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46)

1. 이번호에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문체(어휘)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요한복음에 비추어본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을 때(2020),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 4관왕을 차지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빈부격차의 문제인데, 이를 잘 표현한 대사가 부자와 빈자는 냄새가 다르다는 표현이다. 냄새는 속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아는 것보다 직관과 감성적 느낌으로 먼저 안다. 이를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적용하면 양서는 냄새가 전혀 다르다.” 이 냄새는 속일 수가 없다.

요한복음에는 어촌 갈릴리와 물고기(생선) 냄새가 짙게 나는 데 반해, 계시록에서는 요한복음에서 짙게 풍기는 어촌 갈릴리와 물고기(생선)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신구약성경과 묵시문서에 정통한 도시(예루살렘) 출신의 대학자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또한 사랑의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 애제자가 예수의 품(κóλπος)에 안겼을 때 느꼈던 여성적 톤의 감성과 아가폐 사랑의 감동이 진하게 다가온다. 반면에 계시록을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이 거의 나지 않고, 환상, 재앙, 전쟁, 심판 같은 남성적 톤의 거칠고 무서운 단어들만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와 관련된 필자의 경험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어느 날 전체 스물두 장으로 된 요한계시록을 전부 다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요한복음보다 훨씬 절수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절수를 비교해 보니 요한복음은 전체 절수가 879절인데, 요한계시록은 전체 절수가 그 절반도 안 되는 404절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것은 문체(어휘)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동사 위주의 문체인데 반해, 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명사 위주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동사 위주의 글은 명사 위주의 글보다 읽기가 훨씬 편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계시록보다 절수가 두 배 이상이나 되지만 훨씬 읽기가 쉬운 반면, 계시록은 요한복음에 비해 훨씬 짧은 책이지만 읽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계시록은 명사 ποκαλυψις(계시)를 사용(1:1)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동사 ποκαλπω(계시하다, 나타나다)를 사용(12:38)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학문의 산물인 요한계시록은 학자적 문체인 명사 위주의 문체를 사용한다.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경험의 산물인 요한복음은 경험적 문체인 동사 위주의 문체를 사용한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은 누구로부터 학문을 배우거나 많은 자료를 이용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출신상으로 본다면 본래 학자 출신인 바울이나 높은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마태나 누가와는 상당히 다르다(고전 1:26 이하). 이는 그가 사용하는 어휘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어휘수도 적고(=1,691, =1,345, =2,055, =1,011), 개념화된 명사적 어휘보다 동사적 어휘로 되어 있다.

가령, 동사 믿다”(πιστεω)와 명사 믿음”(πίστις) 어휘를 살펴보자. 동사 믿다용어를 마가 10, 마태 11, 누가 9회 사용하고 있는 반면, 요한은 무려 98회를 사용하고 있다. 공관복음서 전체에서 동사(믿다) 용어를 30회 사용하고 있고, 바울이 54(참고로 로마서에는 동사 믿다21, 명사 믿음40회 나옴)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요한이 동사 믿다용어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은 명사 믿음”(πίστις)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계시록은 동사 피스튜오’(πιστεω)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명사 믿음”(πίστις) 용어만을 4회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휘(용어) 사용에 있어 요한복음과 계시록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학문을 한 사람들은 헬레니즘 교육(수사학, 논리학, 형이상학 등)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의 어휘는 헬라적 사고의 특징인 명사형이 많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헬레니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도 요한의 어휘는 동사형이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적 특징을 보여준다. 게다가 동일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단순한 셈어적 헬라어 구문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비유가 일상생활 속에서 나온 것처럼, 요한이 쓰는 용어는 거의 전부가 일상용어(코이네)로 되어 있다. 이는 학문공동체의 산물인 마태복음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읽기가 쉬운 복음서이다.

존 맥아더(J. MacArthur)는 이런 말을 했다. “요한계시록과 요한의 다른 글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한 사람이 모두 썼다는 것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진정 바울서신(7)과 에베소서의 문체의 차이, 또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문체의 차이는 사소한 차이이기에 바울서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문체의 차이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결정적 차이다. 따라서 요한복음과 계시록은 느낌에서도 전혀 다르지만, 문체가 전혀 다르기에 한 저자의 작품으로 볼 수 없다.

어떤 두 권의 책을 비교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문체(어휘)의 차이를 고려한다. 문체(어휘)가 다르면 저자가 다르고, 저자가 다르면 문체가 다르다. 이것은 상식에 속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내용이 전혀 다른(예수시대와 교회시대) 책이지만 문체(어휘)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 저자인 누가의 저작으로 간주한다. 여러 개의 바울 서신은 문체(어휘)의 유사성으로 바울이라는 한 저자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두 저서의 문체(어휘)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럴 경우 왜 한 저자의 문체가 다른지를 설득력있고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확연하게 다른 문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무진장 많은 같은 어휘를 사용해도 저자가 다르다고 본다. 그 까닭은 문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어휘를 무진장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저자라고 우긴다면 그야말로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 또는 같은 신학적 주제를 공유한다고 저자가 같다고 한다면 이 또한 상식을 벗어난 넨센스이다.

가령,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비교해 보면 양서는 박해 상황에서 믿음에 의한 승리라는 같은 신학적 주제를 공유한다. 그렇다고 해서 양서를 같은 저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양서는 문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요한복음과 계시록에 적용한다면 양서가 같은 묵시문학적 장르와 신학적 주제를 공유하지만 양서의 문체의 차이는 히브리서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기에 같은 저자라고 볼 수 없다.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교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학자 바울과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시인 예수의 문하에서 배운 어부 요한은 근본적으로 문체가 다르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학자 가말리엘로부터 구약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배우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근본이 학자이다. 이에 반해 공중의 새, 들의 백합을 노래한 갈릴리 출신의 시인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세상 나라에 대한 전복성을 띤 하나님의 나라를 듣고 배운 사도 요한은 거친 바다와 격렬하게 싸우는 파토스적 열정을 지닌, 근본이 시인이었다. 그래서 바울의 문체와 요한의 문체는 다르다.

2.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문체(어휘) 사용의 결정적 차이는 이중 어구와 다중 집합명사 사용에서 잘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중 어구7회 사용하고 있다. (a) 은혜와 진리(1:14,17), (b) 물과 영(3:5), (c) 영과 진리(4:23,24), (d) 영과 생명(6:63), (e) 진리와 자유(8:32), (f) 부활과 생명(11:25), (g) 길 곧 진리와 생명(14:6)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은 이중 어구7회 사용한 것 외에는 명사 어휘를 여러 개 나열하는 식의 문체를 결코 사용한 법이 없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십자가의 진리를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일곱 이중 어구용법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명사를 이중으로 반복하거나(이중 집합명사), ‘삼중 집합명사’, ‘사중 집합명사’, ‘오중 집합명사’, ‘육중 집합명사’, ‘칠중 어구등 집합명사를 계속 나열하는 식의 문체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전혀 이질적인 문체 사용이다.

 

이중 어구와 다중 집합 명사의

차이를 보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1) 2중 어구(이중 집합명사): 계시록은 이중 어구를 반복하는 글쓰기나 이중 집합명사를 쓰는 식의 문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1:2), 은혜와 평강(1:5), 나라와 제사장(1:6; 5:10), 알파와 오메가(1:9), 처음이요 마지막(1:18; 2:8), 사망과 음부(1:18), 환난과 궁핍(2:9), 천천이요 만만(5:11),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5:13),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6:9),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6:16), 땅과 바다(7:2), 하나님과 어린양(7:10), 바다와 땅(10:5),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11:4),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11:15), 불과 유황(14:10; 20:10; 21:8),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14:12), 영광과 능력(15:8),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15:3), 강과 물 근원(16:4), 성도들과 선지자들(16:6), 능력과 권세(17:13),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17:14), 여덟째 왕(17:11), 작은 자나 큰 자(19:5), 화 있도다 화 있도다(18:10, 16,19), 충신과 진실(19:11),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9:16),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20:4), 곡과 마곡(20:8),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20:9),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20:10), 땅과 하늘(20:11), 새 하늘과 새 땅(21:1), 처음 하늘과 처음 땅(21:1),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21:6; 22:13), 영광과 존귀(21:26), 등불과 햇빛(22:5), 다윗의 뿌리요 자손(22:16), 성령과 신부(22:17),

(2) 3중 어구(삼중 집합명사):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1:4; 4:8), “환난과 나라와 참음”(1:9), “영광과 존귀와 권능”(4:11), “, , ”(8:13), “불과 연기와 유황”(9: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16:18),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18:24),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

(3) 4중 집합명사: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5:9; 7:9; 10:11; 11:9; 13:7; 14:6; 17:15),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5:13),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6:8),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8:5),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14:7),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17:5),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18:20),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8:5),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18:20),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 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18:22).

(4) 5중 집합명사: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2:19),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11:18),

(5) 7중 집합명사: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5:12)과 그 변형(“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7:12),

(6) 기타 어휘(문체):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13:16),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19: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21:8), 상품 목록의 나열(18:12-13,16),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22:15), 둘째 사망(3, 20:6,14; 21:8), 할렐루야(4, 19:1,3,4,6), 아멘(9, 1:6,7; 3:14; 5:14; 7:12[2]; 19:4; 22:20,21) . 이런 식의 문체는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다.

 

3. 우리가 어떤 어휘의 유사성을 말할 때 문자적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그 어휘가 사용된 문맥(semantic field)과 책 전체에서의 위상과 의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는 상식에 속한다. 가령, “동무, 날래 갑시다래할 경우 여기서의 동무는 친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동분자라는 의미다. 그런데 박수암 교수는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표적인 두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양서에서 모두 예수를 어린 양으로 부른다(29, 2). 그렇다고 이 용어가 같은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먼저, 계시록에서는 1(땅에서 올라온 짐승 또는 거짓 선지자를 언급하는 13:11)을 제외한 28(5:6,8,12,13; 6:1,16; 7:9,10,14,17; 12:11; 13:8; 14:1,4[2],10; 15:3; 17:14[2]; 19:7,9; 21:9,14,22,23,27; 22:1,3)가 모두 예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은 원어로 아르니온’(ἀρνίον)이며, “죽임 당한 어린 양이다. 여기서 수동적 의미인 죽임 당한이란 힘이 없는(그저 순종하는) 어린 양처럼 예수께서 그렇게 무기력하게(무저항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기본적으로 목자’(ποιμήν, 10:11,14)이지 어린 양’(ἀρνίον, 또는 πρόβατιον)이 아니다. ‘(어린) 용어는 신자’(10:1-18; 21:15-17)에게 사용하는 용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1:36하나님의 어린 양)라고 불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르니온’(ἀρνίον)으로서의 어린 양이 아닌 암노스’(ἀμνό)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의 예수는 힘이 없어 수동적으로 끌려가 죽는 분이 아니라 이미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16:33)으로, 즉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 따라 능동적(자발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나 왕처럼 위엄있고 당당하게 죽음을 행해 전진하는 부활의 예수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공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 27:46)와 같은 수난의 예수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남왕국 전통에 속한 계시록의 어린 양은 수동의 의미, 즉 힘이 없어(또는 순종하기 위해) “죽임을 당한”(ἐσφαγμένον, 과거분사수동) 어린 양이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은 유다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5:5)에 속한어린 양이다. 반면에 북왕국 전통에 속한 요한복음의 어린 양은 능동의 의미,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αρων, 현재분사능동) 어린 양이다. 즉 요한복음은 수동적 의미의 어린 양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으로 성육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어린 양(1:29)이다.

박호용 교수의 저서들과 아자브 로고
박호용 교수의 저서들과 아자브 로고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북왕국 전승의 모습, 즉 히브리 전통이 기대하는 다윗 왕 같은 힘 있는 정치적 메시아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역설을 보여준다. 즉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힘없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수난의 예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 따라 자발적으로 수난을 선택함으로써 수난을 통해 왕적 메시아로 등극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반면에 계시록에서의 어린 양이미지는 더욱 역설적이다. 그의 피는 옷을 희게 할 뿐 아니라(7:14), 그는 유약하나 정복하는 자이다(5:5-6; 12:11). 그는 전사인 동시에 신부이다(17:14; 19:7-9; 21:9). 그는 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성전과 빛의 근원이다(21:22-23). 즉 계시록의 죽임 당한어린양은 남왕국 전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임 당한유약한 어린 양과는 대조되는 유다 지파의 사자(Lion)이자(5:5) 전사로서의 다윗 왕적인 모습, 즉 재림시 모든 불의를 징치하시고 사탄을 대적하는 심판자의 표상으로 나타난다(5:6; 14:10).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양서에 나타난 표적용어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 사용한 이적’(뒤나미스)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직 표적’(세메이온) 용어만 17회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적’(뒤나미스)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요한복음에서의 이적은 단지 현상적 의미의 메시아적 능력(miracle)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싸인(sign), 즉 묵시문학적 암호상징(상징코드)이기 때문이다(35강의 표적상징코드참조).

또하나는 표적 용어가 북왕국 전승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인 갈릴리용어와 똑같이 17(십자가의 숫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표적 용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완전수 일곱 표적에서 긍정적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계시록은 표적’(세메이온) 용어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전혀 쓰지 않는 이적’(뒤나미스) 용어도 함께 사용한다. 계시록의 세메이온(표적) 용어는 단수로 3(12:1,3; 15:1) 나오고, 복수로 4(13:13,14; 16:14; 19:20) 나온다. 그리고 뒤나미스(이적) 용어는 무려 12회나 나온다.

더욱 주목할 점은 표적(세메이온) 어휘 사용의 차이다. 요한복음은 표적 어휘를 그리스도에게만 전적으로 국한하여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계시록은 이 어휘를 그리스도에게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적자인 짐승(13:13,14)과 거짓 선지자(19:20) 및 거짓 영들(16:14)에 사용하고 있다. 같은 저자가 가장 중요한 어떤 어휘를 전혀 반대적 용도(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로 쓰고 있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이는 전적으로 양서가 동일 저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덧붙여서 말하면, 다른 책에는 나오지 않는 어떤 특수한 어휘가 양서에만 나온다면 유사성을 얘기할 수 있다. 가령, 요한복음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14:16,26; 15:26; 16:7) 어휘가 계시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제사장적 어휘인 세마포 옷’(βσσινος) 어휘는 요한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계시록에만 나타나는 전문 어휘(5, 18:12,16; 19:8[2],14)이다. 반면에 계시록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교회, 기도, 복음, 믿음(명사형), 비밀, 우상, 지혜, 회개, 천사, 보좌 같은 가장 일반적인 신앙적 어휘(명사)조차 요한복음 저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문체의 사용, 가령, 요한복음에서는 아멘어휘를 이중 어구(Ἀμν μν)로만 무려 25회나 사용하는 반면, 계시록에서는 9회 사용하면서도 이 어휘가 이중 어구가 아닌 항상 단일 어구인 아멘’(ἀμν)으로만 나타난다. 지금까지 고찰한 문체(어휘) 사용의 차이를 통해 양서의 저자를 동일 저자로 볼 수 없음이 명백하다.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의 저자(사도 요한)는 북왕국 전통의 시인(묵상가)이고, 계시록의 저자(묵시적 예언자 요한)는 남왕국 전통의 학자(제사장)(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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