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3)

1. 요한복음은 네 핵심 가치인 영광’, ‘진리’, ‘생명’,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인 사랑주제를 다룰 차례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22:34-40)이 가장 큰 두 계명이라고 말한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이기도 하다. 특히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백한 최고의 사랑의 연서’(사모곡)이다. “왜 요한복음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요한복음이 인류 최고의 사랑의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결론이고, 사복음서의 결론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말을 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만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질문은 왜 사느냐?”라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이자 인생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생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따라서 그분을 만나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그분을 사랑(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그 맡겨주신 소임을 책임있게 감당하는 것(사명=목양)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 ‘예수 사랑하나님 사랑이요,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정확히 이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의 결론이고, 사복음서의 결론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이다.

중국은 크게 두 개의 강에 의해 나누어지는데, 황하강은 북중국을, 양쯔강은 남중국을 형성하였다. 요한복음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르는데, 위에는 진리의 강, 아래에는 사랑의 강이 흐른다. ‘진리의 강이 이성이 강한 남성적 톤이라면, ‘사랑의 강은 감성이 강한 여성적 톤이다. 요한복음은 사랑의 책(복음서)’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예수님의 제자)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16)라며 하나님을 사랑으로 정의한 유일한 저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불러 마땅하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는 그 단어의 사용 빈도수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동사 사랑하다’(ἀγαπω, 9, 6, 14, 44, 바울서신[-] 34, 요일 46, φιλέω, 5, 1, 2, 13, 바울서신 2, 요일 없음), 명사 사랑’(ἀγπη, 1, 막 없음, 1, 7, 바울서신 75, 요일 18), 먼저 요힌복음은 공관복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랑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서신도 요한복음처럼 사랑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서신과 요한복음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는 어휘 면에서 바울서신은 명사형 어휘’(사랑)를 주로 사용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동사형 어휘’(사랑하다)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제적이고 개념적인 명사 어휘는 헬라적 사고(헬레니즘)의 특징인 반면,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동사 어휘는 히브리적 사고(헤브라이즘)의 특징이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구약적, 유대적) 배경 아래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요한복음을 헬라적(영지주의적) 배경 아래 쓰인 책으로 보는 불트만의 주장은 상당히 빗나간 주장이 아닐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사랑 주제는 철저히 기독론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의 관계(3:16), 예수와 제자와의 관계(13:1, 34-35), 제자와 예수와의 관계(21:15-17)에서 보듯이 모든 사랑의 주제는 예수를 중심으로 엮어지고 있으며, 매우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을 띠고 있다. 반면에 바울서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신자)와의 관계(5:8), 신자 상호간의 사랑(3:14), 그리고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듯이 예수와의 관계에 의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매우 추상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사랑 주제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이 공관복음뿐만 아니라 바울서신과도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그것을 사랑의 원형(화신)’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냐 아니냐?” 하는 저자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해석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 감동의 차이에서도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저자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2.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의 삶의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 일제 치하에서 <성서조선>을 매달 간행한 김교신 선생은 항상 검열을 의식하면서 책을 발간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은 행간을 읽어 달라는 말을 누누이 당부했다. 그러다가 19423월호 권두문에 쓴 조와’(弔蛙)가 조선 민족의 부활을 상징하는 글이라는 일제의 해석에 의해 제158호로 강제 폐간 되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주후 90-100년경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상황에서 늘 필화의 위험성을 안고 글을 써야 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자연스럽게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10:2; 3:17; 6:14)이 등장하지만, 오히려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을 언급할 때 외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를 행간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

먼저,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애제자로 약칭)가 이 책의 기록자라고 한다(21:24). 그 애제자는 자주 베드로와 함께 등장한다(13:21-30; 20:2-10; 21:2-7). 애제자는 5(13:23-25; 19:26-27; 20:2; 21:7; 21:24) 나타난다. 그리고 안드레와 빌립은 항상 같이 나타난다(1:44; 6:5-9; 12:21-22). 요한복음에는 익명의 다른 제자가 나타난다. 135-51절에서 예수는 다섯 제자를 부르신다(안드레와 익명의 다른 제자,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익명의 다른 제자는 십자가 현장에 있던 사람이다(18:15-16; 19:26-27,35). 21장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 제자(시몬 베드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또 다른 제자 둘, 21:2)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품에 안긴 제자(애제자)가 나타난다(21:20),

이제 글쓴이의 행간을 읽어보자. 이 책의 기록자가 애제자이다(21:24). 이미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은 키아즘 구조(교차대구고조)에 의해 1장과 21장이 상응관계에 있다. 따라서 애제자는 익명의 다른 제자와 상응한다. 그 애제자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닌 예수의 품에 안긴(13:23)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면 그는 12제자 중의 하나이다. 그 애제자가 십자가 현장에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주님이라고 외친 자(21:7)로서 그 현장에 있던 일곱 제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21:2).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제자(항상 함께 나타나는 두 사람인 안드레와 빌립 언급). 그렇다면 일곱 제자 중 애제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밖에 없고, 요한은 언제나 베드로와 함께 나타난다(17:1; 26:37; 3:1,11; 4:13,19; 1:9 등등). 따라서 익명의 그 다른 제자는 애제자이고, 애제자는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편,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3:17)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그의 본래 성정이 불같이 과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중에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라고 주문한다. 이는 요한 형제가 얼마나 정치적 야심(탐심)이 강하고 다른 제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인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최고의 사랑학 교과서인 요한복음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대답은 그가 예수의 품에 안기면서 그때 체험한 그 사랑의 파토스(향기, 숨결, 맥박, 체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사랑주제와 관련하여 요한이 비밀처럼 숨겨놓은 두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공히 2회만 나오는 단어인데, 하나는 ’(κλπος, 1:18; 13:23)이고, 다른 하나는 ’(μακριος, 13:17; 20:29)이다. ‘단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κλπος) 단어만 살펴보자.

예수님의 품에 안겨 그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자가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그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자가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마르틴 부버(M. Buber)라는 유대 신비주의 철학자가 있다. 그의 저서 Ich und Du(나와 너)에서 부버는 사람이 관계를 맺는 두 방식이 있다고 했다.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와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둘 사이의 관계가 전자는 ‘3인칭의 관계’(나와 그분)이고, 후자는 ‘2인칭의 관계’(나와 당신)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3인칭과 2인칭의 차이를 다른 말로 하면 둘 사이의 거리감이다.

『Ich und Du, 나와 너』 마르틴 부버 저, 김천배 역, 대한기독교서회, 2020.3
『Ich und Du, 나와 너』 마르틴 부버 저, 김천배 역, 대한기독교서회, 2020.3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공관복음이나 바울서신과 상당히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와의 거리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도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공관복음은 역사적 예수를 말하지만, 상당히 거리가 있는 3인칭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역사적 예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을 가진 2인칭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공관복음이나 바울서신과는 다른 모습의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이를 말해주는 결정적 단서가 바로 ’(κλπος, 콜포스) 단어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 'Cenacolo' (최후의 만찬), 1495년~1498년
레오나르도다빈치 'Cenacolo' (최후의 만찬), 1495년~1498년

나는 이 단어가 사랑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1:18에서는 독생자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 품에서 함께 누렸던 사랑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그 사랑을 애제자인 요한이 예수의 품에 안겼을 때 느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요한은 예수의 품에서 이 세상이 알 수 없고 줄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포근함, 아늑함, 평안함,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다. 요한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이다. 그것은 콜포스의 체험!’(감성 터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했다. 세베대의 아들 어부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결정적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3. 요한복음이 말하는 사랑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성육신적 내리사랑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말로만 사랑한다고 떠드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임마누엘) 친히 우리처럼 육신을 입으시고 역사 속에 오셔서 모든 인간의 경계를 허문 사랑으로 보여주셨다.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316절은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 구절은 세상적인 것들(인종, , 지역, 학력, 재물, 지위 등등)을 기준 삼아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와 불평등의 세상에서 그 모든 세상의 기준을 다 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 안 믿으면 멸망과 죽음이라는 공식을 제시하는 인류 최고의 사랑의 혁명선언이다.

둘째, ‘하나 됨의 사랑이다. 고별기도에서 주님은 네 차례에 걸쳐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다(17:11,21,22,23). 특히 요한은 상호 거함’, 즉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가 하나 되는 상호 거함이라는 놀라운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17:21; 15:9). 특히 요한이 하나 됨을 강조한 까닭은 묵시문학적 박해상황 때문이다. 신앙의 배신에 따른 일치됨이 무너질 때 요한공동체는 와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굳건한 신앙으로 서로 하나 될 때 이 시련을 능히 이길 수 있다.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13:34-35)을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셋째, 종이 아닌 친구로, 섬김을 실천하는 사랑이다. 주님은 몸소 세족식을 통해 제자들에게 섬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것을 이라고 선언하셨다(13:17). 또한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3-1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혁명적인 선언이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왕내 목자 예수(10:15)가 되신 분이다.

넷째, 구체적으로 하나님 사랑은 예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양떼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극치)이자 인생의 목적이다. 요한복음 첫 장과 끝 장에 나오는 두 질문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제일성은 무엇을 구하느냐(찾느냐)?”(1:38)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인생의 목적과 최고 가치를 묻는 질문인 동시에 창조주요 구속주요 부활주인 예수 그리스도’(‘하나의 초점’)가 그 대답이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21장의 질문은 1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포하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이전에 자기사랑(자기애)이 우선하다가 실패한 베드로를 행해 인생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은 예수(주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 최고, 최후의 질문이다. 그리고 예수 사랑고백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라야 주님께서 명령하신 소임(“내 양을 먹이라”)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예수 사랑이 없는 상태의 모든 인간적 노력(헌신)과 자랑(공헌)자기 사랑’(자기의)이기에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다. 제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성육신과 십자가로 보여준 사랑이라면, 주님을 향한 제자(베드로)의 사랑은 순교(십자가)로 보답한 사랑’(21:18-19)이다. ‘예수 사랑’(Amore Jesusi)! 이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이고, 4복음서의 결론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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