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5)

1.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경험의 산물로서의 요한복음학문의 산물로서의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학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살펴보자.

school(학교)의 어원인 라틴어 스콜라’(schola)는 고대 그리스어 스콜레(σχολή)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이 말은 여가, 휴식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여가나 휴식 시간에 강의, 토론, 논쟁을 즐겼다. 이로 인해 스콜레라는 단어가 강의, 토론, 논쟁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나중에 강의가 이루어지는 학교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스콜레의 동사 스콜라조’(σχολζω)시간, 여유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으면 학문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매인 서민들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학문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학자라고 할 때 학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뿐만 아니라 책을 사서 볼 수 있는 경제적 여건,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언어 훈련을 비롯한 학구적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책을 얻을 수 있고 학문을 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신분(계급) 사회인 고대에서는 귀족이나 사대부와 같은 대대로 내려오는 학자 집안이 아닌 경우 학자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에 논어한 권의 책값이 1필 반, 대학이나 중용의 책값은 3-4필이나 되었다. 1필이 쌀 7말이라고 할 때 서민들로서는 거의 책을 사볼 수 없었다. 사대부 양반들이나 책을 사보는 사회구조였다. 또한 책이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한문 실력을 갖추지 않고는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중세 시대에 성경 한 권의 값은 집 한 채(오늘날의 약 3억 원) 값이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성경책을 사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일반인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제가 들려주는 말을 그냥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서둘러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고자 한 까닭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창세기 서두에 에덴동산 이야기가 나온다(2-3). 그리고 에스겔서(28:13; 31:9,16,18; 36:35)에서 다시 에덴동산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창세기와 에스겔서 사이, 긴 세월 동안 에덴동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포로기 예언자인 에스겔 이후에는 제2 이사야(51:3)와 요엘(2:3)에서만 각각 1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아닌 에덴 전승을 아무나 소유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에덴 전승은 오직 대대로 내려오는 주류 제사장 그룹(사독계)이 소유하고 있다가 사독 제사장의 후손인 에스겔(1:3; 40:46)에게 전승되어 내려왔음을 시사한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어릴 적 유대교 회당에서 타낙(TaNaKh, 우리의 구약성경)을 듣거나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제사장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료나 전승을 소유할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런데 학문 없는 범인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요한복음 같은 전무후무한 명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최고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보고 듣고 배운 경험(세례 요한도 포함될 수 있음, 1:35-37)과 성령강림 체험이나 수많은 초대교회 상황에서 배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경험의 산물). 그래서 뮬(C.F.D. Moule)은 바울이 왕성한 지성을 가진 천재라면, 요한은 통찰력을 지닌 천재라고 말하였다. 오랜 세월 학문을 통해 이룩된 천재성과 오랜 세월 수많은 경험을 이룩된 천재성은 다르다. 요한의 천재성은 학교에서 배운 학문적 천재성이 아니다. 최고의 스승 예수로부터 직접 배운 하늘의 지혜와 오랜 기간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령이 계시해 주신 삶의 지혜와 통찰에서 나온 천재성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할 때 학문에 몰두하여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소위 학문에 정통한 학자는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 없는 범인’(4:13)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학자가 아니다. 반면에 요한신학의 권위자인 보캄(R. Bauckham)이 말한 대로 계시록의 저자는 굉장한 학문을 지닌 바울 사도에 버금가는 대학자였다(학문의 산물). 계시록의 저자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인가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보캄(R. Bauckham),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바울 사도에 버금가는

대학자

2. 첫째, 구약전승의 사용 문제이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요한복음은 많지는 않지만 직접 인용 방식을 택한다. 이에 반해 계시록은 한 번도 직접 인용 없이 전부가 간접 인용 방식을 택하고 있다. 계시록에 구약에 대한 간접 인용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250회에서 1,000회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계시록 전체가 형식적으로는 직접 인용이 없을지라도 구약 예언에 대한 암시들로 흠뻑 젖어 있음을 시사한다. 계시록의 저자는 대학자답게 구약 성경을 완전히 소화해서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양서의 결정적인 차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 요한은 유대교 회당에서 타낙(TaNaKh)을 듣고 읽고 배운 것이 학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구약 본문을 17(1:23; 2:17; 6:31,45; 7:42; 10:34; 12:13,15,38,40; 13:18; 15:25; 19:24,28,29,36,37) 인용하는데, 직접 인용 방식을 택하고 있다. 1236절까지는 기록된 바……과 같더라(καθς γεγραμμένον)’의 형태로 인용(2:17; 6:31,45; 10:34; 12:14; 비교 1:23; 7:38; 7:42)하고 있고, 1237절 이하부터는 말씀(구약성경)을 응하게 하여 함이라(ίνα πληρωθη ̑)’ 형태로 인용(12:38; 15:25; 17:12; 19:24; 19:36) 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 인용에 있어서 70인역(LXX)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도 시편(성문서의 대표)과 이사야(예언서의 대표)가 대부분이고, 스가랴, 출애굽기, 신명기 정도를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계시록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에스겔서나 다니엘서는 찾아볼 수 없다.

UBSGNT(연합성서공회 헬라어신약성경)에 나타난 암시와 인용의 색인에서 계시록은 다른 신약문서보다 구약 인용을 더 많이 하고 있다. 로마서, 마태복음, 히브리서 및 계시록에 대한 인용과 암시의 총계는 다음과 같다. 로마서(오경 60, 33, 28, 8, 3, 단 없음, 소선지서 9), 마태복음(오경 99, 37, 44, 13, 12, 22, 소선지서 41), 히브리서(오경 128, 39, 15, 6, 3, 2, 소선지서 4), 계시록(오경 82, 97, 122, 48, 83, 74, 소선지서 73).

이 통계에서 로마서, 마태복음, 히브리서에서 가장 많은 인용 횟수는 오경이고(특히 히브리서), 그 다음이 시편과 이사야서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다니엘서는 매우 적다. 이와 대조적으로 계시록의 그래프는 거의 반대다. 양끝(토라와 성문서)보다는 가운데(예언서)가 높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계시록의 구약성경 선택은 실제적으로 로마서, 마태복음, 히브리서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토라가 아니라 예언서이다. 이는 구약 인용에 있어서 요한복음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계시록의 저자가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모이스(S. Moyise)는 계시록에서 에스겔서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면서, 에스겔서의 중요한 다섯 구획(1; 9-10; 16-23; 26-27; 37-48)이 계시록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탐구하였다. 계시록의 전체 틀이 에스겔서의 구조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계시록은 2의 에스겔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그레고리 비일(G. Beale)은 계시록에서 다니엘서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말한다. 1:4-20과 단 7:9-28 간의 병행 목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4-5장과 단 7장의 주제적 상응성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둘째, 신약 전승(공관복음 전승과 바울 전승)의 사용 문제이다. 얼핏 보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다. 요한복음은 92%가 고유 기사이고, 8%만 공통 내용이다(가령, 오병이어 표적사건이나 성전정화사건 등). 그런데 그 8%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내용과 주장하는 바가 상당히 다르다. 쉽게 말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같은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저자(사도 요한)가 복음서를 쓰면서도 공관복음 전승을 몰랐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보캄은 계시록이 인용하고 있는 전승 중에서 분리할 수 없는로기아(logia, 말씀)를 두 범주로 나누었다. 하나는 구약 본문을 모형으로 한 구절들(1:7; 3:19a; 22:12,13)과 공관복음의 말씀자료와 관계가 있는 자료들(2:7a; 3:3b,20; 16:15)이 그것이다. 여기서 공관복음과 관련된 네 말씀들은 계시록의 저자가 공관복음 전승에 깊이 뿌리를 둔 말씀에 분명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바울 전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계시록의 저자는 공관복음전승뿐만 아니라 바울 전승도 잘 알았고, 자신의 문서에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이들 전승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소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할만한 여건이나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양서는 결정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 신동욱은 계시록 안에 바울신학의 흔적을 세 가지 측면에서 찾고 있다.

첫째, 바울의 선교지역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그들에게 친숙한 편지의 틀(1:1-7; 22:20-21)을 사용하여 자신의 묵시록을 전달했다는 점, 둘째, 바울서신에만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μαράνα θά(마라나 타)(고전 16:22; 22:20), 기독론적 호칭인 죽은 자들의 첫 열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설명하는 개념들,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다양한 유형의 여인(처녀, 아내, 신부)의 개념을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부합하게 계시록 안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마지막 나팔이 연주될 때에 발생하는 종말적 시나리오(고전 15:50-58,23-28; 11:15-19)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특히 서신으로서의 계시록의 서론(1:1-4)과 결말(22:6-21) 부분은 바울의 편지 형식을 모방하였지만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바울서신의 형식을 새롭게 변형시켰다고 말한다.

계시록의 저자가 공관복음서를 사용한 실례를 한 가지만 살펴보자. 특히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인 심판(6:1-17)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감람산 강화(24; 13; 21)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계시록의 종말론이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가르친 종말론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3장과 계시록 6장을 비교하면 전승의 유사성을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3. 묵시전승(외경과 위경) 사용 문제이다. 이 문제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동일저자가 아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신약문서 가운데 묵시전승인 외경과 위경을 사용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다서 1:14-15에서 에녹1(1:9)로부터 인용한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외경과 위경 문서(묵시전승)를 찾아볼 수 없다.

외경과 위경 문서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전승으로 소유할 수 있는 여건과 아울러 그런 문서를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언어 능력을 갖추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계시록의 저자는 그러한 전승을 소유할 수 있는 여건과 아울러 대학자답게 외경과 위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 출신인가를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우선 계시록의 묵시전승 사용 목록을 차례로 열거해 보자.

 

1장과 <에녹 1: 에녹의 비유>

2-3장과 <에녹 1: 에녹의 편지>

4장과 <레위의 유언>

5장과 <에스라 4>

6장과 <마카비 2>

7장과 <솔로몬의 시편>

8장과 <아담의 유언>

9장과 <에녹 1: 동물 묵시>

10장과 <희년서>

11장과 <에스라 4>

12장과 <아담과 이브의 생애>

13장과 <에스라 4>

14장과 <다마스커스 문서>

15장과 <에녹 1: 선각자들의 말씀>

17장과 <요셉과 아스낫>

18장과 <에녹 1: 에녹의 편지>

19장과 <솔로몬의 시편>

20장과 <에녹 1: 파수꾼의 책>

21:1-22:5<에스라 4>

22:6-21<스바냐의 묵시>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살펴보자. 계시록 11장과 <에스라 4>이다. 계시록 11장은 그 특별한 위치나 인물들을 해독하는 데 있어서 해석상의 대표적인 핵심을 나타낸다. 본장에 펼쳐진 두 증인은 수수께끼 같은 역할을 하나 종말론적인 시나리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두 증인의 행동에 나타난 종말론적인 내용과 바다로부터 온 인자 환상을 말하는 <에스라 4>와의 관련성을 비교해보면 종말론적인 긴장을 높여준다.

<에스라 4> 3-14장은 주후 70년 로마인에 의한 제2성전의 멸망을 둘러싼 쟁점들을 파악하려는 노력 속에서, 문학적 장치로서의 바벨론 사람들에 의한 성전의 멸망을 사용한다. 이 책은 에스라가 받은 격조 높은 일곱 개의 상징적 환상인데, 이러한 환상들은 출애굽기 언어와 에스라의 예언자적 회복을 사용하여 그 시대의 종말을 완결시킨다. <에스라 4> 13장의 군사적이고 승리한 메시아와 계시록 11장에 나타난 두 증인은 많은 주제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구약 인용의 차이, 신약전승 사용의 차이 및 묵시전승(외경과 위경) 사용의 차이를 통해 양서가 얼마나 다른지를 상세히 살펴보았다. 요한복음이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갈릴리 어부 출신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의한 경험의 산물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대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학문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서의 저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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