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25)

1.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출간을 통해 난 외람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동안 요한복음 연구는 해석의 빗나감과 피상성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이를 후기 인상파 화가 세 거장인 세잔느(P.Cezanne, 1839-1906), 고흐(V. van Gogh, 1853-1890), 고갱(P.Gauguin, 1848-1903)이 갖고 있었던 강한 불만을 통해 언급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느는 인상주의자들이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과거의 위대한 그림들이 보여준 자연의 굳건하고 지속적인 조화로운 균형과 질서가 사라졌다고 느꼈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는 겉으로 들어난 문자나 본문을 갈기갈기 파편화시켜 분석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세잔느의 생각처럼 전체 구조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또한 태양의 화가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예술가가 가져야 할 강렬한 정열과 개성 있는 표현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런데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는 예수의 최측근 제자인 사도 요한이 원저자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고흐의 생각처럼 사도 요한의 파토스적 정열과 사랑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또한 타이티 섬의 화가 고갱은 전통적인 유럽 미술의 인습적인 형식과 단순한 기교를 혐오하면서 원주민들의 정신 속에 깃든 단순함과 순수함에 대한 강한 열망을 열정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는 헬레니즘에 입각한 사변적인 지적 유희와 현란한 언어적 기교에만 매달린 나머지 고갱의 생각처럼 요한공동체가 처해 있는 절박한 위기와 현실적 고통을 담지하기 위해 사용한 묵시문학적 암호상징’(상징코드) 속에 깃든 단순함과 순수함의 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따라서 요한복음 연구는 다시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지난 세기 대표적인 신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1884-1976)요한복음 연구(1941)를 필두로 도올(桃杌) 김용옥(1948- ) 선생과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 선생, 그리고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 선생의 제자인 김진호 목사의 요한복음 연구서 급진적 자유주의자들(2009)을 차례로 비판하였다.

 

2. 먼저 도올 선생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 까닭은 내가 요한복음에 천하제일지서’(天下第一之書)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도올 선생이 한 말에 대한 반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그의 저서 도올논어 1(154)에서 공자의 논어천하제일지서’(天下第一之書)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말한 그가 요한복음 9장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말한다면, 어디 천만 권의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 작품이 이에 비할 수 있으랴! 감동에 감동을 전하는 완벽한 드라마가 이 한 장에 전개되고 있다.” 이 같은 요한복음이 논어보다 못하단 말인가?

대략 주()나라 말엽(주전 247년경)에 편집 된 논어는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기까지 전 20편에 49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올은 논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묵맹(墨孟)으로부터 사마천의공자세가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소설(小說)이라는 것이다. 小說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論究)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도올의 말대로 공자의 생애와 어록을 담은 논어가 소설이라면, 논어에는 소설의 플롯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이나 클라이맥스(climax)가 제대로 나타나 있는가. 그 같은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예수의 생애와 어록을 담은 요한복음을 문학작품(소설)이라 할 때 요한복음은 소설의 플롯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이나 클라이맥스(11)가 뚜렷하다.

또한 현존하는 논어20편의 편제에 대해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각 편마다 어떤 주제적 통일성이나 시공적 균일성이나 전승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 그러나 기본적으로 각 편들의 전승의 편집 시기는 각기 한 시점으로 규정할 수 있어도, 한편의 전승의 내용의 성격은 도저히 균일한 것으로 묶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미 學而述而니 하는 식으로 의미론적 구조와 관계없이 첫 두 글자만을 따서 편명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관된 주제를 내걸기에는 너무도 그 내용이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올은 논어가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어떠한가.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은 교차대구구조에 담긴 부활과 십자가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진 한편의 조직신학 논문임을 상세히 밝혔다.

요한복음의 일관된 주제와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더욱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치인 생명, 진리,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공자는 얼마나 제대로 말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고 말하면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10:10)이며,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20:31)이라고 기록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22:36-40)을 비롯하여 제자 사랑’(13:34-35)을 넘어 친구 사랑’(15:13-15), 더 나아가 스승이 제자를 섬기는 사랑(13:1-17)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생명, 진리, 사랑을 말한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를 행함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면 사상의 깊이에서 논어가 요한복음보다 더 뛰어난가? 공자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이에 반해 예수는 죄의 문제를 십자가로, 죽음의 문제를 부활로 답하고 있다. 또한 공자는 하늘이 아닌 오직 땅(세상)과 영원이 아닌 시간 속에 있는 인간과 사회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에 반해 예수는 땅(세상)만이 아닌 하늘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말씀했으며, 세상 나라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있다. 다른 것은 일단 다 차치하고 공자의 논어3차원(3= 時間, 空間, 人間)의 인간 세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한 차원 높은 4차원(4= 時間, 空間, 人間, 神間)의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는 요한복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면 이제부터 도올의 요한복음강해도올논문집에 나타난 문제점을 살펴보자.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와 그의 논문집 모음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와 그의 논문집 모음

 

3. 첫째, 도올은 자신의 氣哲學동양적 일원론이라고 주장하면서, 서구철학과 기독교를 이원론의 오류에 빠졌다며 싸잡아 맹렬히 비판한다. 여기서 도올의 결정적 오류는 헬레니즘에 기초한 서구 기독교’(혹은 서구철학)와 헤브라이즘에 기초한 성경적 기독교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 사상은 미분화된 합일(合一)적 사고(일원론)를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서구 기독교(서구 철학)분화된 분리적 사고(이원론)를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성경적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적 사고, 구분은 되나 분리는 되지 않는 관계적 사고를 갖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이원론적 모습,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는 일원론적 모습을 띠지만, 이는 동양의 합일적 사고나 서구의 분리적 사고가 아닌 관계적(구분적) 사고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원론과 이원론은 옳고 그름이라는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성경적 기독교의 관계적 사고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동양적 일원론이나 서양적 이원론을 넘어서는 가장 바람직하고 발전적인 사고라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말하고자 한다).

둘째, 도올은 요한복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이루어진 통으로 짠 옷’(줄여서 통 짠 옷’)(cf. 19:23)이라고 했다. 이는 천재적 직관을 발휘한 그의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그의 통찰은 요한복음이 순서 배열 상 혼란스럽게 되어 있기에 위치를 변동시켜야 한다고 하는 불트만의 주장(소위 환치이론’)에 대한 전격적 반격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통 짠 옷이라면 왜 그런지 그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도올은 그 근거를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죄송한 얘기지만 그는 요한복음을 잘 모른다!!). 나는 이미 언급한 요한복음의 구조에 이어서 앞으로 일곱 상징코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해 요한복음이 얼마나 유기적 통일체로 이루어진 완벽한 논문(‘통 짠 옷’)인지를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상징코드와

유기적 통일체로의 완벽성

셋째, 도올은 요한복음을 여는 첫 장 첫 절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1:1에 나타난 로고스어휘에 대한 해설에 무려 40여 쪽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불트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불트만만 해도 나그 함마디’(Nag-Hamadi) 문서를 접하지 못했으며 당대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세계관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부족했다. 나는 요한복음을 영지주의라든가 반영지주의라든가 하는 틀 속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영지주의라는 전제로부터 요한복음을 근원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 헬라적 배경에 기초하여 로고스어휘를 설명하는 불트만(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다루겠다)을 비판한 도올은 정작 자신도 로고스개념을 불트만처럼 철저히 헬라적 배경에 기초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모순이요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헬라어로 된 로고스어휘를 사용하고 있지만(이는 70인역에서 빌려온 것임), 그것은 헬라적 의미가 아닌 철저히 히브리적 의미를 지닌 어휘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다루겠다). 최근에 요한복음 연구가들의 일반적 합의는 히브리적(구약적) 배경이 요한복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도올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70년대에 신학공부를 하면서 요한복음을 헬라적 배경 아래 기술했던 불트만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넷째, 도올은 종말론과 묵시론을 분리시켜 묵시론은 계시적 개념이고, 종말론은 시간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 요한은 천국과 회개를 묵시론적으로 해석했지만, 예수는 천국과 회개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 예수는 종말론자였지만 묵시론자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관심은 미래의 한 시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Here and Now)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그러나 도올은 지금 묵시문학이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서구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인 헬라적 이원론에 빠져 있다. 우선 종말론과 묵시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그래서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신화와 역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실이 낮의 햇빛에 바라면 역사이고, 밤의 달빛에 물들면 신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종말론은 햇빛처럼 드러난(현재) 역사이고, 묵시론은 달빛처럼 감추인(미래) 역사이다. 같은 역사를 단지 시각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똑같이 천국을 외친 세례 요한과 예수는 똑같이 종말론자이자 묵시론자이다.

 

종말론과 묵시론의 분리가 아닌

융합으로의 요한복음

묵시문학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적 성향을 띤 종말론적 사상이다. 즉 인간 왕이 통치하는 기존 질서(세상 나라)에 대해 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새 세상(하나님 나라)을 염원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어휘는 묵시문학적 개념이다. 주기도에 나오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간구가 바로 묵시문학적 개념이다. 즉 예수는 근본적으로 묵시론자였다. 입만 열면 국학을 해야 한다며 서구학문을 비판한 그가 서구신학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도올 또한 서양에 가서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구식 사고인 헬라적 이원론에 철저히 세례를 받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다섯째, 공자(주전 551-479)는 오직 인간과 삶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가 살았던 주전 6-5세기는 춘추전국시대로서 신분제도가 뚜렷했고, 오직 귀족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를 외치며, 사회적 신분이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가르쳤고,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그의 제자는 3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공자의 인간 평등주장은 가히 기존 질서를 뒤집는 혁명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같은 인간 평등주장은 인간 왕을 전제한 제한적인 평등이었다.

성경은 하나님 아래 모든 인간은 피조물이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어떤 인간 왕(가령, 다윗 왕)도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이자 죄인이며, 그런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하다는 것을 그 이면에 깔고 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더욱이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1:12-13)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왕 같은 존재라는 뜻)’ 개념을 넘어서는 최고의 혁명성’(이 세상의 모든 기준을 폐하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믿음을 기준 삼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논어)인간 평등이념은 예수(요한복음)에 나타난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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