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4)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저자의 차이는 두 측면, 즉 하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배경으로 한 전승의 차이이고, 또 하나는 경험의 산물과 학문의 산물의 차이라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 두 측면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나누어서 다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전자만 다루고, 후자는 다음 호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예루살렘갈릴리(사마리아)’ 용어 사용에 나타난 전승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양서가 전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우리가 조선족이나 탈북자의 억양(발음)을 들어보면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사기 126절에 보면 사사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 발음하는 쉽볼렛을 에브라임 사람에게 해 보라고 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 발음이 안 되어 십볼렛이라고 발음하자 그들을 모두 잡아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찬가지로 헬라어 원문에는 예루살렘용어가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히에로솔뤼마’(Ἱεροσόλυμα)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직 히에로솔뤼마’(Ἱεροσόλυμα) 용어만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3:12; 21:2,10)은 그 반대로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 용어만 사용하고, ‘히에로솔뤼마’(Ἱεροσόλυμα) 용어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히브리서(12:22)는 요한계시록처럼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남왕국 전승이 분명한 히브리서의 히에루살렘용어를 통해 히에로솔뤼마용어는 북부 방언(사투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히에로솔뤼마용어를 사용하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북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이고, ‘히에루살렘용어를 사용하는 요한계시록과 히브리서는 남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전승의 차이는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갈릴리또는 사마리아용어 사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가복음의 갈릴리 강조는 공생애의 시작을 갈릴리에 두는 것으로부터(1:14) 시작하여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뵐 곳도 갈릴리(14:28; 16:7)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요한복음의 갈릴리 강조는 5중 하강 구조를 통한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고, 갈릴리 용어를 의도적인 숫자상징(17, 십자가 숫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북왕국 전승에서 그토록 중요시되는 갈릴리사마리아용어가 남왕국 전승에 속한 요한계시록이나 히브리서(바울서신 포함)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삶의 자리’(전승)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둘째, 저자의 정체성과 관련된 용어들, 제자’, ‘’(콜포스), ‘진리용어의 사용 문제이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동일 저자(세베대의 아들 요한, 사도 요한)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곧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 문제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13:23; 21:24)라고 규정하면서 제자용어를 무려 78회나 사용한다. 즉 요한복음의 저자는 제자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제자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예언자’(1:1-3; 22:6-9)로 규정한다. 반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예언자로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

 

제자의 정체성과

예언자의 정체성

제자로서의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콜포스)에 안긴 사람이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2(1:18; 13;23) 나타나는 이 용어는 요한복음 이해의 열쇠가 되는 용어이다. ‘보아너게’(3:17)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도 과격하고 불 같은 성격의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사랑의 사도호칭을 얻게 된 것은 콜포스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사랑의 복음서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동사 사랑하다’(ἀγαπω, 44, 4; φιλέω, 13, 2), 명사 사랑’(ἀγπη, 7, 2) 용어를 다른 문서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은 재앙 기사(6-20)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의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요한복음의 저자는 공관복음 저자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진리(ἀλθεια)’ (1, 3, 3) 용어를 의도적인 숫자인 25회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와 관련된 참된’(진실한) 용어ληθς)14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요한복음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이들 용어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은 진실로 진실로’(Ἀμήν μήν) 용어를 진리용어와 똑같이 25회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 저자의 깊은 의도가 깔려 있다. 북왕국 전승이 강조하는 모세에 대한 새 모세 예수를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숫자 25숫자 5’(모세오경을 뜻함)를 곱한 수(5×5=25)로써, 이는 모세(5)×모세(5)=새 모세(25)를 의미한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요한복음이 공히 25회 사용하고 있는 진리용어와 이중언어인 진실로 진실로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승의 차이는 명백하다.

 

2. ‘바다’()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북왕국에는 갈릴리 바다가 있다. 반면에 남왕국에는 바다가 없다. 따라서 바다’()에 대한 북왕국과 남왕국의 시각은 긍정과 부정으로 분명하게 엇갈린다. 히브리 전통에서 바다’()는 대체로 혼돈과 죽음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요한계시록에서 바다용어는 거의 부정적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짐승이 바다로부터 올라옴(13:1),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17:1), 전쟁을 위해 군인들을 나르고 변방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작물과 사치품을 실어 나르는 통로(향락과 착취의 도구)인 바다(18:10-20), 새 예루살렘에서는 혼돈의 세력의 상징인 바다가 없어짐(21;1).

반면에 바다에 친숙했던 요한복음 저자는 바다용어를 긍정적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있어서 갈릴리 바다는 그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래서 그는 갈릴리 바다를 지극히 사랑했다. 갈릴리 바다는 그가 처음 예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던 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그러기에 그는 바다’(또는 ’)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혼돈의 세력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오병이어 표적(6)이나 큰물고기 153표적(21)이 모두 갈릴리 바닷가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제자도의 압권이요 백미인 큰물고기 153표적에 담긴 의미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얼마나 바다(물고기)에 친숙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신약성경에 20회 나오는 비교적 큰 물고기인 익투스’(ΙΧΘΥΣ) 용어를 3(21:6,8,11), 다른 신약문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작은 생선인 옵사리온’(ὀψάριον) 용어를 5(6:9,11; 21:9,10,13)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갈릴리 어부로서의 자신의 출신 배경을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더욱이 그는 북왕국 갈릴리 어부 출신답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20:31)익투스에 담아놓았다. 익투스(ΙΧΘΥΣ) 용어는 예수(Ι)께서 그리스도(Χ)요 하나님(Θ)의 아들(Υ)이시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구주(Σ)가 되신다는 뜻이다. 이는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에 물고기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거나 바울서신에서 딱 1(고전 15:39) 나오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갈릴리 바다나 어부 출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에서 바다는 구체적으로 갈릴리 바다를 지칭하는 데 반해, 요한계시록에서 바다일반적인 바다를 말할 뿐이다. 이는 계시록의 저자가 기본적으로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 출신으로서 갈릴리 바다와 아무 관계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바다에 대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서로 다른 이미지

 

3. ‘성전’(성막)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북왕국 전승과 남왕국 전승을 구별짓는 결정적 단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시각차에 있다.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북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반 성전 신학을 갖고 있고, 남왕국 전통에 속하는 계시록은 기본적으로 성전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상식선에서 요한복음의 저자와 계시록의 저자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피오렌자는 양서에 나타난 성전 개념의 근본적 차이를 통해 양서가 전승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요한복음을 깊이 연구해 보면 북왕국 전통의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 요한은 기본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체제와 관련된 제사장적 언어와 지식에 대해 세세한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반면에 남왕국 전통에 뿌리를 둔 계시록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체제와 관련된 제사장적 언어와 지식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예언자 에스겔에게 보여준 새 성전 비전(40-48)을 통한 기존의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넘어선 여호와 삼마’(48:35), 도성으로서의 예루살렘을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 적용하는 신학적 통찰까지 보여주고 있다(21).

어떤 역사가가 자신이 쓴 A라는 저서에서 유심사관을 말했는데, 그 다음 B라는 저서에서 유물사관을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역사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믿을 수 없은 엉터리 역사가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한 신학자가 A라는 저서에서는 반 성전 신학을 말하고, B라는 저서에서는 성전 신학을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신학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믿을 수 없는 엉터리 신학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 성전을 기반으로 한 남왕국 전통은 성전에 대해 호의적(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반면, 북왕국 전통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비판적(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전승적 측면에서 북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복음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2:19)라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성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삶의 구심점인 성전 체제에 도전한 것은 그들의 존재 기반의 근본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그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체제전복 행위로 간주되었다. 성전 정화 사건이 공생애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는 공관복음(11:15-17과 평행본문)과 달리 요한복음은 공생애 초기(본론의 첫 장)에 이 사건을 배치했는데, 이는 이 사건의 중요성(부활과 관련)에 따른 신학적 의도 때문으로 풀이된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기사에는 성전에 대한 두 왕국의 기나긴 알력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말씀,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12:5,11,14,18,21)을 예루살렘으로 보았다. 특히 예루살렘을 제의의 중심으로 집중시킨 요시야 왕의 개혁(주전 621) 이래로 유대인들의 유일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처음 단을 쌓았던 세겜(12:6 이하) 근처에 있는 그리심 산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예배 장소라고 주장하였다.

424절은 이 대화의 절정인 동시에 예배와 관련된 혁명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Πνευ ̑μα θεός). 이 대목에서 영(프뉴마)을 강조하고자 맨 앞에 두고 있다. (프뉴마)은 바람처럼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어디에나 편만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예배는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와서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리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 참 예배이다.

이 말씀은 장소적 개념인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예배관을 뒤집어엎는 혁파’(breakthrough)가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은 예수의 종교는 성령과 진리(말씀, 기도, 은혜, 마음, 인격)의 종교임을 선언하는 혁명적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요한복음 4장 기사는 북왕국 전통이 갖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시각, 즉 남왕국 전통이 갖고 있는 성전에 대한 호의적(긍정적) 시각과 다른, 비판적(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는 요한이 얼마나 모세(북왕국)의 성막 전승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가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요한복음의 축도라 할 수 있는 로고스 찬가(1:1-18)새 성막으로 오신 예수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예수는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 땅에 새 성막으로 오셨다. 지상 성전인 성막은 천상 성전의 축소판(축도)이다. 7회 사용된 용어(1:4-9)는 성막의 등잔대(메노라)를 상징한다(‘다윗의 별이 남왕국의 대표적 상징물이라면, ‘이방의 빛으로서의 메노라는 북왕국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등잔대가 없는 성막 안은 캄캄한 어둠(죽음)이듯이, 빛이신 예수 없는 세상은 캄캄한 어둠(죽음)이다.

또한 거하시매’(1:14)성막에 거주했다’(tabernacled)라는 의미를 가진다. 성육신하신 예수는 하늘의 왕좌를 지상의 지성소로 가져와 그 안에 좌정하신 영광의 왕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중보)하는 예언자이자 성막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로고스찬가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삼중직(예언자, 제사장, )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다(1:41; 4:25). 이렇듯 요한복음은 철저히 출애굽기(25-40)성막 전승’(모세와 북왕국 전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예배 장소로서의 교회의 전신인 성전과 그 안에서의 예배로 가득 찬 책이다. 계시록 전체에 퍼져 있는 성전용어와 예배용어 및 그와 관련된 보좌용어를 살펴보면 계시록이 얼마나 남왕국 전통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긍정적 시각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이 성전과의 단절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계시록은 성전의 계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고 하겠다.

요한복음에서의 성전은 구체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한다. 반면에 계시록에서의 성전은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을 구체적으로 지칭한 적이 없다(이미 파괴된 상황). 계시록에 나오는 성전 용어를 보면 하나님의 성전’(3:12; 11:1) 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11:19; 14:17),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15:5) 등 철저히 천상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계시록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 즉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주권(왕 되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예배와 찬미이다. 하나님의 주권 주제와 더불어 예배라는 주제는 계시록의 핵심 주제이다. 최근에 신약학자들은 계시록에서 예배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예배와 관련된 용어들과 이미지들이 계시록에 매우 풍성하다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계시록에서 예배드리다라는 헬라어 동사(προσκυνέω)는 모두 24회 나타나는데, 이는 신약 전체(60)에 나오는 이 동사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피조물이 주권자 되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계시록 410절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상의 예배에서 예배자들은 새 노래를 어린양에게 부르며(5:9-10), 예배와 관련된 용어들, 찬양드리다”(19:5), “감사드리다”(7:12), “영화롭게 하다”(15:4), “아멘”(7:12; 19:4), 그리고 할렐루야”(19:1,3,4,6)가 예배 상황에서 빈번하게 사용된다. 더욱이 예배광경이 계시록에는 풍성하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7(1:4-8/ 4:1-5:14/ 7:9-17/ 11:15-19/ 14:1-5/ 15:1-8/ 19:1-10)에 걸쳐 등장하는 영광송(송영) 장면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할렐루야용어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왕국 유다의 대표적인 전승인 시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영광송(송영)을 찾아볼 수 없다.

성전/성막은 이스라엘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니얼 헤이즈(J. Daniel Hays)는 성경에서 상당히 많은 용어가 성전과 성막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고 하면서 이 용어들은 기본적으로 몇 가지 중복되는 의미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성전과 성막에 대한 신약성경의 단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전에 대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이미지

 

그리스어 단어

일차 지시대상

영어번역(NIV)

기본 강조점

대표 성구

히에론(Hieron)

성전

성전, 성전 뜰

하나님의 처소,

제사드리는 곳

4:5; 26:55

나오스(Naos)

성전

성전

하나님의 처소, 제사드리는 곳

27:51;

1:21

오이코스(Oikos)

성전

하나님의 처소

2:16;

7:47

하기오스(Hagios)

성전 혹은 성막

성소

거룩한 곳

9:1,24

스케네(Skēnē)

성막

상막

하나님의

이동식 처소

9:2,8

 

성전과 성막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이 용어들(그리스어, 특히 히브리어)은 서로 연관된 네 가지 개념을 나타낸다. (1) 성전/성막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그의 임재를 강조한다. (2) 성전/성막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장소이며, 그의 능력과 그의 주권을 강조한다. (3) 성전/성막은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에 거룩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한다. (4) 성전/성막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예배할 수 있는 장소다. 이상의 서로 연관된 네 가지 요소-임재, 능력, 거룩함, 예배-는 항상 하나님을 그의 백성 가운데(그곳이 성막이든 성전이든 간에) 거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성경 본문에서 사용되며, 서로 연관된 네 가지는 성경의 성전/성막 이야기를 주도해나가는 대표적인 주제다.

요한복음은 성전용어를 둘로 나누어 사용한다. 전체 성전 복합체(temple)를 말할 때는 히에론’(ἱερον)을 사용하고, 성소(sanctuary)를 말할 때는 나오스’(ναóς)를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히에론으로서의 성전은 13(2:14,15; 5:14; 7:14,28,32,45; 8:2,20,59; 10:23; 11:56; 18:20) 나타나고, ‘나오스로서의 성소(성전)3회 나타난다. 그런데 3(2:19,20,21) 나타나는 성소로서의 성전이 모두 2장의 성전정화사건에서만 나타나고 그 이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요한복음 저자가 성전을 말할 때는 기본적으로 전체 성전 복합체인 히에론으로서의 성전을 말한다. 이에 반해 계시록에서는 오직 나오스로서의 성소(성전)16(3:12; 7:15; 11:1,2,19[2]; 14:15,17; 15:5,6,8[2]; 16:1,17; 21:22[2]) 나타나고, ‘히에론으로서의 성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즉 계시록의 저자가 말하는 성전은 나오스로서의 성소(성전)를 말한다. 성전에 대해 양서의 용어 사용의 차이점은 양서의 저자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실례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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