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18)

1. 밝아오는 새벽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듯이, 역사의 흐름(진행 방향)에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영적 법칙)이 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역사의 흐름이 그러하다. 신구약성경의 맨 첫 장인 창세기 1장은 이 영적 법칙을 잘 보여준다. 창세기 1장에서 여섯 차례(5,8,13,19,23,31)나 반복해서 나타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라고 해야 순서적으로 맞을 것 같은데, 성경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로 말씀하고 있다. 하루의 시간 개념을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이 대목은 성경과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띤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우선 역사적 순서로 볼 때 창세기에서 말하는 시작(먼저)이요 어둠()의 이미지(日沒)인 저녁은 유대교에 대한 상징어이고, (나중)이요 밝음(새벽)의 이미지(日出)인 아침은 기독교에 대한 상징어이다. 유대교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안식일도 저녁 해질 무렵부터 시작한다. 결혼식도 저녁에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는 일몰(日沒)의 종교요 저녁()의 종교이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부활의 아침(16:2; 28:1; 24:1; 20:1)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일출(日出)의 종교요 아침(새벽)의 종교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침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조반을 함께 하셨다(21:4-11).

어두운 저녁()에서 밝은 아침(새벽)으로의 전환은 먼저보다 나중이 더 낫고 좋으며, 완성적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소망의 언어. 이에 대한 성경 구절을 언급해 보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30:5),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30:1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한편 구약에서 보여주는 장자(강자)보다 차자(약자)가 낫다는 차자(약자) 중심의 원리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 가인이 아닌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을 필두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에서가 아닌 야곱을, 요셉의 형들이 아닌 요셉을,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아론이 아닌 모세를, 다윗의 형들이 아닌 다윗을, 사울 왕이 아닌 다윗 왕을, 첫째 아담이 아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 세례요한이 아닌 예수님을, 먼저 된 유대교를 폐하고 나중 된 기독교를 세운 것도 이에 해당한다.

소망의 언어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역사적 흐름(영적 법칙)을 더욱 확대하면 다음과 같다. 어둠에서 빛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십자가(죽음)에서 부활(생명), 멸망에서 구원으로, 옛 사람(B.C의 인생)에서 새 사람(A.D의 인생)으로, 구약(율법)에서 신약(은혜)으로, 울음(슬픔)에서 웃음(기쁨)으로, 탄식(불평)에서 찬양(감사)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칭의에서 성화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 신학으로, 사도 바울(하나님의 의)에서 그리스도 예수(하나님의 나라), 바울서신에서 복음서로, 공관복음서(마가 르네상스)에서 요한복음서(요한 르네상스)로 등등.

이미 언급했듯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500년 동안은 십자가 신학이 강조되었다. 이제는 복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서의 부활 신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3의 종교개혁의 텍스트가 바로 요한복음이다.

 

2. 요한복음은 정교한 한 편의 조직신학논문으로 되어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자). 한 편의 논문처럼 서론(1), 본론(2-20), 결론(21)의 구조가 그러하다. 그리고 본론(2-20)은 메노라(금촛대) 구조로 되어있다. 메노라의 일곱 촛대를 교차대구구조(A-B-C-D-C’-B’-A’)로 보면 한 가운데(D)를 강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요한복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A. 2-3(2[부활장]-3[십자가장])

전환장: 4(교회론)

B. 5-8(대논쟁)

C. 9-10(9[신앙과 불신앙]-10[십자가])

D. 11[부활장]

C' 12(12:1-36[십자가]-12:37-50[신앙과 불신앙]

B' 13-16(고별 설교)

전환장: 17(교회론)

A'. 18-20(18-19[십자가장]-20[부활장])

 

위의 메노라 구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본론의 첫 장(A)2장이 부활장, 본론의 한 가운데(D) 장인 11장이 부활장, 본론의 끝 장(A')가 부활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요한복음의 본론은 부활 신학으로 구조화 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다시 부연설명하면 이렇다. 한 가운데 장인 11장은 나사로의 소생사건(부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부활장이다. 20장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부활장이다. 그리고 20장과 교차대구구조를 이루는 2장도 부활장이다. 2장이 부활장인 까닭은 이러하다.

201절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이 문구는 주님께서 제 3일에 부활하심을 나타내는 관용구이다. 이 구절과 교차대구구조로 상응하는 21절에 보면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여기서 사흘째안식 후 첫날과 같은 의미로써 주님의 부활을 나타내는 초대교회의 관용구이다. 즉 본론의 첫 장인 2장이 부활장임을 처음부터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제1(1-11)에서 일곱 표적을 언급하고 있는데,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을 첫 표적으로 배치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교가 안식일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바로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보통 뜨거운 대낮을 피해 해가 진 후인 저녁() 시간에 행해진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첫 출발을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 시간으로 잡아 행해지는 바로 이 모습이 유대교의 모습이다. 이때 흥을 돋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포도주이다. 그런데 손님이 많이 와서인지 아니면 가난해서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지 못해서인지 포도주가 떨어졌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이날만큼은 새벽이 올 때까지 밤새 포도주를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도 일찍 포도주가 떨어져서 흥이 깨져 버린 것이다. 주인으로서는 엄청 당황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베푸셨다. 그리하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혼례잔치를 즐기다가 새벽을 지나 아침에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1:5) 바로 그 말씀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이 저녁을 아침 되게 하셨듯이, 저녁()의 유대교를 새 아침(새벽)의 기독교가 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종교, 이것이 유대교를 대체한 기독교이다.

 

저녁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아침의 종교인 기독교로

이 기사에서 저녁에 시작되는 혼례식이 유대교에 대한 상징 언어이고, 완전수인 일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즉 예수님이 빠진 여섯 항아리가 또한 유대교를 상징한다. 나아가 예수께서 이적을 베풀어 색깔과 향기와 맛이 나는 포도주와 비교할 때 아무런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물은 유대교를 상징한다. 그래서 엄청난 물이 포도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물로 상징되는 유대교가 포도주로 상징되는 새 종교인 기독교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경은 천국의 구원의 기쁨을 잔치(55:1-2; 11:19 2:15-17; 14:15-24) 또는 혼인잔치(22:1-14; 22:16-18; 3:39; 19:7-9)로 비유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날(Hochzeit)이 혼인(잔치)의 기쁨이라면, 신앙적 측면에서 가장 큰 기쁨은 천국의 오심이요 사망 권세 이긴 부활의 기쁨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어지는 2:13-22의 성전정화사건도 부활을 말하는 기사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2:19)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 성전을 헐라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심을, ‘사흘이란 곧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에 요한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1-22)는 말로 이 구절의 의미를 해석했다. 즉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야 성전정화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2장은 부활장이다.

 

3. 요한복음의 본론이 형식적인 구조에서 부활장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십자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2장에 이은 3장은 십자가장이다. 3장이 십자가장인 까닭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말씀에 나타나 있다. 모세는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들을 살게 했다(21:4-9).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로서 십자가에 들린 예수님을 쳐다보는(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예표한다(3:16).

또한 부활장인 11장 이전 장인 10장은 십자가장이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내용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10:14-15). 또한 11장 다음 장인 12장은 십자가장이다. 그 까닭은 주님께서 한 알의 밀(12:24)이 되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는데(12:12-19), 이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장사를 미리 치러드린 사건이다(12:1-8). 나아가 부활장인 20장 앞에 있는 18-19장은 예수님의 수난을 다루는 십자가장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본론은 부활장이라는 형식에 십자가장이라는 내용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부활신앙을 안고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제자도에 있다. “큰물고기 153”(21:11)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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