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7)

1.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역사적(객관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요한의 신학적 의도인 인간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모델(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그려진 인물들이다(인물상징코드). 가령, 세례 요한은 선구자(증언자)의 모델, 베드로는 순교의 모델, 애제자(사도 요한)은 사랑의 모델, 나다나엘은 구도자의 모델,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순종의 모델,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헌신의 모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 증인의 모델,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 선교의 모델,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의 모델, 빌라도는 이방인의 대표의 모델, 빌립과 안드레는 중개자의 모델 등이다. 그 가운데 요한이 상징코드를 사용하여 전략적으로 대조시켜 그린 두 인물이 있다. 가룟 유다는 배신(불충성)의 모델이고, 도마는 신앙(충성)의 모델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디두모라는 도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갖고 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135)라는 찬송 가사도 있다. 그런데 도마는 공관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소개할 때 아무런 설명 없이 단지 이름으로만 한 차례씩 나올 뿐이다(10:3; 3:18; 6:15). 또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가 의심 많은 사람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인도에 기독교회를 세웠으며, 거기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중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난 2천 년 동안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의심 많은 제자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 생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도마 기사들 중 일부(20:24-29)를 근거로 한 것인데, 그렇다면 역사적 도마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요한이 그리고 있는 니고데모의 진면목은 부분(3)이 아닌 전체(3,7,19)을 통해 보아야 알 수 있듯이, 도마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나타난 도마 기사 전부(11:16; 14:4-6; 20:24-29; 21:1-2)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마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자.

요한복음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이중의미’(1:5; 2:19; 3:3,8,14; 4:10,15,27,35; 8:22,31-33,51-53,57-58; 11:11-14,23-26; 13:6-9,36-37; 14:3-7,7-9,21-33 등등)로 나타나는 오해 모티프아이러니(풍자) 기법’(4:12; 7:35,42; 8:22; 11:50; 18:38; 19:2-3 등등)이다. 이러한 기법들은 예수의 정체를 암시하는 복선 기능, 또는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오해 모티프란 예수와 제자들, 또는 예수와 적대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오해, 즉 예수는 자신을 계시하는 말씀을 하지만 그 상대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아이러니(풍자) 기법은 말하는 자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그것이 사실임을 말하는 역설적 기법을 말한다.

가령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라는 말씀을 유대인들이 오해하여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동안에 일으킬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씀은 십자가(허묾)와 부활(세움)을 통한 성전 된 자기 육체’(2:21)를 가리키는 이중의미를 담은 오해 모티프이다. 또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0)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반문은 크지 않다는 그녀의 말과 반대되는 예수께서 야곱보다 크다라는 아이러니(풍자)에 해당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19:3)라는 군인들의 조롱 섞인 말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그들의 말과 반대되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아이러니(풍자)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도마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와 빗나감은 요한의 독특한 표현 기법인 오해 모티프나 아이러니 기법, 나아가 분할 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도마의 엉뚱한 돌출 발언이나 행동을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오해 모티프와 아이러니 기법 및 분할 기법을 통해 볼 때 도마에 대한 기존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도마야말로 요한복음 이해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즉 도마는 천재 요한이 비밀리에 숨겨놓은 히든카드이다. 즉 도마는 요한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부활의 복음을 가슴에 안고 예수가 이미 걸었던 십자가의 길임을 보여준 메신저(대사)이자 요한공동체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신앙과 충성의 모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까닭을 이러하다.

요한복음에서 도마어휘가 7(11:16; 14:5; 20:24,26,27,28; 21:2) 나타난다. 여기서 숫자(횟수) 7충만함부활의 상징어이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6(6:71; 12:4; 13:2; 18:2,3,5) 나타난다. 숫자(횟수) 6사탄(마귀)’죽음의 상징어이다. 요한은 배신의 모델로 가룟 유다를, ‘(부활)신앙의 모델로 도마를 상정했다. 주목할 점은 도마는 요한복음 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과 위치, 즉 도마는 철저히 부활과 관련된 대목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도마 관련 기사를 하나씩 살펴보자.

2. 첫 대목(11:16)을 살펴보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의 이 말은 곧 있을 나사로의 소생사건(11:17-44)의 바로 앞 구절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은 예수를 잡고자 하는 무리들을 벗어나 방금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했는데, 죽은 나사로를 방문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 마을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도마의 이 발언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나사로의 소생사건은 요한복음의 한가운데 장인데, 여기서 도마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11:16). 도마는 모세와 세례 요한의 옛 시대가 끝나고(1-10장까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로 11장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나의 견해에 따르면, 도마가 제1부의 절정인 11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이라는 도마의 이 발언은 과연 생각 없이 무심코 툭 한번 던져 본 돌출발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발언은 이중의미와 아이러니 기법을 즐겨 사용한 요한의 고도로 계산된 신학적 발언이다. 이 발언에 대한 요한의 진정한 의도는 곧 있을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나사로의 소생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부활을 체험한 요한공동체(제자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제자들(요한공동체)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부활신앙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의 길로라는, 요한공동체의 구호(모토)’적 성격을 띤 발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두 번째 대목(14:5)을 살펴보자.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도마의 발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거처를 예비하러 갔다가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하려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도마의 응수이다. 이 질문은 요한이 독자나 요한공동체에 하고 싶은 말을 도마의 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즉 도마로 하여금 예수의 입으로부터 위대한 말씀을 토해내도록 다분히 의도적으로 행한 유도성 질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발언은 앞 대목에서처럼 언뜻 보기에는 무심코 뱉은 말 같으나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가를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인류 역사 이래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만큼 예수의 이 말씀은 역사상 최고로 중요한 말씀이다. 도마의 이 엉뚱한 질문은 그 이면에 요한의 신학적 의도가 깊이 깔려 있다. 즉 예수의 입으로부터 중요한 말씀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세 번째 대목(20:24-29)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예수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장면으로 요한복음 본론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 위치 자체만으로도 이 대목은 요한복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같이 중요한 대목에서 도마가 등장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러 왔을 때 하필이면 도마만 그 자리에 없다니! 우선 이것부터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여드레(20:26)가 지나서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숫자상징코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여드레날은 아기가 출생한 이후 할례를 받는 날이다(2:21). 그러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여드레 날의 의미는 믿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제8일은 새로운 주기의 시작으로써, 유대교를 대체하는 기독교의 새 시대를 여는 날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도마의 얘기를 들어보자.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그래서 여드레가 지나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자신이 말한 대로 행한 후에(옆구리에 손을 넣고 만져본 후에) 주님의 부활을 믿었는가? 그렇지 않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는 주님의 말씀에 도마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0:28).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by Caravaggio, c. 1602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by Caravaggio, c. 1602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이중적 의미,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이사가 (κρις)’가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가 주님’(퀴리오스)이라는 전복적인 신앙을 담고 있다. 또한 유일신 야웨(6:4-5)에게만 부여하였던 하나님’(ɵες)을 부활하신 예수에게 부여하고 있다. 예수가 주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신앙고백은 지금까지 행한 어느 누구의 신앙고백,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16:16)이나 마르다의 신앙고백(11:27), 또는 나다나엘의 신앙고백(1:49)보다 더 위대한 최고의 신앙고백이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요한복음 전체를 괄호로 묶는다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더한다. 즉 요한복음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라는 말로 시작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은 도마의 신앙고백이 요한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라는 요한의 깊은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20:29). 이 말씀은 도마와 나눈 주님의 마지막 축복의 말씀(beatitude)’이다. 요한복음에서 콜포스’() 어휘가 단 두 번(1:18; 13:23)만 나오듯이, ‘어휘는 단 두 번(13:16; 20:28)만 나온다. 즉 많은 복을 말하는 산상수훈의 팔복(5:3-12)과 달리, 요한은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이 복(13:16)이요, 예수의 부활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20:28)이라고 딱 두 번만 언급한다. 여기에는 요한의 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다.

사상 초유의 사건인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도마만이 아니라 그 현장에서 부활을 믿은 제자들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 부활 사건은 주후 30년경이고. 요한복음이 기록되는 지금은 60여 년이 지난 90년대이다. 30년대의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90년대의 요한공동체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무엇이 참된 복이냐?” 할 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주님의 유언과 같은 이 말씀에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 신앙을 넘어선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배려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20:30-31)이 도마의 신앙고백에 이어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이 대목을 주로 부록(또는 후기)으로 취급되는 21장을 제외한 요한복음의 결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21장이 요한복음의 결론이고, 이 대목은 부활과 관련된 본론의 종결어라고 볼 경우 도마의 신앙고백이 이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요한이 도마를 부활신앙의 중요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네 번째 대목(21:2)을 살펴보자.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디베랴(갈릴리) 호수에 나타났을 때 일곱 제자가 거기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마가 시몬 베드로에 이어 두 번째 순위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열두 제자 명단에 도마는 여섯째(1:13), 일곱째(10:3), 또는 여덟째(3:18; 6:15)에 위치한 반면, 이 대목에서 도마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1:46-49; 21:2)보다 앞에 나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최측근인 세베대의 두 아들들보다 앞에 나온다. 이 사실은 예사로 볼 수 없다. 성서적(동양적) 사고방식에서는 사람의 순위를 정할 때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나 연장자를 앞에 놓는다. 그래서 베드로는 항상 맨 수위 자리에 위치시킨다(10:2; 3:16; 6:14; 21:2; 1:13). 그런데 이 대목에서 도마가 예상 밖으로 베드로 다음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분히 요한의 신학적 의도가 깔려 있다. 즉 요한복음에서의 도마의 중요성을 고려한 자리 배열이다.

 

3.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의심 많은 제자의 모델로서의 도마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얼마나 빗나간, 즉 요한의 글쓰기(아이러니 기법, 오해기법 및 분할기법)를 깊이 고려하지 않은 편견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오히려 도마는 요한에 의해 요한공동체의 최고의 신앙 모델로 그려진 인물이다. 도마는 요한의 천재성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인물 상징코드가 아닐 수 없다. 요한은 도마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한 인물이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가 아니라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들의 대표로서, 그리고 예수를 보지 않고 믿어야 할 후대의 신앙인들의 대표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의심하지 말고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들이 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요한복음의 절정인 11장에 처음 등장하는 도마의 제일성은 이렇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 그리고 부활장인 20장에서 이러한 말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8).

요한이 도마의 제일성(11:16)과 그의 신앙고백(20:28)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은 영원토록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것, 그러기에 지금 묵시문학적 박해와 위기상황에서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과 충성을 위해 요한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참 제자의 길은 주님처럼 부활신앙을 안고 십자가 고난의 길로 가자는 것이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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