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17)

1. 우리는 앞서 본디 복음’(유앙겔리온) 용어가 부활의 복음에 사용된 용어이며, 초대교회가 성령공동체이자 부활공동체임을 살펴보았다. 복음의 두 축은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 두 축은 균형 있게 말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회와 한국 개신교는 유독 십자가만 강조해 왔다. 부활공동체로 출발한 초대교회가 어떻게 해서 십자가 공동체로 바뀌어 갔는지를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서방교회는 십자가를 강조하였고, 동방교회는 부활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서방교회에 속하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자연히 십자가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방교회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학적 기초, 즉 바울신학적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런데 과연 바울 사도께서 부활보다 십자가를 강조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불트만(R. Bultmann)과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바울 사도와 마르틴 루터가 외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를 강조하고, 십자가 신학만을 합리적으로 정당시한 반면,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일 수 없고 부활의 역사성의 불필요성을 논하면서 부활 사건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 자신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4-19).

지금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거짓을 사실로 믿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을 경험했다는 목격자들의 명단을 일일이 지적하고 자신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이 분명히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과 무관한 단지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든지 간에 서방교회 전통을 가진 마르틴 루터는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하였고,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지난 500년 동안 개신교 신학은 십자가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19세기 독일 신학자 마틴 켈러(Martin Kähler)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가리켜 확대된 서론이 첨가된 수난설화라고 한 이래 복음서 연구는 수난설화,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기독론(the suffering christology)’, 또는 수난의 신학(passion theology)’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켈러의 주장이 복음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이후 저명한 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추종하면서 다른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어렵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불트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이 이미 예수의 올리움과 영화롭게 됨이라면 특별한 의미의 사건일 수 없다. 부활이 죽음의 승리를 - 그것을 죽음이 가령, 십자가형을 통해 쟁취했다면 - 헛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십자가가 이미 세상과 그 지배자에 대한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부활이 없이 얼마 후에 죽으면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구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생(부활)이 아닌 모든 것은 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2. 서방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나 그의 속죄적 죽음에 치중하는 신학을 해왔다. 켈러의 복음서 이해는 이 같은 서방교회 전통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로이드 존스(M.L.Jones) 목사님이 갈라디아서 614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으로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십자가를 부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부활 사건은 기독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뿌리를 형성해주고 있다.

언뜻 보기에 마가복음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강조하는 듯 보이나, 저자의 진정한 의도는 부활 신앙을 전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는 제자도(제자의 길)에 있다. 마가복음을 비롯한 사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을 전제로 하여,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부활 신앙)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하는 제자도에 있었다. 마가복음이 전반부(1-8)에서 주님의 이적을 말하고, 후반부(8:27 이후)에서 수난사를 길게 기술한 목적도 주님의 수난 자체를 말하기 위함에서보다 수난의 길을 가야 할 제자도(교회)를 말하기 위함에서였다.

부활하심을 전제로 강조된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십자가는 실패한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실패한 메시아가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었는가?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는 실패한 메시아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실패한 메시아가 우리의 구주가 된 것은 부활 사건 때문이다. 바울이 십자가를 부활과 관련해서 언급할 때에도 역시 그의 주요 강조점은 분명히 부활에 있었다(8:34; 고후 13:4). 그래서 신학자 톰 라이트(N.T.Wright)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복음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복음은 다윗 자손에 속한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가 세상의 부활하신 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의 요지는 이것이다. 부활은 다윗의 자손인 나사렛 예수를 진정한 메시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이사가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주였던 세계 속에서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부활은 예수를 세상의 참된 통치자로 만든 표지가 되었고, 가이사는 세상의 이 참된 통치자의 희화화에 불과한 존재였다.”

특히 우리가 고대 문서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마땅히 그 문서의 결론(16:1-8)을 알아야만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에 해당한다. 부활이 없는 복음서는 단순히 마지막 종장이 없는 복음서일 뿐만 아니라 그런 복음서는 전혀 복음서가 아니다. 마가복음이 기존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마가복음이 부활지향적 구조로 되어 있으며, 부활이 마가복음 연구를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복음(εαγγελον)의 시작’(1:1)이라는 말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복음이란 말의 원어 유앙겔리온은 이미 언급한 대로 헬라세계에서 승리의 기쁜 소식’(승전보)과 관계된 부활의 언어였다.

수난의 교회에 필요했던 것은 승리의 기쁜소식’(부활의 복음)이었다. ‘십자가 신학이나 고난의 기독론이 아니다. 그런 것은 기껏해야 예수를 모범적인 순교자로 전해 줄 뿐이다. 사탄적인 로마제국의 세력에 붙잡혀 있던 수난의 교회에는 더 강한 분승리의 복음이 필요했다. 그것만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고, 또 그런 승리의 복음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악한 세력의 억압 밑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과 기독교회에 똑같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승리의 기쁜 소식인

부활의 복음

 

3.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자세히 살핀 후에 다시 쓴 복음서로써 예수의 부활이 갖는 의미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유대교 및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와 순교를 강요당하는 수난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채택한 신학이 바로 부활 신학이다. 따라서 부활의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요한복음 이해의 열쇠가 아닐 수 없다.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라고 찬송하였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이 갖는 네 가지(하늘, 영광, 영원, 생명) 개념을 이에 적용하면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생명’(부활)이로다.”

부활 신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부활 신학은 박해에 직면해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유지하려는 피나는 투쟁과 결부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나는 십자가요 죽음이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의 말씀처럼, 요한복음의 진리는 예수 자신이며, 예수의 진리는 곧 생명(부활)의 진리이다. 그 진리는 십자가의 진리’(복음)에 앞서 부활의 진리’(복음)이다. 부활 신앙(16-17)을 안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18-19) 주님에게서 보듯이, 신앙적 순서가 부활이 1차적이고 십자가는 2차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서구신학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부활보다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설교 또는 선포)’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둘 중에서 부활이 케리그마의 머릿돌로서 십자가에 우선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이야말로 히브리적-그리스도교적 전통에 가장 충실히 서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를 비롯하여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모두에 해당한다. 십자가 복음과 부활의 복음이 함께 할 때 완전한 복음이 된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 가운데서 케리그마의 머릿돌(건물을 지을 때 맨 먼저 놓는 돌로서 기준과 방향이 되는 돌)’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재해석

그러니까 케리그마의 순서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부활과 십자가이다. 부활이 1차적(Primary)이고, 십자가는 2차적(Secondary)이다. 시간적 순서로 보면 십자가 사건이 먼저이고, 그 후에 부활 사건이 뒤따르지만, 신앙적 순서로 보면 부활 사건을 체험한 후에 그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와 기독교(신구약성서)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 더욱 적절한지 모른다. 속죄를 위해 매년 드려지는 대제장적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영원한 제사(9:26)로 단번에 끝냈다는 측면에서 십자가는 구약의 완성이다.

반면에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기준은 부활여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기쁜 소식(복음)으로 구약(유대교)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신약의 시작이다. 따라서 부활 신학’(Theologia resurrectionis)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불연속성, 즉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말해주는 시금석(試金石)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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