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 (36)

1.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상징코드><말씀상징코드> 그리고 요한복음 11, 특히 로고스’(말씀)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얼마나 구약적(히브리적) 배경 아래 있는 복음서인가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다룰 <절기상징코드><지리상징코드>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는 요한복음이 헬라적(영지주의적) 배경 아래 있다는 불트만의 주장이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또다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요한은 역사를 구성하는 세 요소, 즉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썼다. ‘시간(時間)의 해체와 재구성<절기상징코드>라 하고, ‘공간(空間)의 해체와 재구성<지리상징코드>라 하고, ‘인간(人間)의 해체와 재구성<인물상징코드>라 한다. 여기서는 <절기상징코드><지리상징코드>를 살펴보고, 다음호에서 <인물상징코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절기상징코드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51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기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회화에 스푸마토 기법’(안개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기법은 경계선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신비감을 더하게 하는 기법인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

요한은 자신의 의도를 신비(암호)에 감추고자 살짝 비틀어 놓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유대인의 명절’(5:1), 두 개의 명사를 사용하는 이중 말씀(은혜와 진리, 물과 성령 등) 길 곧 진리와 생명’(14:6)이나 진리와 자유’(8:32)에서 자유가 명사가 아닌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혹자는 51절의 유대인의 명절이 본문 이해에 중요하지 않으며, 만일 중요했다면 요한이 그것을 분명하게 밝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의 글쓰기의 특징인 은폐 기법을 보여주는 이 절기는 본문 이해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절기를 온전케(대체) 하신 예수라는 절기 상징 코드적 의미이다. 유대인 남자들은 매년 세 번 절기들, 즉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초막절(장막절)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23:14-17; 16:16). 따라서 상식선에서 유월절(2:13; 6;4; 12:1)과 초막절(7:2)은 언급되어 있기에 나머지 한 절기는 오순절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한은 상징코드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는 글쓰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령, 표적 상징 코드인 경우 첫 표적, 둘째 표적을 말한 후 그 나머지는 생략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중 오순절만 언급이 없는데, 절기 상징 코드를 통해 이 절기가 오순절임을 말해주고 있다. 435절은 그에 대해 암시를 하고 있다. 지금(2:13-4:54)은 유월절(114-21) 기간이고, 추수 때인 넉 달 후(715-21)란 초막절을 말한다. 따라서 그 사이의 절기란 유월절이 지난 50일 후의 절기인 오순절이 자연스럽다.

이 절기가 오순절이 되어야 4개의 절기(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수전절)에다가 하나의 절기(오순절)를 더해야 5대 절기(숫자 5는 유대교[모세오경] 상징)가 되어 요한의 절기상징코드가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이영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7장에서 초막절이, 10장에서 성전 봉헌절이, 11-12장에서 예수의 마지막 해방절(유월절)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절기 상징 코드의 중심-

'오순절'

절기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또 하나는 삼위일체의 한 축인 성령과의 관련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 강림 절기인 오순절이 되어야 삼위일체 하나님이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요한의 글쓰기의 특징인 키아즘(chiasm) 구조에 따르면 5장은 16장과 상응관계에 있다. 16장은 성령 강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성령 강림은 오순절과 관련된 절기이다.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실을 축하하는 명절인데, 5장은 안식일 율법(5:9,18)과 모세(5:45-47)가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이 절기는 오순절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1, 즉 한 번의 유월절로 그리고 있다(26:2; 14:1; 22;1).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시간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3, 즉 세 번의 유월절(2:13; 6:4; 11:55)로 그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어느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한지는 잘 모른다. 요한은 앞서 쓰인 공관복음과 달리 유월절을 주제로 한 3년짜리 유월절 복음서’(A Passover Gospel)를 썼다. 결국 요한복음은 성육신이 말해주는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1:1-18), 3번의 유월절(2:13; 6;4; 12:1)을 통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의 하강,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하강(21)을 통해 ‘5중 하강 구조로 엮어진 복음서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절기(유대교)를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예수의 죽음 시점의 차이는 주목할 만하다.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고별식사는 유월절 축제의 전날 밤에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의 틀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이 시점에 이미 운명하셨다. 예수는 이날 오전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다. 이때는 성전에서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양들을 도살하던 바로 그 시점이다(18:28; 19:14-16).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은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 및 쓴 나물을 먹음으로써 출애굽한 그날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죽은 니산월 13일은 금요일이고, 그날 오후 6시가 되면 니산월 14일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동시에 토요일인 안식일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전날 밤에 있었던 예수의 고별식사는 유월절 식사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13장 참조). 역사적으로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경우에 있어서 시간 설정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선포 의도가 결부되어 있다. 공관복음의 시간 설정은 예수의 고별식사(성만찬)가 새 계약을 체결하는 유월절 식사라는 의미를 지닌 시간 설정이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의 시간 설정은 예수의 죽음이 참된 유월절 양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시간 설정이다(1:29,36; 19:36 참조). 이렇듯 절기상징코드는 철저히 구약적(히브리적) 절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 다음으로, 지리 상징 코드를 살펴보자. 요한의 지리 상징 코드는 세 측면, 가나 가버나움’, ‘갈릴리 유대(예루살렘)’ 요단 동편 요단 서편이라는 대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먼저, ‘가나 가버나움에 대해서 살펴보자. 요한은 갈릴리 가나는 신앙의 땅으로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일곱 표적 가운데 첫 표적(2:11)과 두 번째 표적(4:54)을 갈릴리 가나와 관련된 표적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께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1:47)라며 제자 삼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가버나움은 불신앙의 땅으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첫 표적을 행한 후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오래 머무시지 않았다고 한다(2:12). 또한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렸을 때 직접 내려가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만 하셨다(4:50).

다음으로, ‘갈릴리 유대(예루살렘)’에 대해서 살펴보자. ‘갈릴리와 예루살렘문제는 1936년에 로마이어(E. Lohmeyer)가 처음으로 지적한 이후 마가복음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거기에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다. 전체적으로 북왕국 전통인 마가와 요한은 갈릴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남왕국 전통인 마태와 누가는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말로 예루살렘으로 번역된 어휘를 헬라어 원어로 보면 히에루살렘’(Ἱερουσαλμ)히에로솔뤼마’(Ἱεροσόλυμα)로 되어 있다(cf. 12:6). 여기서 후자 어휘는 예루살렘에 대한 사투리(북부 방언)로 볼 수 있다. 마가와 요한은 히에루살렘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히에로솔뤼마어휘를 마가 10, 요한 12회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마가에 의존한 마태와 누가는 히에루살렘어휘를 각각 2회와 27, ‘히에로솔뤼마어휘를 각각 11회와 4회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북왕국 전통인 마가와 요한보다 남왕국 전통인 마태와 누가가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갈릴리어휘를 살펴보면 마가 16, 요한 17, 마태 16, 누가 13회가 나타난다. 복음서의 전체 절수(661, 1,068, 1,149, 879)에 비하면 북왕국 전통인 마가와 요한이 남왕국 전통인 마태와 누가보다 갈릴리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마가의 갈릴리 강조는 수난 기사 중에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14:28)는 말씀과 부활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다시 언급(16:7)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뵐 곳은 갈릴리이다. 이는 꽤 기이한 서술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부활한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1:4)고 명령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자는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만 나타난다(24). 부활자의 갈릴리 현현을 전하는 것은 마가가 처음이다. 이는 갈릴리에 대한 마가의 깊은 관심을 시사한다.

또한 요한의 갈릴리 강조는 5중 하강 구조에 나타난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요한복음에 갈릴리어휘가 십자가 숫자를 상징하는 17회 나타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이는 십자가 수난이 예루살렘에서가 아닌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지리 상징 코드의 중심-

'갈릴리'

갈릴리 지향적 복음

 

3. 끝으로, 요한은 요단 동편(건너편)과 요단 서편(팔레스타인)을 대조시킴으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모세)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고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요단강 건너편또는 요단강 저편’(3:26; 10:40)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은 언제나 요단 동편에 있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즉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한 번도 요단 서편, 즉 팔레스타인(가나안) 땅에서 사역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요한은 왜 세례 요한을 언제나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요한은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세례 요한을 모세와 같은 인물로 상정한다. 즉 모세와 세례 요한은 선구자일 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했지만 자신은 약속의 땅(가나안땅)을 바라볼 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동편에서 죽는다. 약속의 성취는 여호수아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선구자로서 율법시대의 마지막 주자인 세례 요한도 모세처럼 약속에서 성취로 가는 통로일 뿐이다.

요한의 신학적 의도에 따르면 요단강을 경계로 모세와 세례 요한은 요단 동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다. 약속의 성취(구원)는 복음 시대를 열었던 오직 예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똑같이 그 이름이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수아(히브리어)와 예수(헬라어)는 성취자가 되는 셈이다. 요한은 다른 표적들은 다 분리해서 다루는 데 반해, ‘오병이어 표적물 위를 걷는 표적을 연이어 붙여놓고는 요단 동편요단 서편을 대조시키는 지리 상징코드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이 사건을 기술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첫째,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요단강 서편에서 시작해서 요단강 동편으로 가는 방향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 반해 요한은 요단강 동편(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표적을 행한 후 요단강 서편(가버나움)으로 가는 방향으로 기술하고 있다.

 

둘째, 구체적인 시간 언급 없이 막연한 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일어난 사건으로 구체적인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셋째, 아무런 중재자 없이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적을 행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빌립과 안드레 및 한 아이의 중재로 일어난 표적 사건이라는 점, 그리고 어휘적으로도 그냥 떡 다섯이 아닌 더 가난한 이들이 먹는 보리떡 다섯 개큰 물고기’(익투스)가 아닌 작아서 그냥 버리는 옵사리온’(ὀψριον) 어휘를 쓰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넷째, 공관복음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결국 굶주린 무리가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통해 다 배불리 먹고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6:14)이심을 말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다.

다섯째, 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요한복음은 물 위를 걷는 표적’(6:15-21)에 이어 무려 오십 절(22-71)에 걸쳐 이 사건이 갖는 의미를 길게 강론하고 있다. 이 같은 강론은 공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특징(글쓰기)이다.

결국 공관복음(마태와 마가)은 요단 서편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행한 뒤에 요단 동편(벳새다)으로 가는 반면(14:22; 6:45), 요한복음은 반대로 요단 동편(벳새다)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행한 뒤에 요단 서편(가버나움)으로 간다(6:24,59). 여기에 담긴 신학적 의도는 무엇일까?

요한은 출애굽 때의 홍해 도하 사건에 이은 가나안 땅 정착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이 표적 사건에 부여함으로써 예수가 제2의 출애굽과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는 새 모세임을 의도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 이 표적 사건은 사망의 땅으로 상징되는 요단 동편에서 먹은 떡(만나)은 잠시 배부르다가 다시 허기가 지는 썩을 양식’(육의 양식)이고, 생명의 땅으로 상징되는 요단 서편에서 행해진 예수의 가르침(말씀)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영의 양식)이라는 것을 예시한다(6:27 이하).

지금까지 고찰한 절기 상징 코드지리 상징 코드를 통해 요한복음이 철저히 구약적(히브리적) 배경 아래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이 헬라적 배경 아래 있다는 불트만의 주장이 또다시 빗나간 주장임을 다시 한 번 반박하는 중요한 사례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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