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1)

1. 요한복음은 진리의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의 네 핵심가치(영광, 진리, 생명, 사랑) 진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진리의 문제는 곧 누가(무엇이) 참 진리인가?”를 통해 참 진리인 그분(그것)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진리의 문제는 곧 영광의 문제와 직결된다.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이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을 영광의 책으로 보고, 1(2-12)의 제목을 세상을 향한 영광(ΔΌΞΑ)의 계시, 2(13-20)의 제목을 공동체 앞에 나타난 영광(ΔΌΞΑ)의 계시로 붙였다. 이 같은 제목은 요한복음에서 영광주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불트만은 영광주제를 다루면서 제목에서도 나타나지만 세상을 향한’(1), ‘공동체 앞에 나타난’(2) 영광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없는 막연한 영광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광은 무시간적인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제1(1-11)에서 유대교(모세)에 대한’(1)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제2(12-21)에서 로마제국(로마황제)에 대한’(2)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제1(1-11)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막에 대해 예수의 새 율법과 새 성막으로 모세(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우위와 승리를 변증하고 있다. 그래서 제1부를 시작하는 1(2장이 아닌) 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이라고 말하면서 율법은혜라면, ‘은혜와 진리’(즉 복음)은혜 위에 은혜’(恩上加恩)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와 영광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가 성막(tabernacle) 위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40:34-38), 성육신하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1:14)는 성막 안에 거하시는(tabernacled) 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모세의 영광을 넘어선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와 영광을 변증하고 있다. 나아가 제1부의 끝장인 11장에서 나사로의 소생사건을 통해 모세의 영광을 넘어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영광(11:4,40)을 말하고 있다.

 

모세의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

또한 제2부가 시작되는 12(13장이 아닌) 31절에서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를 통해 이 세상 임금’(12:31; 14:30; 16:11)으로 상징되는 로마 황제에 대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변증하고 있다. 또한 제2부의 끝장인 21장에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새 황제로서의 주님(퀴리오스, 8회 사용) 되심을 말함으로 로마 황제의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와 영광을 변증하고 있다. 이렇듯 영광주제는 요한공동체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배태된 것인데, 불트만의 영광이해는 이러한 인식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더욱이 나는 요한복음의 제1(1-11)성육신 및 일곱 표적을 통한 영광과 생명으로, 2(12-21)십자가 및 부활을 통한 영광과 생명으로 제목을 붙였다. 그 까닭은 성육신과 일곱 표적,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 것은 영광주제는 생명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영광 주제를 생명 주제와 관련시키지 못했다. 즉 그는 왜 요한이 그토록 영광과 더불어 생명’(부활과 영생)을 강조하는지를 잘 몰랐다.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영광 주제는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기존의 종교인 모세의 영광이나 대제국을 이룩한 로마의 영광에 충성을 하면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모세의 영광이나 로마의 영광을 거부할 경우 유대교로부터의 출교(9:22)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수난과 죽음(12:28-33)이 기다리고 있었다.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참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요한복음이 그토록 생명을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진 육체적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영생)이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14:6).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20:31). 이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초대교회는 영광을 위한 충성을 강요하는 두 세력과 싸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다. 로마제국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주전 63-주후 14)로부터 시작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깃발을 전 로마제국에 휘날리며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고 있었다. 또한 유대교는 지난날 누려왔던 성전’(시온)과 관련된 다윗의 영광율법’(토라)과 관련된 모세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참으로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는 로마제국이 말하는 황제의 영광도 아니고, 유대교가 말하는 다윗이나 모세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썼다. 이를 위해 요한이 어떤 전략(성령의 지혜)을 구사했는지 살펴보자.

 

황제의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

2. 유대인들은 네 핵심가치를 중요도에 따라 성전(聖殿), 성경(聖經), 성지(聖地), 성민(聖民) 순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삶의 구심점으로서의 성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성전을 맡은 사두개파 출신의 ()제사장들은 사회적으로 최상의 엘리트층에 속하는 사람들(귀족)에 속한다. 그리고 성경을 맡은 서기관과 바리새파가 그 뒤를 잇는다. 여기서 성전을 최상의 핵심가치에 둔다는 말은 영광의 측면으로 말하면 성전 제도를 확립해 준 다윗(솔로몬)의 영광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성경을 그 다음 핵심가치에 둔다는 것은 율법 제도를 마련해 준 모세의 영광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두 핵심가치이다.

그런데 요한은 기독교의 핵심가치를 유대교의 핵심가치의 순서를 바꾸어 성전보다 성경’(말씀)을 우위에 두었다. ‘성전의 문제2장으로 돌리고, ‘성경의 문제를 맨 앞 1(1)에 두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고는 유대교의 네 핵심가치를 요한복음 1-4장에 전략적으로 배치하여, 1장에서는 성경(말씀)의 문제, 2장에서는 성전의 문제, 3장에서는 성지의 문제, 4장에서는 성민의 문제를 차례로 다루었다. 1-2장은 아래에서 말하기로 하고, 먼저 3(성지의 문제)-4(성민의 문제)을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다.

어디가 거룩한 땅 성지(聖地)인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 그 가운데서도 북왕국 멸망(주전 722) 이후 북왕국에 속하는 갈릴리와 사마리아는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진 땅(이방인의 땅)으로 여기면서, 오직 유다 지역만을 성지로 삼고자 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참된 성지는 팔레스타인 땅, 더 좁혀서 유다 지역이라는 공간적(지역적) 장소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3:3,5)를 안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 성지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세상 나라의 땅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하나님 나라)이 거룩한 땅 성지이고, 거룩한 땅 성지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기에 그를 영접하는 그 자리가 성지, 하나님 나라임을 말하고자 했다. 즉 장소 개념에서 인격 개념으로 성지 개념이 바뀐 것이다.

다음으로, “누가 거룩한 백성 성민(聖民)인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 더 좁혀서 유대인만이 성민으로 간주했다. 북왕국 멸망 이후 아시리아의 혼혈정책으로 인해 더럽혀진 사마리아인들은 성민이 아닌 이방인들로 간주하여 상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마친 후에 유대인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갔다(4:4). 그리고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 생수와 관련된 대화를 하다가 예배 문제에 부딪쳤다. “하나님은 누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4:24)라는 말씀을 통해 어느 특정 지역이나 인종, 또는 제물의 유무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민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이어서 성경성전의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요한은 213-22절에서 성전정화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을 대신하는 몸성전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를 영광의 측면에서 말하면 옛 성전의 영광인 다윗(솔로몬)의 영광이 아닌 새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의 대체와 승리를 말하는 것이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다.

한편 남왕국 유다(예루살렘) 전통은 성전과 더불어 왕-제사장인 다윗을 강조한다면, 북왕국 이스라엘(갈릴리) 전통은 말씀의 대언자인 예언자 모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영광보다 모세의 영광을 강조하는 것이 북왕국 전통이다. 이제 북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복음은 다윗의 영광을 넘어 모세의 영광을 노래한다. 요한복음 11절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로고스 찬가(1:1-18)를 통해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모세의 영광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3. “태초에 말씀(성경)이 계시니라”(1:1). 지금 요한은 복음서의 첫 구절을 통해 성전보다 말씀(성경)을 앞세우는데, 이는 결국 말씀(성경)의 우위, 즉 성전을 강조하는 다윗의 영광보다 말씀(성경)을 강조하는 예언자 모세의 영광을 우위에 두는 선언서(Manifesto)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로고스)14절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언급을 통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모세는 예언자로서 말씀의 대언자인 반면, 새 모세인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 모세를 넘어 말씀 그 자체로 오신 분(성육신)이다. 따라서 누가 영광을 받으실 분인가?”라고 할 때 인간 모세를 넘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사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1:1-3)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모세를 율법을 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로 오신 분으로 표현하면서(1:17) 율법이 은혜라면, 새 율법(은혜와 진리)은혜 위의 은혜’(恩上加恩)라고 말함으로써 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말하고 있다. ‘로고스 찬가끝 절(1:18)은 이 논쟁의 마침표를 찍는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는 정도로 그쳤는데(33:17-23), 이것이 모세의 영광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모세의 영광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은혜 위의 은혜

율법 위의 복음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되시는 예수(10:30)께서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5:41)라고 말씀하시면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11:4,40).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하시면서 십자가 죽음이 자신의 영광이 된다고 선언하셨다. 고별기도에서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라는 기도를 통해 아들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을 동일시하셨다. 즉 예수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따라서 그분만이 예배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요한공동체는 황제를 신격화시켜 황제의 영광을 강요하는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커다란 시험을 받고 있었다. “누가 참으로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충성이냐 배신이냐?”하는 신앙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지켜온 신앙을 배신하면 살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 충성하기로 하면 이는 곧 죽음이다. 그러니까 영광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이고, 이 문제는 결국 참 제자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제자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2부의 피날레인 21장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황제의 바다인 디베랴(디베리우스) 호수(21:1)에 나타나셔서 누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황제)인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면 그분께 순교로 충성하라는 의미에서 순교의 모델인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21장에서 요한은 새 출발을 의미하는 부활의 숫자 8을 두 번 사용하고 있다. 하나가 8번째 표적인 큰 물고기 153표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뜻하는 원어 퀴리오스’(κριός)8(7[2],12,15,16,17,20,21) 사용하고 있다. ‘주님’(퀴리오스) 용어는 예배를 받으실 분을 말한다. 즉 부활하신 예수께서 새 황제가 되시며, 그분만이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심을 숫자 상징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로서 참 제자의 길을 간 베드로를 본받는 것, 그것이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요한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제자도)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상징적 실례가 제자도의 압권이자 백미인 큰 물고기 153표적’(21:11)이다. 이 표적의 의미를 다음 시간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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