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기져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는 양서 연구에 있어서 접근방식을 달리해야 함을 의미하며, 불트만은 이에 실패했다. 이것이 요한복음 해석에 왜 중요한지 지금부터 살펴보자.

외견상 사복음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92%가 고유 기사이고, 나머지 공통자료인 8%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장하는 바가 상당히 다르다(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의 차이, 저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객관 보도 성격의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내밀한 사적 편지와 같은 주관적 성격이 강한 복음서이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세 가지 주요 자료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저자 또한 알 수 없는, 80-120년 어간에 제3자에 의해 편집된 책으로 본다. 나는 불트만과 달리 요한복음은 90-100년 어간에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혹은 그를 잘 아는 가까운 제자)이 쓴 것으로 본다(.이미 언급했듯이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필화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요한복음 기자는 애제자라는 익명을 썼을 뿐이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까닭은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 즉 그분과의 비밀스러운 내면적 친밀감(코이노니아)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어휘가 하나 있는데, ‘(κόλπος)’ 어휘이다. 이 어휘는 요한복음에서 꼭 두 구절(1:18; 13:23)에서만 암호처럼 사용되고 있다. 먼저 로고스찬가(1:1-18)의 마지막 구절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요한이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수는 태초에(창조 이전),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13:23)라는 구절이다. 요한복음에서 애제자(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구절은 요한의 천재성의 비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보여준다. 그것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평생 잊지 못할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낀 것처럼, 요한은 예수의 품속에서 다른 어느 제자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감성 터치)는 것이다.

요한은 그 짧은 순간의 사랑의 감동을 평생 잊지 못했다. 여기에 더하여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갈매기 떼 유유히 나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와 만난 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래서 난 요한복음을 연인 예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요한의 사모곡이라고 본다. 복음 중의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3:16)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의 감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 의한 충격과 감격이 사울을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바울이 되게 했듯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의 품에 안겼을 때 느낀 하나님 사랑’(아가폐)의 감격과 충격이 요한복음을 낳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소위 고흐의 불만, 즉 요한복음이 예수의 최측근 제자(21:24)에 의해 쓰인 작품임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인해, 예수를 향한 사도 요한의 파토스적 열정과 사랑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불트만의 책에서는 오직 근대 서구가 추구한 진리의 잣대로서의 차가운 이성’(머리)만이 있었다. 그의 저서에는 요한복음 속에 깃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아가페 사랑의 따뜻한 감성’(가슴)을 찾아볼 수 없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을 다루기에 앞서 나는 불트만의 요한복음 해석이 결정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한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이라는 비밀스러운 문서(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암호)는 요한복음 13:23에 나오는 한 단어, ‘(콜포스)’에 있다. “예수처럼, 요한처럼 오늘도 난 그 누군가의 감동이 되고 싶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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