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2)

-‘삶의 자리에 따른 구약 전승의 맥락의 중요성 -

나는 그동안 요한 르네상스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서에 집중하여 글을 썼다. 그런데 요한 르네상스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축인 요한계시록과 관련되어 있다(요한서신은 논외).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만이 아닌 신약문서 전체(27)와 관련된 구약 전승’(삶의 자리)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신구약성경을 둘이 아닌 한 권의 책’(5:39)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는 통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문서 전체는 주후 1세기 이후에 산출된 문서이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거의 신약문서 연구의 출발점을 주후 1세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신약문서가 주후 1세기에 산출된 문서이지만 그 문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개개의 신약문서의 뿌리가 되는 기나긴 구약 전승의 맥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외람된 얘기지만 지금까지 신약학자들의 신약문서 연구의 피상성과 빗나감, 나아가 서구신학이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방향으로 흐른 것은 구약전승의 맥락에 따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떠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가령,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 탄생 기사(2; 누가 1-2)와 족보(1, 3)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이것들이 없는가?” 또한 복음서가 왜 4권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신약학자들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신약학자를 나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신약문서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은 구약 전승의 맥락(그 문서의 삶의 자리)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신약학자들이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경험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선교사로 있던 201210월경, 7년 반 동안의 요한복음 연구 끝에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상해(上海)에 있는 후배 선교사(정선기)가 요한복음을 강의해 달라고 부탁이 왔다. 그래서 20135월경, 상해에 가서 요한복음을 강의하게 되었다. 첫날 오후 2시부터 3시간 강의를 한 후에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합동측 목사 출신인 선교사가 배석했다.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내가 복음서가 4권인 까닭은 모세의 책이 4권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던 이 친구가 갑자기 안색이 바뀌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은 이런 뜻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친구는 듣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결국 불편하게 식사를 끝내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도 강의가 계속되는데, 이 친구가 나오지 않으면 나는 그 친구에게 이단으로 낙인찍힐 것이 뻔했다. ‘모세오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세의 책이 다섯 권인데, 내가 4권이라는 말을 했으니 이단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나는 밤새 이 친구가 내일 나와야 할 텐테하며 마음 졸이며 다음날 강의를 준비했다. 다행히도 그 친구가 다음날도 강의를 들으러 나왔다. 나는 이단은 면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갖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이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불트만의 요한복음연구와 내 저서 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했다. 불트만의 책은 New-telling(새로 말하기, 자기 생각을 성경 속에 집어넣어 새로운 신학을 말한 것)이고, 내 책은 Re-telling(다시 말하기, 내 생각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그 당시 상황과 결부시켜 해석한 후에 오늘의 독자에게 쉽게 다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복음서가 4권인 까닭을 설명했다.

먼저 동숭교회를 다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의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후에 허석구 목사, 몽골 선교사)복음서가 4권인 까닭은 예수님을 전후좌우 4면에서 입체적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기에 4권으로 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또한 조철수 교수(고대근동학)는 복음서가 4권인 까닭은 복음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4권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분들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견해는 신약과 구약의 관련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성경 속에 집어넣어 해석한 것이다(New-telling).

나는 복음서가 4권인 까닭은 신약의 예수(새 모세)와 짝을 이루는 구약의 모세의 책이 4권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모세 이야기4(-)에 기록되어 있기에(창세기는 모세 이전 이야기’), 초대교회 신약 편집자들이 구약에 기초하여 모세(유대교)의 성취자(새 모세)로서의 예수님 이야기4권으로 확정지은 것이다. 나는 이를 도표로 그려 보여주었다.

 

2. ‘모세와 새 모세 예수에 대한 위의 도표는 신구약성경을 토막신학이 아닌 통전신학으로 읽고 해석해야 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를 제공한다. 생화(生花)와 조화(造花)의 차이는 뿌리의 유무(有無)이다. 생화는 뿌리가 있지만 조화는 뿌리가 없다. 그래서 생화는 살아있는 꽃이고, 조화는 죽은 꽃이다. 이를 신구약성경으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신약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구약성서)로 인해 살아있는 꽃이 된다. 그 뿌리가 없으면 신약성경은 죽은 조화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뿌리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가 tradition(‘전승또는 전통’)이다.

성경의 문서(저자)를 논할 때 우리는 그 문서(저자)가 어떤 배경과 전통(전승)에 서 있는가를 먼저 철저히 고려해야 한다. 가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언자로 소명하여 쓰고자 할 때 그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그 사람의 삶의 정황’, 즉 그 사람의 뿌리인 개인적(출신) 배경과 지역적(환경적) 배경, 그가 배운 지적(학문적) 배경, 그리고 그가 속한 시대적 배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모든 삶의 정황과 무관하게 예언자를 소명하여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우리가 예언자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그가 북왕국 이스라엘출신 예언자인가 아니면 남왕국 유다출신의 예언자인가를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의 뿌리인 삶의 정황때문이다.

가령, 주전 8세기 예언자인 호세아와 아모스를 비교해 보자. 호세아는 토종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의 예언자이다. 반면에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베들레헴에서 10km 남쪽에 위치한 드고아 출신이다. 호세아와 아모스는 거의 같은 시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둘 다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호세아는 어머니의 가슴으로 헤세드’(인자, 사랑)를 강조한 사랑의 예언자라고 불리고, 아모스는 아버지의 머리로 미쉬파트’(정의, 공의)를 강조한 정의의 예언자로 불린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두 예언자의 삶의 자리, 즉 전승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승의 차이’, 삶의 자리의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언급한 학자는 소위 양식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궁켈(H. Gunkel, 1862-1932)이다. 그는 특정 장르를 낳았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중요하다고 보면서 이를 시편 연구에 적용하였다. 마찬가지로 신약문서 연구에 있어서 삶의 자리에 따른 구약 전승의 맥락을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약 전승의 맥락을 간단히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통일왕국의 정치, 사회, 종교의 중심지로 삼은 이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으면서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 난 후(주전 922) 그 동안에 누적된 사회적 불만이 폭발하면서 이스라엘은 둘로 나누어진다. 유다 지파(나중에 베냐민 지파가 가세)를 중심으로 한 남왕국 유다10지파를 중심으로 한 북왕국 이스라엘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출현하기 전까지 이 두 왕국은 무려 1천 년의 세월 동안 상당히 다른 세계관(가치관)을 형성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갈릴리(바다)를 중심으로 한 모세(예언자) 전통을 이어왔고, 남왕국 유다는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한 다윗(왕과 제사장) 전통을 계승하였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철조망만 없을 뿐 두 왕국은 마치 1천 년 동안 남한의 서울 사람과 북한의 평양 사람으로 나누어져 다른 세계관(가치관)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기에 신약성서의 각 문서를 말할 때 이 문서의 삶의 자리가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인가 아니면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문제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갈릴리와

남왕국 예루살렘의 서로 다른 전승

3. 이를 사복음서의 예수 전승의 문제에 적용해 보자. 예수의 공생애는 북왕국에 속하는 갈릴리에서 시작했지만(1:14-15; 4:12-22; 4:14-44)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고, 그 후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으로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다(1-5). 즉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왕국 전승이 기독교회의 주류가 된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을 편집할 때 북왕국 전승인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을 뒤로 하고, 마태복음을 맨 앞에 세운 것은 구약 예언 전승의 성취(유다 땅, 다윗의 후손, 11:1; 5:2; 34:23, 9:9 )에 주류인 남왕국 전승의 마태복음이 적합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사도 바울도 남왕국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실례로 바울 서신(13)에는 갈릴리사마리아라는 어휘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거칠게 분류하면 신약문서 27권 가운데 두 권(‘요한복음마가복음’)만 북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이고, 나머지 25권은 기본적으로 남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기원의 문제에서 왜 마태와 누가는 예수 탄생 기사와 족보를 말하고 있는데 반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것이 없는가?” 하는 것은 이 같은 전승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북왕국 전승에 서 있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여기서 문제는 그 신약문서가 남왕국 전승인가 북왕국 전승인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문서에 나타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 가령 대조되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모세와 다윗, 바다와 성전 등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다와 성전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고 여기서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모세와 다윗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갈릴리(북왕국)와 예루살렘(남왕국) 어휘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말 성경에 예루살렘어휘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두 가지로 나타난다.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히에로솔뤼마’(Ἱεροσόλυμα)가 그것이다. 여기서 후자 어휘(‘히에로솔뤼마’)예루살렘에 대한 사투리(북부 방언)로 볼 수 있다 (cf. 12:6). 마가와 요한은 히에루살렘어휘는 일체 사용하지 않고 히에로솔루마어휘만 각각 10회와 12회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마가에 의존하고 있는 마태와 누가는 두 어휘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히에루살렘어휘에 대해서는 마태 2, 누가 27, 행전 37회 나타난다. 그리고 히에로솔뤼마어휘는 마태 11, 누가 4, 행전 22회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마가와 요한과는 정반대로 히에로솔뤼마어휘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히에루살렘어휘만 3회 사용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요한복음(북왕국)과 요한계시록(남왕국)은 전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이어서 갈릴리어휘를 살펴보자.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한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수난 기사 중에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14:28)는 말씀과 부활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다시 언급(16:7)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가에서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뵐 곳은 갈릴리이다. 이는 꽤 기이하고 묘한 서술이다.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의하면 부활자는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만 나타난다(24, 1:4). 부활자의 갈릴리 현현을 전하는 것은 마가가 처음이다. 이는 갈릴리에 대한 마가의 깊은 관심을 시사한다. 이미 자세히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은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를 보여주는 ‘5중하강구조’, 특히 암호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숫자 17(십자가 의미)갈릴리 어휘’(17)에 사용하여 갈릴리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갈릴리어휘가 마태(28, 1,068) 16, 마가(16, 661) 12, 누가(24, 1,149) 13, 요한(21, 879) 17회 사용되고 있다.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마가와 요한이 마태와 누가보다 절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용 빈도수가 높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남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은 갈릴리나 사마리아 어휘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예루살렘 어휘만 아주 중요한 곳에서 3(3:12; 21:2, 10)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한편, 모세(북왕국) 어휘와 다윗(남왕국) 어휘를 살펴보자.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모세어휘(7, 8, 10, 13, 19, 1)를 남왕국 전통에 속하는 다윗어휘(17, 7, 13, 2, 11, 3)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상대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모세 어휘보다 다윗 어휘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음). 더욱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에서 다윗어휘는 삽입구처럼 딱 한 절(7:42)에서 나타나며, 예루살렘 입성 때 당연히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21:9; 11:10; 19:38)가 아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이스라엘 왕이시여”(12:13)로 되어 있는 것으로도 다윗을 얼마나 기피하는가를 알 수 있다.

반면에 남왕국 전통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은 모세를 기피하여 그 많은 출애굽 재앙(심판) 기사를 말하면서도(8-16) 모세 언급은 일체 피하고, 딱 한 절(15:3)에서 삽입구처럼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남왕국의 상징인 다윗(דוד)과 관련된 ’(다윗의 별) 어휘를 정확히 14(4+6+4, 다윗의 세 알파벳 숫자) 사용하는 것으로도 철저히 남왕국 전승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삶의 자리’(삶의 뿌리)는 곧 족보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특히 구약성경은 전승의 뿌리가 되는 족보(תולדות)의 책이라고 할 만큼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타낙(TaNaK)의 첫 책인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끝 책인 역대기하(cf. 23:35)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은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창세기 전체는 10(원역사와 족장사에 각각 5개씩 나타남)톨레도트(족보) 구조로 되어 있다.

족보의 중요성은 구약 연구만이 아니라 신약 연구에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는 반면, 마가와 요한은 이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승의 차이에 기인한다. ‘남왕국 유다 전승에 속하는 마태와 누가는 당연히 다윗 왕의 족보와 예수 탄생 기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북왕국 이스라엘 전승에 속하는 마가와 요한은 유다 지파에 속하는 예수 탄생과 다윗 왕의 족보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마가는 예수 탄생과 관련된 다윗(유다 지파) 왕의 족보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예수께서 나이 30세에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심지어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를 아예 땅에서 나심’(유다 지파 다윗 왕의 후손)이 아닌 하늘에서 오심’(성육신)으로 언급하는 초극성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사복음서의 예수 기원의 문제는 메시아는 어떻게 오느냐?”의 문제인데,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두 전승으로 나누어짐을 엿볼 수 있다.삶의 자리가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마태와 누가는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혈통 가운데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인간예수(후에 하늘로 승귀하는 양자 기독론)를 그리고 있다. 반면에 삶의 자리가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마가와 요한은 오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즉 마가는 갈릴리에 오신 예수, 요한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예수를 그리고 있다. 특히 요한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강하는 성육신(로고스) 기독론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사복음서의 완성적 의미를 갖는다.

남왕국 전승에 속한 마태와 누가는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족보와 함께 예수 탄생 기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비주류인 북왕국 전승과 비교할 때 주류 남왕국 전승의 자랑이기도 하다. 반면에 북왕국 전승에 서 있는 마가와 요한은 족보나 예수 탄생 기사를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는 예수 탄생 기사를 빼고 공생애로부터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고,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시작되었다(1:14-15)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북왕국 전승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요한은 달랐다. 유대 땅 다윗의 혈통을 지닌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예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랑거리인 족보를 지닌 예수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1:1,14)를 그림으로써 시간이 아닌 영원의 차원, 땅이 아닌 하늘의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같은 북왕국 전승인 마가뿐만 아니라 남왕국 전승인 마태와 누가를 초극(초월)하는 대반전(역전) 드라마를 썼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말하면 땅에 속한 유한한 족보를 자랑하지 말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시민임을 자랑하고(3:20),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자랑거리를 폐하고 오직 주를 자랑하라(고전 1:26-31)는 영원한 진리(메시지), ‘복음 중의 복음’(3:16)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진리(사상)의 종언을 고한 책이다. 결국 사복음서의 예수 기원의 문제는 북왕국 전승인 마가복음에서 시작하여(), 남왕국 전승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거쳐(), 북왕국 전승인 요한복음에서 마침표를 찍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마가복음(북왕국) () 마태복음, 누가복음(남왕국) () 요한복음 합()”

 

결국 사복음서는 예언자 에스겔이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된 두 민족(나라)의 통일을 염원한 것처럼(37:15-23),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새 다윗의 나라를 꿈꾼 남왕국 전승(마태와 누가)새 모세의 나라를 꿈꾼 북왕국 전승(마가와 요한)을 가로와 세로로 엮어(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하나님 나라를 이룸(1:10)을 보여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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