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2)

1. 지난 시간에 약속했듯이, 이번에는 제자도의 압권이자 백미인 큰 물고기 153표적’(21:11)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까지 여러 측면에서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가 빗나갔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진짜 외람되고 미안한 얘기지만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가 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빗나갔는가를 한방에 보여주는 결정적 실례가 큰 물고기 153표적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왜 그런가를 이제부터 말하겠다.

역사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1945년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전에 쓴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1941)는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세 가지 불리한 조건을 가졌다.

첫째, 1945년 이후부터 묵시문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된 까닭에는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이나 핵무기 사용에 따른 인류문명의 종말이라는 위기의식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묵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나타났다. 불트만이 요한복음을 쓰던 당시에는 묵시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불트만은 묵시문학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50년대 이전까지 묵시문학 연구는 거의 다니엘서 연구가 전부였고, 1950년대 이후부터 묵시문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학문적 배경으로는 가나안 지역인 우가릿’(라스 샴라)에서 문서가 발견(1929-1949)되고, 이집트에서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서가 발견(1945)되면서, 이들 문서들이 유대 묵시문학과 많은 주제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쿰란문서의 발견(1947)은 요한복음과 쿰란문서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다. 쿰란문서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묵시문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이 주로 헬라적 배경에 기초한 복음서라는 불트만의 주장과 달리, 요한복음은 주로 히브리적(구약적, 유대적) 배경에 기초한 책임이 입증되었다. 시대적 배경과 학문적 배경을 통해 계속해서 묵시문학을 언급하는 까닭은 묵시문학이 암호와 같은 상징코드로 글쓰기를 하듯이, 장르상 묵시문학인 요한복음이 바로 그런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에서이다.

셋째,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컴퓨터의 영향력이다. 컴퓨터의 등장은 마치 종교개혁 당시 인쇄술의 영향력처럼, 현대 성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불트만은 이 같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컴퓨터의 출현이 왜 중요한가 하면 어떤 문서에 어떤 단어가 몇 회 나오는가를 알려면 전체를 일일이 다 세어보아야 하는데, 컴퓨터가 대신 작업해 줌으로써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북왕국(갈릴리) 전통에 속하는 요한복음에서 갈릴리어휘는 대단히 중요한 데,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단어가 몇 회 나오는가를 알려면 전에는 일일이 다 세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컴퓨터가 요한복음에 갈릴리어휘가 17회 나온다는 것을 쉽게 알려준다(숫자 17이 왜 중요한지 아래에서 말하겠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단어의 횟수를 컴퓨터가 알려줌으로 인해 전에는 알기 어려웠던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에서 요한이 암호처럼 사용한 어떤 단어의 숫자(횟수)의 의미(‘숫자 상징 코드’)를 알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불트만은 이런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이는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본문 외적인 문제이고, 이제 큰 물고기 153표적에 대한 본문 내적인 문제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2. 먼저, ‘1장과 21장이 교차대구고조(키아즘구조)로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요한복음 21장을 후기‘(postscript)라고 보면서, 앞부분(1-20)과 다른 저자(편집자)의 산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건이 후대인 것과 저자(편집자)가 다르다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일곱 제자들 앞에 나타난 사건을 다룬 본문으로 1-20장과 비교할 때 연대기적으로 후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1-20, 특히 1장과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이 표적을 담고 있는 21장은 후대에 다른 저자에 의해 첨부된 1-20장과 분리된 후기(부록)가 아닌 교차대구구조(키아즘 구조)에 의해 1장과 상응한다. 그 사실을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이미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에서 진리’(λθεια) 어휘와 진실로 진실로’(μήν μήν) 어휘는 공히 25(5[모세]×5[모세]=새 모세) 사용된 중요한 단어다.진실로 진실로어휘가 1-20장까지 24회 사용되고, 2118절에 1회 사용됨으로써 25회 횟수가 정확히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미 언급했듯이 차자 중시의 원리에 따라 나중에 부름받은(1:41-42) 베드로가 21장에서 수제자(21:2)가 되는 성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1장과 21장의 상응성에 따른 제자도와 관련하여 예수의 길은 십자가-부활의 길이고, ‘제자의 길’(제자도)부활-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의 구조를 보면 부활(2)-십자가(3), 부활(11)-십자가(12), 부활(20)-십자가(21)의 모습을 보여준다. 1장에서 제자를 부르심(“나를 따르라,” 1:43)은 상응하는 21장에서 제자도(“나를 따르라,” 21:22)로서의 십자가의 길을 암시한다. 153표적은 바로 이를 말하고 있다.

넷째, 교차대구구조에 따라 1장과 21장의 첫 절(1:121:1)이 공히 헬라어 단어 17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숫자는 의도를 가지지 않고는 거의 나오기 어려운 숫자이다(4복음서와 계시록에서 1:117단어로 되어 있는 것은 오직 요 1:1; 21:1; 2[4:1; 17:1-특별한 의미 없음] 나올 뿐이다). 숫자 17십자가의 숫자임을 감안할 때 이 숫자는 1장과 21장에서 제자도와 관련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증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1장과 21장은 한 저자에 의한 작품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1장은 서론, 2-20장은 본론, 21장은 결론을 구성하는 한 편의 잘 짜여진(조직신학적) 논문이라는 사실이다. 후기는 없어도 별 상관이 없지만, 결론은 논문을 쓴 저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21장에 들어있는 ‘153표적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요한복음 1장은 대단히 중요시 한 반면에 21장은 부록처럼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21장은 요한복음의 결론이며, 4복음서의 결론이자,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그 까닭을 다음호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든 숫자(횟수)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게마트리아(수의 상징학), 즉 숫자 상징 코드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큰 물고기 153’이라는 숫자는 그물에 담긴 구체적인 물고기 숫자 ‘153마리라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게마트리아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숫자라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요한복음 전체에 나타난 숫자(횟수)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은 대략을 말하는 숫자, 가령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2:6), 오천 명쯤(6:10), 십 여리쯤(6:19), 백 리트라쯤(19:39), 한 오십 칸쯤(21:8)에서 사용된 숫자와 달리 구체적인 숫자를 사용할 경우, 가령 돌항아리 여섯(2:6), 여섯 남편(4:18), 가룟 유다(6), 일곱 시(4:52), 38년 된 병자(5:5), 여드레(20:26) 등등은 모두 게마트리아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큰 물고기 153표적’(21:11)이 그러하다.

이 숫자는 실제적인 물고기의 숫자(어획의 풍성함 또는 예수의 큰 기적)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숫자가 묵시문학적 박해 상황에서 요한공동체 성도들 간에 그들만의 암호비밀처럼 사용된 게마트리아(숫자상징코드)’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큰 물고기 153마리는 요한이 게마트리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숫자 153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숫자로써 게마트리아의 압권이다(요한복음에 나타난 숫자 상징 코드’(게마트리아)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의 결정적 빗나감은 게마트리아에 대한 인지의 결여에서도 잘 나타난다.

물고기 153과 숫자 17의

비밀스러운 게마트리아 

3. 끝으로, ‘큰 물고기 153표적의 의미를 알려면 숫자 17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밀스럽게 감추어 둔 암호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세로축과 가로축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세로축은 구약’, ‘유대인’, ‘율법’(십계명), 가로축은 신약’, 또는 이방인’, ‘교회’(제자)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신구약성경(구약과 신약), 만민(유대인과 이방인), 완전한 복음(율법과 교회)을 나타낸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19:30) 하심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성취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복음의 두 축인 십자가와 부활을 숫자로 말하면 이렇다. 먼저 부활의 숫자는 주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숫자 3이 부활의 숫자이다. 또한 부활하신 후 제8일이 되는 한 주 후에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숫자 8이 부활의 숫자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숫자로 말하면 17이다. 그 까닭은 십자가는 세로축과 가로축으로 되어 있는데, 세로축인 구약, 또는 유대인의 율법을 대표하는 숫자는 10(십계명, 20:1-17)이다. 그리고 가로축인 신약 또는 이방인의 교회를 대표하는 숫자는 7(일곱 교회[2-3], 일곱 제자[21:2])이다. 이 두 축의 합수가 17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숫자는 17이 된다.

요한은 부활의 숫자 3’십자가의 숫자 17’을 비롯하여 요한복음 전체를 게마트리아(수의 상징학)로 사용하여 그의 복음서를 엮어놓았다.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요한은 필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상징기법을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법은 숫자상징코드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숫자 및 횟수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상징코드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숫자(횟수)에 담긴 암호상징을 모르면 요한복음 해석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불트만을 비롯한 그 동안의 모든 신약학자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요한복음 해석은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숫자 17이 그러하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십자가의 숫자 17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족장사(12-50)에 나타난 족장들의 수명을 고찰해 보면 일관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175(25:7), 이삭은 180(35:28), 야곱은 147(47:28), 요셉은 110(50:26)를 살았다. 족장들의 수명에 나타난 인수분해는 뚜렷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아브라함: 175 = 7×5×5 / 이삭: 180 = 5×6×6 / 야곱: 147 = 3×7×7 / 요셉: 110 = 1×(52+62+72).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마트리아에서 곱하기와 더하기는 상호 호환이 된다고 할 때 아브라함의 숫자(7+5+5), 이삭의 숫자(5+6+6), 야곱의 숫자(3+7+7)은 모두 17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숫자 17은 이미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나이(37:2)와 야곱이 애굽에서 체류한 세월(47:9,28 참조)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모세의 나이 120([3×4]×10), 다윗의 나이 70([3+4]×10)17과 관련되어 있다(숫자 70[10×7]은 숫자 17[10+7]과 상응). 주목할 점은 세 족장의 합수가 51(17+17+17)이라는 사실이다. 숫자 51은 아래에서 살펴보게 될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17)와 부활(3)의 곱수인 51의 마방진(魔方陣)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숫자이다(‘마방진이란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은 숫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숫자 153(17×3=51)×3=153으로 되어 있는 숫자이다.

요한복음 1장이 21장의 큰 물고기 153표적의 의미를 푸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것은 11절이 17(십자가의 숫자)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교롭게도 1장 전체가 51(17×3)도 되어 있다는 사실(51의 마방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21장도 이에 대한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 211절이 17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고, 부활하신 주님(숫자 3)이 세 번째(숫자 3) 나타났다(21:14)고 말함으로써 17×3×3=153을 암시하고 있다.

숫자 153(17×3×3)이 게마트리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 사람은 고대근동학 연구의 대가인 조철수 교수였다. 그런데 조철수 교수는 다음의 세 가지를 몰랐다 첫째, 숫자 17이 십자가 숫자임을 몰랐다. 둘째, ‘간결성의 법칙’(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문이 멀리 있는 본문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을 인식하지 못하여 숫자 17을 요한복음이 아닌 창세기 본문(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찾아 나섰다. 셋째, 이 숫자가 요한복음에서 제자도와 관련된 숫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숫자 15317×3×3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숫자 153은 숫자 17이 가로와 세로로 각각 세 번씩 곱한 수(17×3×3)이다. 이것은 정확히 십자가형상을 띤다. 에스겔이 본 바퀴 안의 바퀴’(1:16) 형상처럼, 숫자 153십자가 안의 십자가형상을 띠고 있다. 즉 숫자 153은 숫자 17로 된 십자가’(예수)9개가 있는 마방진 속에 또 하나의 십자가’(제자)가 있는 형상이다.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숫자 153 = (17×3)×3 = 십자가 마방진(魔方陣)
숫자 153 = (17×3)×3 = 십자가 마방진(魔方陣)

부활하신 주님은 여덟 번째 표적으로 큰 물고기 153표적을 행하셨다. 숫자 8은 새로운 시작(출발)을 의미하는 부활의 숫자이다. 이제 부활공동체인 요한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제자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여기서 부활신앙(부활체험)이 중요한 까닭은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제자로서 죽어도 영원히 산다’(영생)는 부활신앙이 확실해야 십자가(순교)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두 상징이 다윗의 별메노라’(등잔대)라면, 기독교의 두 상징은 십자가와 물고기 상징인 익투스’([ΙΧΘΥΣ], Ἰησους χριστς Θεου Υίὸς Σωτρ)이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20:31)은 바로 익투스’(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신다)를 말하고 있다. ‘익투스’(큰 물고기)에 담긴 신앙고백처럼 큰 물고기(익투스) 153표적은 제자도의 압권이자 백미로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이것이다. “부활신앙을 안고 십자가의 길로!!”(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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