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19)

1. ‘십자가 신학을 지나 부활의 신학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또 하나의 새로운 신학을 주장한다거나 지난 500년 동안 배의 무게중심이 십자가로 기울어졌기에 부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십자가가 지닌 부정의 언어보다 부활이 갖는 긍정의 언어가 우리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바르고 밝고 능력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

사람은 언어의 집안에 사는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된다. 긍정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과 부정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으로 귀결된다. 가령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전에 있었던 출애굽의 감사와 감격(15)을 잊고, 광야에 들어서자마자 물과 양식이 없다고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었다(16:1-9). 광야 4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는 부정의 언어, 즉 원망과 불평과 반역의 언어로 날을 새었다(14:1-10; 20:1-13).

여기서 부정의 언어인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과 긍정의 언어인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부정의 언어를 계속해서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그 인생이 불운과 불행이 계속되고, 긍정의 언어를 계속해서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그 인생이 행운과 행복이 뒤따른다. 귀신론을 계속 강의 하는 목사와 성령론을 계속 강의하는 목사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귀신론 강의를 위해 계속 귀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귀신이라는 언어에 사로잡혀 귀신이 들게 된다. 반면에 성령론 강의를 위해 계속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다.

말만이 아니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좋은 것을 많이 보는 사람과 나쁜 것을 많이 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이다. 처음에는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에 맹자가 나이가 어려 보고 듣는 것이 상여(喪輿)와 곡성(哭聲)이라 늘 그 흉내를 냈다. 맹자이 어머니는 이곳이 자식 기를 곳이 못 된다 하고 저자 근처로 집을 옮겼다. 역시 맹자는 장사의 흉내를 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자식 기를 곳이 아니라 하고 다시 서당(書堂) 근처에 집을 정했다. 맹자가 늘 글 읽는 흉내를 내므로 이곳이야말로 자식 가르기에 합당하다고 하고 거기에 안거(安居)했다.

보고 듣는 것이 알게 모르게 무의식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밝고 좋은 것을 보고 듣고 자란 사람과 어둡고 나쁜 것을 보고 듣고 자란 사람은 의식의 세계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쳐 그것이 언젠가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네 삶에 있어 긍정과 부정은 늘 함께 있지만 되도록 부정의 언어보다 긍정의 언어를 더욱 많이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부활과 관련된 글을 쓰자 어느 분이 답글을 보내면서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터널 안과 터널 밖으로 비유해서 설명한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터널 안은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이고, 터널 밖은 빛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터널 안을 들어갈 때 속히 터널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그 까닭은 어두운 터널 안보다 밝은 터널 밖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밝은 빛의 세계인 부활보다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인 십자가를 더욱 강조해 왔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계속 머무르면서 신앙생활에서 부활이 갖는 보다 밝은 의미와 주님께서 명령하신 제자도(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외면하거나 그것을 행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부활 복음의 강조는 보다 밝은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주님께서 명하신 제자도를 실천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에서의 패러다임의 전환 때문이다.

 

부활 복음이 주는

긍정의 언어 밝은 신앙생활

2. 십자가의 현장은 부정의 언어인 온갖 어두운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거기에는 음모, 배신, 탄식, 통곡, 눈물, 조롱, 무책임, 잔인, 절규, 저주, 제비뽑기가 그것이다. 주님의 부활로 인한 의미의 대반전을 이루기 전까지 십자가(처형)는 온갖 부정적 언어의 총체였다. 그 가운데 일곱 가지만 얘기하면 어둠, 슬픔, 죽음, 절망, 실패, 무능, 수치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와 반대로 부활의 현장은 긍정의 언어이며, 밝은 하얀 색으로 가득하다. 부활의 언어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되어 있다. 무지개는 비가 갠 후 일곱 색깔 빛으로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빨강색, 주황색, 노랑색, 초록색, 파랑색, 남색, 보라색이 그것이다. 부활의 빛 또한 일곱 색깔 무지개빛을 띤다. 첫째, 부활은 어둠을 이긴 밝음의 빛(빨강색)’이다. 둘째, 부활은 슬픔을 이긴 기쁨의 빛(주황색)’이다. 셋째,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빛(노랑색)’이다. 넷째, 부활은 절망을 이긴 소망의 빛(초록색)’이다. 다섯째, 부활은 패배를 이긴 승리의 빛(파랑색)’이다. 여섯째, 부활은 무능을 이긴 능력의 빛(남색)’이다. 일곱째, 부활은 수치를 이긴 영광의 빛(보라색)’이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진리로 말하는 종교이다. ‘부활의 진리는 불의와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의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진리이다. 옮겨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돌로 무덤을 막아 놓는다고 해서 의와 진실까지 가두어 놓을 수는 없다. 로마 군병들이 철통같이 무덤을 지킨다고 해서 거짓과 불의까지 지킬 수는 없다. 새봄에 굳은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터져 나오는 진리와 생명의 힘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밝아오는 새벽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를 지고 순교로 그들의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후 성령강림을 체험한 이후이다. 즉 부활체험과 성령체험이 없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목회자들과 기독교회는 매 주일이 주님이 부활한 날이기에 부활신앙을 강조해야 하고, 본시 기독교회의 태동이 부활체험과 성령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다.

요한공동체(요한의 교회)부활의 비밀을 간직한 공동체(교회)”였다. 요한공동체는 부활의 신학(복음)’이 함축하고 있는 그 비밀을 가지고 자신들이 당면한 시대적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기독교회가 지향해야 할 불변의 진리를 전했다. 부활의 나래를 활짝 펼치기 원하는 모든 이에게 나는 진정으로 기원한다. “그대에게 부활이 있으라!”

 

3.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나, 그래 죽여라 죽여,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 죽으면 다시 산다. 죽으면 영생하리(크리스천의 5대 죽음철학). 이렇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을 마감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11:35-38). 부활신앙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죽음이 두려워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한 뒤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변했고, 초대교회 성도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 바탕에는 바로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담고 있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순교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주님의 제자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오늘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들은 바로 그분들의 영적 후손들이자 복음에 빚진 자들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신앙

로마에 가면 큰 감동을 자아내는 두 관광명소가 있다. 지상의 바티칸 박물관(일명 베드로 대성당)’과 지하의 카타콤이 그것이다. 이 두 관광명소는 두 종류의 기독교를 보여준다. ‘카타콤의 종교바티칸의 종교가 그것이다. 이 두 곳 가운데 어느 곳이 더 감동적인지 무게를 달아보면 저울추가 카타콤 쪽으로 기운다. 그 까닭은 바티칸 대성당은 화려하지만 곧 사라지고 말 교황이 자리잡고 있는데 반해, 카타콤은 비참하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근교에는 수많은 카타콤이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은 약 250년 동안 폭 1m, 높이 3m 가량의 지하도로인 카타콤에서 불멸의 부활신앙을 지켜갔다. 현재 이태리에 산재해 있는 카타콤을 합치면 그 전체 길이가 880km가 되며, 그 안에 매장되어 있는 신자 수는 약 7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카타콤은 부활신앙에 관한 가장 감동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카타콤의 중심에 새겨진 십자가, 부활의 소망이 어두운 시대를 이기는 능력이 된다
카타콤의 중심에 새겨진 십자가, 부활의 소망이 어두운 시대를 이기는 능력이 된다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언덕에 가면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 순교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 개신교 외국인 묘지가 있다. ‘외국인 묘지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전해 준 전도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2백여 년 전, 이 나라는 지금 우리가 아프리카를 생각하듯 그런 나라였다. 이 땅은 가난과 질병과 무지 그리고 온갖 억압과 차별이 심한 어둠 속에 처해 있던 나라였다.

그때 수륙만리 머나먼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전도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12:1)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가 설계했던 인생의 꿈과 청사진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이름 하나 의지하고 땅 끝인 이 땅을 향해 목숨 걸고 달려왔다.

순교자의 꽃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 중엽 이 땅에서 순교한 프랑스 전교신부들(브뤼기에르, 모방, 사스탕, 앙베르 신부)과 김대건 신부(1821-46)를 비롯한 여러 한국인 순교자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의 첫 장을 보면 약속의 땅 조선을 향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9세기 중엽 우리 조선은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야만의 땅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예수회 신부들은 이런 조선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흠모했다. 그리하여 이 약속의 땅인 조선을 향하여 앞 다투어 너도 나도 가겠다고 자원했다. 그 길은 순교가 기다리는 길임을 잘 알면서도 순교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믿고 이 땅을 향해 떠났다.

이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있다는 사실과 죽으면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생하리라는 부활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조선을 향해 달려오게 했다. 한국교회가 역사상 유래없는 부흥을 이루고 복음의 꽃이 활짝 피어 세계 선교 2위의 선교대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을 비롯한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흘린 무수한 순교의 피로 인함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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