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8)

1. 이번 호부터는 한국 현대 사상가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 선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석 선생은 도올(桃杌) 김용옥(1948- )선생처럼 신구약성경 가운데 유독 요한복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석은 요한복음의 대단히 중요한 책임을 천재적으로 직감했다. 그리하여 동서양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요한복음에 대해 뭔가를 말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외람되지만 다석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도올 선생이나 불트만처럼 크게 빗나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 그런지를 이제부터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다석 선생은 천문, 지리, 서양철학, 동양철학, 불경, 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賢者)요 한글 학자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생은 YMCA에서 30년이 넘도록 연경반(硏經班) 강의를 하셨다. 특히 선생은 1942년부터 거듭난 체험을 한 뒤에 얇은 잣나무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1941년부터 다석(多夕)이란 아호를 썼다. 이는 하루 세끼를 합쳐서 저녁에 먹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다석강의
다석 류영모 선생의 다석강의

선생은 간디처럼 53세부터 부부 사이에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87세에는 톨스토이처럼 가출을 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하였다. 일생을 명리를 버리고 진리를 향해 학문에 정진하였고, 근검절약과 금욕과 선행과 제자 양성에 한 생을 바친 선생은 존경이라는 말로 부족한 큰 스승이셨다. 선생에 대한 찬사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도올 선생은 짧게나마 신학을 공부했고 서구에 유학을 가서 기독교를 접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상식에 벗어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석은 기독교인이 되기에 앞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예수를 믿기 전 맨 먼저 맹자를 만나 공부했다. 16세 이후 다석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성경과 유교 경전을 탐독하게 되었다.

다석을 따르는 제자들은 선생의 성경(기독교) 이해를 두고 동서양 사상을 섭렵한 자로서 세계에 내놓을 만큼 탁월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정양모 신부는 다석 류영모의 신앙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놀랍게도 다석 류영모는 1912(22)에 이미 비정통 신앙과 더불어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자들보다 실로 70여 년을 앞선 셈이다. 앞으로 다석 사상 연구가 진척되어 널리 알려지면 세계 신학계가 놀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한다. 종교인 특유의 아집과 독선과 배타를 깨기에 넉넉한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엄청난 착각이다. 다석은 평생 성경을 읽고 강의를 했어도 기본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고 서구 유학을 가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 다석의 성경(기독교) 이해는 세계에 내놓는 것은 고사하고 상식선에도 못 미치는 부끄러운 것이고, 특히 전이해로 가지고 있는 동양사상적 멘탈리티로 성경을 재단했기에 심히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다석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어휘 대신 하느님어휘를 사용한다. 이는 하느님()이 기독교만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하느님)이 되신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은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보자

 

2.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호칭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엘로힘(Elohim) 호칭이고, 또 하나는 야웨(Yahweh) 호칭이다. 엘로힘 호칭은 일반적인 하나님을 말할 때, 즉 영어의 God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야웨(여호와)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말할 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용된 엘로힘 호칭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 너희 하나님’(13:5), ‘야웨 이스라엘의 하나님’(5:5) 등 야웨와 관련된 어휘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만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엘로힘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새 이스라엘’(만민)과 언약을 맺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하나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하나님(그리스도)이 아니라 예수라고 이름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파스칼(1623-1662)은 자신의 결정적 회심 사건(16541123)이라는 제목 하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은 철학자의 신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 다석이 말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 및 만민과 언약을 맺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야웨 하나님예수 하나님이 아니라 도통을 하여 깨달은 아버지 하느님이다. 다석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 야웨는 지구상의 한 민족이 믿는 하나님이기에 보편성을 띤 하나님으로 볼 수 없기에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고 오히려 보편성을 띤 하느님호칭을 썼다. 또한 예수는 석가처럼 몸나에서 얼나로 깨달은 자이지, 본래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자로 보지 않기에 그를 예배(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은 오히려 혼합주의요) 우상숭배이며, 오직 아버지 하느님만을 예배해야 하며 그것이 참 예배라고 주장하였다.

도통하여 깨달은

보편적 이름의 '하느님'

그런데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엘로힘인데, 이는 복수명사이다. 하나님을 뜻하는 아도나이라는 낱말도 나의 주인들이라는 복수형이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는 우리에게 다신론이나 범신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는 에하드이다. 에하드’(ד)와 대립되는 뜻을 가진 야히드’(יד)가 있다. ‘야히드단어는 12(22:2,12,16; 11:34; 22:21; 25:16; 35:17; 68:7; 4:3; 6:26; 8:10; 12:10) 나타나는 데 절대적 하나’(독자, 오로운, 유일한 등)를 뜻한다. ‘야히드는 복수성과 연합성이 배제된 언제나 유일하고 절대적인 하나를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말할 때 언제나 복수성과 연합성과 관련된 에하드’(699)가 쓰였으며 야히드는 결코 쓰인 적이 없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Creator)이자 구속주(Redeemer)이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및 자연 만물과는 철저히 구별된 유일한 절대 타자적 존재이다(1:1). 그리고 인간은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요 그것을 섬겨서는 안 될 존재이다. 따라서 성경은 신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세 관계를 이고, 人間人間이고, 自然自然으로 철저히 구별시키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초월성이요 인간과 자연의 위치이다.

이것을 차원으로 말하면 하나님()4차원(時空人+)이고, 인간은 3차원(時空人)이고, 자연만물은 2차원(인간이라는 한 차원이 빠진 時空)의 세계이다. 각자가 지닌 고유의 차원을 벗어날 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즉 인간이 4차원인 하나님을 숭배하지 아니하거나 3차원인 인간을 신격화시켜 4차원으로 간주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그리고 다스려야 할 대상인 2차원의 자연만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또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노예 백성이었던 히브리인을 출애굽시켜 구원하여 주신 분으로, 그의 이름을 야웨(여호와)라고 하는 분이다. 야웨 하나님은 역사에 철저히 관여하시는 역사의 주이시다. 인간 역사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다. 그분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성육신)이 예수라는 그리스도이다.

 

3. 그런데 다석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자. “예수하고 우리하고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 하였다고 예수가 우리보다 월등한 것이 아니다. 유교·불교·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 사람을 숭배하여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참되신 하느님뿐이다. 종교는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하느님 돼 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다. 예수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이 때문이고 가톨릭이 마리아 숭배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다석어록).

다석 유영모
다석 유영모

또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나 류영모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자를 말하는 것은 공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예수의 인생관은 지극히 높은 데 계시는 완전한 아버지께로 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예수와 같은 인생관을 갖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거지 이 밖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다석어록). 즉 하느님만이 우리보다 차원이 높지, 예수·석가는 우리와 동격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대속과 영생의

예수는 나와 상관없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석의 예수관을 잘 엿볼 수 있다. 그는 성육신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십자가의 대속사상도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가 영원한 얼나를 깨달은 것처럼 류영모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존재로서 예수와 자신은 동격의 인간일 뿐이며, 따라서 예수를 숭배하는 것은 마리아 숭배와 다름이 없다고 보았다.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다석은 공관복음의 예수와 요한복음의 예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깨달은 자로 거듭난 공관복음의 예수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의중(意中)의 사람 다석은 오직 한 분 스승이라고 한 예수를 이렇게 말한다. “예수라는 종교를 나는 모릅니다. 예수는 마굿간에서 나서 약 30살까지 목수 노릇을 하며 살다가 마지막 3년 동안 가르침을 세상에 폈는데,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아서 나중에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예수는 좋아하지만 기독교를 좋아할 수 없다고 하였듯이 류영모도 석가는 좋아하였으나 불교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석이 좋아한 예수는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3차원의 예수(땅에서 난 예수)이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4차원의 예수(하늘에서 성육신한 예수)가 아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멀리서 예수를 보았고, 요한복음의 저자(사도 요한)는 가까이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러기에 요한은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예수를 말했다. 그런데 다석은 가까이에서 더 높고 깊은 4차원의 예수를 말한 요한복음의 예수를 택하지 않고, 멀리서 본 더 낮은 3차원의 예수를 말한 공관복음의 예수를 택했다. 그러니 더 차원이 높은 요한복음을 제대로 알 턱이 없다.

4차원의 성육신 예수가 아니라

3차원의 인간 예수를 생각

다석은 요한복음의 예수를 버리고 공관복음의 예수를 택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차선이 최선을 가로막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한 최선이 아닌 차선을 붙잡고 그것을 최선이라고 우기는 것 또한 불행한 일이다. 또한 다석은 사복음서가 말하는 십자가의 대속사상도 믿지 않았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 및 재림 사상은 서구신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기본사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사상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다석은 요한복음을 믿는 자로 자처할지 모르나 그는 자기복음을 믿는 것이고,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성경적 기독교인이 아니라 자칭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김교신 전집을 낸 노평구 씨가 YMCA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들으니 석가·공자·노자·예수 등을 말씀하시는 인생철학 같기도 하고, 신앙적으로 싱크레티즘(syncretism, 혼합종교)이로구나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다석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뿐더러 제멋대로 왜곡하여 해석하는 숱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먼저, 다석은 요한복음 14:6의 말씀을 이렇게 왜곡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러면서 여기서 나는 제나(自我)가 아닌 얼나(靈我)를 말하며,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아갈 길(목적)이며, 참나인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란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얼이기 때문에 얼나로 솟나지 않고는 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성경 본문을 이렇게 왜곡할 수 있는가.

우선 본문은 아버지께 갈(go, προπορεω) 수 없다가 아니라 아버지께 올(come, ἔρχομαι) 수 없다로 되어 있다. 즉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오도록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다석이 말하듯이 예수가 우리와 동격의 인간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분일 뿐 아니라 부활 승천 하신 후 본래의 자리인 하늘의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는 성육신하시고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를 말하는 것이지, 제나가 얼나로 솟아난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인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적 의미에서 참나로 거듭난 얼이 아니며, 성령 또한 예수가 사역을 마치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7:39; 16:7) 하나님이 예수를 대신하여 보내시는 또 한 분의 하나님 보혜사이지, 인간적 의미에서 제나가 솟아난 얼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참된 진리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이 얼나로 솟났다고 해서 얼나가 사람이 나아갈 길(목적)이고, 그 참나가 진리가 되고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얼의 나라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된 예수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동격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구별하기 위해 독생자’(μονογηνς)’어휘를 예수에게만 사용한다(1:14,18; 3:16,18).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에는 테크니아’(τεκνίον 또는 τέκνον, 1:12; 8:39,41; 11:52; 12:36; 13:33; 21:5)라는 다른 어휘를 사용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할 때 여러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인 그리스도를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자요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이다(5:22-23). 요한복음 전체에서 말하는 아들이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낸 아들로서 그는 나사렛 예수를 말하며 나사렛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니다. 이를 부인한다면 그는 요한복음을 믿는(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하고(믿고) 싶은 대로 요한복음을 해석할 뿐이다(다음호에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