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번성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힘이란 건물과 인원과 헌금을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힘을 말한다.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다시 부흥하기를 사모한다. 부흥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부흥의 시작은 오직 “기도”이다.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부흥은 열흘 동안의 기도회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그 결과 전무후무한 성령의 바람이 모인 곳에 충만하게 임했다. 성령이 임재한 곳에서 놀라운 나눔과 기쁨의 모임과 전도와 하나됨의 축복이 이어졌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부흥의 단초는 기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라는 위대한 하늘의 도구로 이 땅에 부흥을 위해 드려왔다.
18세기 요나단 에드워드의 “영적 대각성 운동”은 기도에서 부터 출발했다. 에드워드는 이런 진술을 남겼다. “그는 너무도 애써 기도한 나머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마루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참된 부흥은 참된 기도에서부터 일어난다. 오늘날 부흥이란 것은 참된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의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부흥의 조건을 하나님에서 시작하지 않고, 좋은 시설, 좋은 장소, 뛰어난 언변가, 탁월한 지식 등, 현대적인 갖춤에서 부흥의 단초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체력이 약하다. 쉽게 이단에게 노출되어 있구, 교회를 추수밭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예배하러 교회를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녀준다고 생각하는 몰상식한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참으로 통곡할 노릇이다.
참된 기도를 통한 부흥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다분히 인간적이고 계산적이고 현대적인 마케팅을 통한 사람 끌어 모으기가 전도의 수단이 되었다. 본질보다 수단이 앞에 가고 있다. 결국에는 인간의 모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결과 몸은 거대해졌지만 체력은 허약한 교회가 되었다.
사도행전 첫 장부터 시작된 참된 부흥은 “오로지 기도”에 헌신했던 결과로 주어진 하늘의 작품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참된 부흥에 목말라하고 있다.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접근 방법을 통한 사람 끌어 모으기를 부흥이라고 본다면, 그 부흥은 어쩌면 가라지들로 득실거리고 마는 결과로 이어질 수 도 있다.
참된 부흥을 원한다. 참된 부흥은 목숨걸고 드리는 기도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부흥이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기도보다 책 읽는 것이 더 쉽다. 기도보다 학위를 따는 것이 더 쉽다. 기도보다 설교하는 것이 더 쉽다. 기도보다 기사 한줄 쓰는 것이 더 쉽다. 기도보다 조직하는 것이 쉽다. 기도보다 프로그램 만드는 일이 쉽다. 기도하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쉽다. 기도보다 사람들 만나 차를 마시며 좋은 음식을 먹으며 인간적인 네트워크를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더 쉽다. 왜냐하면 결과가 금방 나타나기 때문이다.
쉬운 방법은 사람의 영혼을 뒤집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기도에 헌신하지 못한다. 참된 기도는 쉽게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투자하면 어느 정도 결과물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이 은혜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의 시간을 드릴 수 없다.
교회는 사순절 경건의 시간으로 드리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코로나19로 어수선하다. 신천지 이만희 집단의 모순과 해악이 드러났다. 그 결과 불똥이 교회로 번졌다. 교회는 정부의 압력으로 한 순간에 교회봉쇄라는 대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 권력은 한발 더 나아가 교회주일예배중지를 위한 행정명령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온다. 통곡할 노릇이다.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압박해서 일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 울분을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張志淵)은 피눈물을 흘리며 논설을 썼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논설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목사는 주일공예배를 드리지 못한 현실앞에서 장자연처럼 ‘목 놓아 통곡’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목사들은 성도들은 이 날을 울부짖어야 한다. 주님앞에 온 마음으로 울어야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교회는 시작해야 한다. 기도로 울지 않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기도로 울지 않는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기도로 울지 않는 성도는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한 번 들어온 공격은 두 번 세 번 쉽게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 국가와 공생하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현실적인 타협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방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타협하는 교회는 역사를 창조적으로 이끌어갈 희망이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
사순절 기간이다. 세속적인 때로 가득 채워진 나를 씻어내는 정결의 시간으로 드리고 싶다. 참된 기도로 시작하고 싶다. 나는 울고 싶다. 주님, 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적셨던 것처럼, 부족한 목사에게도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적실 수 있는 그런 순결한 은혜를 허락해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