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3)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약전승의 맥락에서 본 사복음서의 예수 기원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북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남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임을 살펴보았다. 결국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기원의 차이는 전승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이 양서의 근본적 차이는 요한복음이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인데 반해, 요한계시록은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전승의 문제는 저자의 문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이번호에서는 전승의 문제와 관련된 저자의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노파심에서 또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잔소리로 들리는 얘기들을 조금 길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저자 문제는 구원의 유무신앙의 강약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 문제를 다루는 목적은 그 문서 자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함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 따라서 저자 문제를 놓고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를 이단시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자세이다. 자신과 견해가 다를 경우 귀를 기울여 들어보고 맞다고 생각되면 인정하고, 틀리다고 생각되면 왜 틀리는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하면 된다. 그것이 성숙한 인격이고, 그런 사회가 열린 선진 사회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존에 가진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말하면 귀를 닫고 무조건 정치적으로는 빨갱이요, 종교적으로는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답답한 현실을 일상에서 흔히 경험한다.

죄송하지만 이와 관련된 필자의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 봄 일산에 있는 브래드 TV(대표 김종철) 방송국에 출연한 적이 있다. 나의 저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김 대표께서 나를 부른 것이다. 야심차게 방송 제작을 마치고 이를 내보냈는데 20분도 안 되어 거두어들이는 불상사가 났다. 양서의 저자가 다르다는 내 견해에 청취자들이 빗발치게 반대하면서 후원금을 끊겠다는 사람들의 성화에 그만 방송 송출을 중단했다. 또한 2020년에 쿰란출판사(대표 이형규 장로)에서 요한계시록을 출판할 때 몇몇 학자들이 양서의 저자가 다르다는 나의 견해에 대해 이 장로에게 출판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때 이 장로께서 공개토론의 장을 마련할 터이니 나와 달라고 하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둘째, 저자 문제는 전승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저자 문제를 중요시하는 것은 단지 그 문서를 작성한 정확한 저자가 누구냐에 있다기보다는 그 저자가 어떤 전승에 속한 사람인지를 살펴보고자 함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저자의 뿌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왕국 사람인가 아니면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북왕국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전승의 차이는 그 문서를 해석하는데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신구약성경 66권 가운데 저자 문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진정 바울서신’(Authentic Pauline Letters)에 속하는 7(, 고전, 고후, , , 살전, )뿐이고 나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복음서의 경우 원래의 시본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전부 저자 미상이다. 또한 묵시문학 시대(주전 200-주후 200)에 속하는 많은 문서들(구약 외경과 위경 및 신약문서)은 자신의 책의 권위를 위해 권위있는 신앙의 인물(가령, 모세, 이사야, 에녹, 다니엘, 바룩 등)을 차용하거나 자신의 문서의 보존을 위해 익명(가명)을 사용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셋째, 저자 문제에 관한 최근의 경향은 어떤 문서가 오랜 전승 과정과 편집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기에 한 사람 개인에 두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구약의 경우에는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모세오경은 모세, 시편은 다윗, 지혜문학은 솔로몬이 쓴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신약의 경우는 요한공동체, 바울공동체, 베드로공동체, 마태공동체, 히브리공동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장르상 묵시문서인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사적 비밀 문서적 성격이 짙기에 저자 문제는 그가 속한 전승과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핵심 문제이다. 가령 마가복음의 경우 그 문서 자체는 북왕국 갈릴리 전승에 속한 문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저자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북왕국 갈릴리와 관련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넷째, 기본상식의 중요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기본적으로 상식선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상식을 토대로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을 초상식이라고 한다. 반대로 상식 이하를 가리켜 몰상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신앙을 상식을 넘어서는 초상식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신앙과 계시의 이름으로 상식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신학이나 성경을 잘 모르는 일반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학자들마저 상식 이하의 억지와 강변을 늘어놓을 때에는 불쌍하다는 연민의 정과 더불어 서글퍼진다.

가령, 생존의 위협당하는 묵시 문학시대에는 자신의 신변 보호와 교회 및 문서 보존을 위해 실명이 아닌 익명(가명)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묵시 문서에 속하는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사도 요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약칭 애제자’)라는 익명(21:24)을 사용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요한’(1:4) 또는 나 요한’(22:8)이라는 실명 같은 익명’(가명)을 사용하고 있다. 설령 실명이라고 하더라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우리의 철수’)이기에 세베대의 아들을 적시하지 않으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요한이 누구인지 면밀하게 고찰해 보지 않고 무조건 사도 요한으로 규정짓는 것은 바른 연구 자세가 아니다.

또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가 속한 삶의 뿌리(고향이나 출신)와 그가 경험한 것을 통해 세계관(가치관)을 형성한다. 가령 갈릴리 사람들은 자연과 관련된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산 사람들이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도시와 관련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삶의 뿌리가 다르면 세계관(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나아가 그가 경험한 것, 즉 학문()을 통해 얻은 것(학문의 산물)과 경험(만남)을 통해 얻은 것(경험의 산물)은 전혀 다르다.

가령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다른 것은 역사적 예수와의 직접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예수와 만난 적이 없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가말리엘의 문하(5:34; 22:3)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 서신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산물이다. 이와 달리 베드로가 학자가 아니듯이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본래 학문 없는 사람(4:13)이다. 요한복음은 학문 없는 어부 출신이지만 예수의 최측근 제자로서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서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과 사귐이라는 독특한 경험과 더불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비롯한 초대교회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배운 경험의 산물이다. 이는 다음에 다룰 구약이나 외경(위경) 인용의 차이, 그리고 학문적(명사적) 언어와 경험적(동사적) 언어의 차이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종교)의 수도 예루살렘(남왕국)(지적, 사회적) 배경으로 한 사도 바울과 이방의 갈릴리(북왕국)(지적, 사회적) 배경으로 한 사도 요한은 근본적으로 세계관(가치관)이 다르다. 한 가지 예로써 바울서신에는 갈릴리(사마리아) 어휘가 전무한 데 반해, 요한복음에는 갈릴리 어휘가 가장 중요한 어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사람은 전승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험의 산물인 요한복음과는 달리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산물로서 저자는 공부를 많이 한 학자 출신에 속하는 인물이다.

 

2.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난 첫 수업 시간에 공부 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누구나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학문(공부)이란 한 마디로 차이점 발견하기이다. 차이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두 대상을 비교해야 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메리즘(merism)이라고 한다. 두 대상을 비교하게 되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차이점이다. 여기서 실력이 있다는 것은 그 차이점을 길게 말하지 말고 짧은 한 문장으로 말하는 능력이다. 가령,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은? 이스라엘 역사와 일반 역사의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점은? 신학자 바르트와 틸리히의 차이점은? 서양과 동양의 차이점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은? 등등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는 두 대상을 놓고 그 차이점을 가장 짧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점은? “한국인은 도(), 일본인은 힘()” 그 까닭은 이렇다. 도란 옳고 그름의 문제이고, 힘이란 강하고 약함의 문제이다. 한국인은 오랜 세월 선비의 붓으로 싸워 왔다. 반면에 일본인은 사무라이의 칼로 싸워 왔다. 선비 전통은 도에 의해 옳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분’(원리)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요 분열주의(당쟁)를 낳는다.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진 한국교회의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사무라이는 칼에 의해 강한 자에 서지 않으면 곧 죽음이다. 따라서 강한 자에 줄을 서는 실리’(이익)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무라이 전통은 집단주의요 획일주의를 낳는다. 일본의 군국주의(가미가제)나 평생직장 개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두 대상을 비교해 보아야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을 제대로 알려면 요한이라는 이름의 문학적 친척관계인 요한계시록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양서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인을 제대로 알려면 일본인과 비교해 보아야 하듯이, 구약 교수는 신약을 잘 알아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의 전공을 잘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부터 양서의 저자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을 통해 요한복음은 이 세상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천하제일지서라고 명명했고, 그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 세상에서 사도 요한을 나처럼 높여드린 사람도 없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이 일생을 통해 얻은 경험의 산물로서 배태된 명저라면, 요한복음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명저인 요한계시록은 일생을 학문에 몰두한 결과 탄생한 묵시적 예언자 요한의 작품으로, 그는 사도 요한과 더불어 불멸의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추앙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로서 가장 많이 거론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이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을 인용하면서(주후 155) 최초로 이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유세비우스(263-339)는 계시록의 사도적 기원을 의심하는 로마교회의 장로 가이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00-265년경)의 견해도 함께 언급함으로써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그런데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의 저자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역사비평학이 나타나기까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계시록의 사도 요한 저작설을 최초로 반대한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된 주후 2세기 말의 말시온(Marcion)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 저작설을 반대하는 체계적 논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이미 언급한 디오니시우스이다. 그는 세 가지 이유로 사도 요한의 저작권을 부정하였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다른 요한문헌과 신학적 차이가 있다. 셋째, 요한계시록의 헬라어와 복음서의 헬라어가 문체에 있어 차이가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렇다면 그(저자)가 틀림없이 요한이라고 불렸으며 그 책은 요한이라는 사람의 책이라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사도이며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이라는 것과 요한복음서와 공동서신이 그의 글이라는 데 대해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신학적으로는 19세기 이후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저자가 서로 다르다(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다)는 것이 거의 합의에 도달했다. 신약성서이해의 저자 키(H.C.K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오시시우스는 요한 문학의 어휘, 문체, 내용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정교하게 분석하여 오늘날의 비판적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사실상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요한계시록과 요한 2,3서는 복음서와 요한 일서를 쓴 사람과는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단지 어휘(문체)의 차이라는 한 측면만이 아니라 전승의 차이에 따른 양서의 신학적 차이를 비롯하여, 장르, 숫자, 구조, 구약 인용 또는 공관복음 전승과 외경(위경) 전승 인용의 차이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래야 양서의 저자가 왜 다른지를 설득력 있게 증명되는 것이다.

저자 문제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의 권위자 두 사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레고리 비일(G.K.Beale)이다. 그는 저자 문제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며, 저자가 사도 요한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의 신학이 같은 저자에게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의 신학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신학은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의 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비일의 견해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저자 문제는 무척 어려운 문제이지만 비일과 달리 이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다른 문서들과 달리 기독교 박해 시대에 묵시문학에 속하는 사적인 비밀문서적 성격이 강하기에 저자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속한다. 따라서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서 전체를 통해 문서의 정확한 저자를 밝혀내든지 아니면 그가 어떤 전승에 속한 인물인지를 밝힐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신학과 요한복음(요한서신)의 신학이 너무나도 다른 것은 전승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는 전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양서의 신학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양서가 장르상 묵시문학에 속하기에 저작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한 사람의 작품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장르상 묵시문서이기에 양서의 저작 목적은 일치한다. 즉 양서는 환난 중에도 배교하지 말고 신앙의 정절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세상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교회)의 승리”(16:33; 11:15) 때문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양서의 신학적 차이는 뚜렷하다. 이는 전승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피오렌자(E.S.Fiorenza)라는 여성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계시록의 저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언적-묵시적 학파에 속했다고 할 수 있으나 또한 그는 바울학파와 요한학파 전승들과도 가까웠다. 그것은 계시록에 나타난 바울적이고 요한적인 언어를 추적해보면 나타난다. 저자는 요한학파 전승보다 바울학파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계시록은 바울의 언어, 전승 및 형식에서 더욱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스스로를 바울전승계열로 이해했다는 것은 그가 그의 책에서 보여준 형식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양서는 근본적으로 전승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묵시학파에 그 뿌리를 둔 요한계시록은 요한복음(요한학파)보다 오히려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바울 전승, 공관복음 전승(특히 마태복음), 심지어 히브리서에 보다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남자에 사랑의 포로가 된 여인처럼, 그녀는 기존에 신약학자들이 쳐놓은 요한공동체’(요한학파)의 그물에 걸려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피오렌자가 계시록을 요한 학파보다 바울학파와 더 유사성을 보인다고 한 것은 양서를 요한공동체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안타까운 것은 양서가 전승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인지했지만 그 다름의 뿌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약 전승의 맥락이 아닌 주후 1세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찾고자 한 데 있다. 다른 하나는 계시록이 바울서신이나 히브리서나 마태복음에 더 가깝고 요한복음에 더 먼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전자는 학문의 산물’(학문공동체)에 속하는 문서인 데 반해, 후자는 경험의 산물’(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이나 초대교회 탄생과 박해의 경험 등)의 문서이기 때문이다.

양서의 저자 문제에 대해 먼저 총론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양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처럼 비슷한 성향의 탁월한 두 작품이 아니다. 음악으로 얘기하면 전혀 성향이 다른 세계 음악의 두 최고봉인 영원한 맞수(쌍벽) 모차르트(1756-1791)와 베토벤(1770-1827)에 비견된다. 또는 러시아 리얼리즘의 맞수인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와 톨스토이(1828-1910)에 비견된다. 민중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19세기라는 시간과 러시아라는 공간에서 살았지만 일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 전혀 색깔이 다른 세계 최고봉의 리얼리즘 문학을 이룩했다. 마찬가지로 성경문학의 두 최고봉인 영원한 맞수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전승과 성향이 전혀 다르기에 양서는 한 사람이 도저히 쓸 수 없는 인류 최고의 명저다.

사도 요한이 전능자와 같은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전혀 성격이 다른 두 불멸의 작품을 쓴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다. 마치 한 사람이 세계 최고의 음악가인 모차르트도 되고 베토벤도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인류 최고의 명저인 양서를 한 사람이 다 쓸 수 없다는 것이 양서를 연구한 필자의 결론이다.

필자가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일찍이 포로기 예언자 에스겔은 북왕국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남왕국 유다의 막대기가 연합하여 이룩된 하나의 통일 이스라엘을 고대했다(37:15-2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새 모세로서의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를 말하는 북왕국 전통(모세-예언자 전통)의 요한복음과 새 다윗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를 말하는 남왕국 전통(다윗-왕과 제사장 전통)의 요한계시록이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이룩하셨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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