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29)

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3장과 18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빌라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주제를 다루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라고 할 때 그러면 누가 하나님이며 누가 왕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을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선정된 니고데모(유대인의 대표)와 빌라도(이방인의 대표)를 통해 증언했다. 결국 이 두 인물은 하나님 나라를 안고 오신 예수를 보았으나(3:3)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고, 빌라도는 못 들어갔다(3:5).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하는 여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를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육신으로 난 니고데모는 처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3:4-8), 초막절 이후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되어(7:50-51),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와서 예수의 장례를 왕적 장례로 치러드렸다(19:39).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 저자는 니고데모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다.

또한 빌라도 이야기는 두 장(18-19)의 중심(18:28-19:16)에 위치시켜 길게 언급하고 있다. 이 단락은 관정 안팎을 오가는 빌라도의 동작에 따라 일곱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중앙집중식 구조’(메노라 구조)상향식 구조’(다윗의 별 구조)라는 정교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정교한 구조는 요한의 치밀한 신학적 의도에 기인한다. 이 일곱 장면을 상향식 구조로 볼 때 일곱째 장면의 보라 너희 왕이로다”(19:14)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중앙집중식 구조로 볼 때 넷째 장면(19:1-3), 즉 예수의 대관식이 제일 현저하게 나타난다.

A. 18:28-32(관정 밖의 빌라도)-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유대인들

B. 18:33-38a(관정 안의 빌라도)-예수의 왕권에 대해 심문하는 빌라도

C. 18:38b-40(관정 밖의 빌라도)-예수의 죄를 찾지 못했다는 빌라도

D. 19:1-3(관정 안의 빌라도)-예수를 매질하며 모욕하는 군병들

C’ 19:4-8(관정 밖의 빌라도)-예수의 죄를 찾지 못했다는 빌라도

B’. 19:9-12(관정 안의 빌라도)-예수의 권세에 대해 묻는 빌라도

A’. 19:13-16(관정 밖의 빌라도)-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유대인들

일곱 장면을 내용적으로 검토해 보면, 첫째 장면(A)과 일곱째 장면(A’), 둘째 장면(B)과 여섯째 장면(B’), 셋째 장면(C)과 다섯째 장면(C’)이 서로 상응하고 넷째 장면(D)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18-19장의 정중앙에 위치). 첫째 장면과 일곱째 장면은 예수에 대한 배척이 주제이며, 둘째 장면과 여섯째 장면은 예수의 왕국과 왕권이 주제이며, 셋째 장면과 다섯째 장면은 예수의 무죄 증명이 주제이다. 그리고 넷째 장면은 군병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아이러니 기법) 예수의 왕권,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일곱 장면은 재판 과정 전체가 예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서 진행된다. 즉 일곱 장면은 왕권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두 번 나오는 셈이다. 이를 통해 수난설화의 핵심은 예수의 왕권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요한복음은 로마 황제 도미티안의 기독교 박해상황에서 누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주님)이며 이 세상을 통치하는 왕인가?”라고 할 때 로마 황제(또는 빌라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예배를 받으실 주 하나님(20:28; 21:7)이자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18:38; 19:2,19)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묵시문학적 상황과 하나님 나라가 갖는 은폐성 및 대표성의 원리를 몰랐던 불트만은 신약성서신학이라는 책에서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단순 비교 하면서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진리와 생명이라는 개념들로 대신했다는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요한의 예수는 침입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언자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북왕국 예언자 전승에 서 있는 요한은 예수를 철저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1:26; 6:14; 7:40)로 보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불트만은 요한복음 저자가 교차대구구조와 대표성의 원리, 그리고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니고데모와 빌라도를 대조시켜 하나님 나라주제를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

니고데모와 빌라도의 대조

2. 또한 앞서 질문한 2번 문제(“요한아, 너는 왜 베드로가 아닌 안드레가 먼저 부름을 받았다고 했니?”)를 살펴보자. 이 질문은 공관복음에서 베드로 소명 기사를 보면, 베드로가 먼저 제자로 부름을 받고 이어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순으로 부름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cf. 4:18-22; 1:16-20; 5:1-11).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보다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가 먼저 부름을 받는다(1:35-42).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트만은 공관복음을 그렇게도 열심히 연구하고, 20년 동안의 연구 끝에 나온 요한복음연구에서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참으로 이상할 정도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면면히 내려오는 차자(약자) 중시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장자(강자)가 중시된다. 장자에게는 상속권과 축복권이 주어진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할 때 그만큼 장자의 권리를 큰 것이다. 그런데 결국 누가 장자 됨이냐?” 할 때 성경은 먼저 된 자(장자)보다 나중 된 자(차자)가 먼저 된다(cf. 20:16)는 것을 역설한다.

가인이 아닌 아벨(),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 르우벤이 아닌 유다, 아론이 아닌 모세, 다윗의 형들이 아닌 다윗, 첫째 아담이 아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가 그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누가 메시아인가?”라고 할 때 먼저 온 세례 요한이 아니라 나중 오신 예수가 메시아임을 말하고 있다(1:15). 마찬가지로 누가 수제자가 될 것인가?”라고 할 때 먼저 제자로 부름 받은 안드레(1:40)가 아니라 나중에 부름 받은 베드로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1:42; 21:2).

불트만 뿐 아니라 이같이 차자 중시의 원리를 모르는 서중석 교수(연세대)는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공동체와 요한공동체(애제자가 속한 공동체)가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요한공동체의 대표인 요한을 높이기 위해 베드로공동체의 대표인 베드로를 예수께서 직접 부르지 않고 남의 손에 이끌려온 자로 희미하게 그리고 있다는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를 부정적 제자상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요한은 베드로를 최고로 높여드렸지,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은 과연

요한공동체와 베드로공동체의

갈등이 배경인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베드로 등장 장면을 살펴보자.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마치고 예수께서 생명의 떡강화를 하자 모인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다 떠나갔다. 그때 예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69).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영생의 말씀’(로고스)이자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후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자 베드로가 이에 반항했다. 그런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16:23)는 충격적인 책망을 들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 사탄이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마귀라고 언급하고 있다(6:70-71).

다음으로, 부활 현장에서 베드로와 애제자(사도 요한)가 함께 등장한다(20:1-10). 여기서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20:4)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를 두고 서 교수는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갔다는 언급을 통해 요한공동체가 베드로공동체보다 영적으로 우월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했다. 아니 두 사람이 달려갈 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보다 앞서 달려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를 두고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설명은 지나치다. 그 다음 대목을 보자. “구부려 세마포 놓은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20:5-6). 오히려 무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애제자가 아니라 시몬 베드로이다. 젊은 애제자는 연장자인 베드로에게 무덤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미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영적인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문제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고 있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난 사건이다(21). 7절에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20:7). 이 대목을 두고 서 교수는 애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보았다는 것을 이전처럼 요한공동체가 베드로공동체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풀이한다.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눈이 밝아 먼저 보는 것이 이치에 맞고, 물고기 잡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주님을 먼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영적인 것과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애제자의 말을 듣자마자 주님께로 먼저 달려간 사람은 애제자가 아니라 시몬 베드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21:15-19)21장의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점에서 베드로장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요한복음은 대표성의 원리를 보다 구체화한 모델의 원리를 보여준다. 즉 베드로는 순교의 모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21:18-19).

이상의 언급을 통해 요한복음은 베드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깎아내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인물이자 순교의 모델로 추앙받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불트만이나 서 교수나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차자 중시의 원리’, 더 나아가 요한복음이 사용한 모델의 원리를 전혀 몰랐던 불트만은 이 문제에 침묵했고, 서 교수는 해석의 빗나감을 초래했다.

 

요한복음의 중요한 원리

차자 중시 원리와 대표성 원리

3. 이제 요한복음에 나타난 대표성(모델)의 원리를 정리해 보자. ‘대표성의 원리를 보다 구체화한 것이 모델의 원리.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인 드미뜨리, 이반, 알료샤는 각각 육체, 정신, 영혼을 대표하는 모델이듯이 요한복음은 전체가 대표성(모델)의 원리에 의해 구성된 완벽한 한편의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문서, 특히 사도행전은 예수를 베드로의 모델, 바울의 모델, 스데반의 모델로 그리고 있듯이, 요한복음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뿐 아니라 사건, 표적, 절기 등 모든 것을 대표성(모델)의 원리에 따라 그리고 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 가령 예수의 모친 마리아(2)는 순종의 모델,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12)는 헌신의 모델, 막달라 마리아(20)는 부활 증인의 모델, 마르다(11)는 신앙고백의 모델, 사마리아 여인(4)은 이방 선교의 모델, 그리고 세례 요한(1)은 선구자의 모델, 가룟 유다(6,13,18)는 불신앙과 배신자의 모델, 도마(11,14,20,21)는 신앙과 충성과 의리의 모델, 베드로(21)는 순교의 모델, 안드레와 빌립(6,12,14)은 중개자의 모델, 니고데모(3,7,19)는 유대인(최상류층)의 모델, 빌라도(18-19)는 이방인(최상류층)의 모델, 가야바(11)는 종교 권력의 모델, 그리고 선한 목자(10)는 비유의 모델, 5대 절기(2,5,7,9,10)는 절기의 모델, 7대 표적(2,4,5,6,9,11)은 표적의 모델 등등.

요한이 사용한 대표성(모델)의 원리를 모를 경우 해석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 가령, 공관복음에 보면 부활 현장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가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28:1; 16:1-2; 24:1).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혼자 안식 후 첫날 일찍이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상식선에 아직 어두울 때에 여인 혼자서 무덤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관복음의 기술이 더욱 객관성을 지닌 본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왜 막달라 마리아 혼자 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를 적용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 증인의 모델로 그리고자 의도한 요한의 일관된 글쓰기에 따른 것이다.

요한은 지금 부활 현장에 막달라 마리아 혼자 간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첫째, 여러 여인들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무덤을 찾아감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서로 대화하는 장면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20:1-18).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음으로 인해 부활의 확실성을 인증하는 모델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또하나 주목할 점은 요한은 본론(2-20)의 첫 장(2)과 정 가운데 장(11)과 끝 장(20)부활장으로 구성하면서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종교임을 역설하는 동시에, ‘마리아라 이름하는 세 여인(예수의 모친, 나사로의 누이, 막달라)을 각각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여자들을 지극히 천시하던 그 시절에 부활을 증언하는 소중한 사명을 여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존귀한 존재(남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 부각시키는 동시에 예수 부활을 의심하는 남자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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