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磐石) 같은 말씀이 박석(薄石) 조각으로 전락한 시대

  • 입력 2021.04.20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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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7)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주님의 장중에 있는 인생들

당신은 결단코 주님의 손 밖을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의 존재와 삶이 그러하다. 당신의 계획과 꿈과 비전이 모두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존재함에서부터 사멸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모든 것은 주님의 장중에 있다. 당신의 ‘시대’를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생애로 보면 된다. 한 인간의 일생은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당신의 한계이면서 당신이 안심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하나님의 손 안에 보호받는 당신의 인생을 누가 감히 망가뜨릴 수 있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한 번 구부러뜨리면 뉘 감히 그것을 바로 펼 수 있겠는가? 이지러진 달처럼 모자란 것을 우리 스스로 채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전도자의 외침에 귀 기울여보라!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15)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하심 속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꿈을 마음껏 펼치고 추구할 수 있다. 당신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인 이 세상에서 당신은 보다 낫고 확실한 세계를 꿈꿀 수 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자신을 인정하는 만큼 꿈은 단순히 꿈에 머무르지 않고 가능의 씨앗으로 움튼다. 이 시대의 절망적인 상황을 바로 깨닫고 세상을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대업에 당신은 나름대로 할 일이 있다. 또한 능히 그 일을 이룩할 수가 있다. 이 시대를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이 공존했던 그 시대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절망과 희망이 포물선을 긋는 이 시대의 모습은 그때와 본질적으로 다를 리 없다. 이제 성경의 타임머신을 타고 함께 시대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대언자여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날씨는 분간해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음은 모든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만큼 인간이 어리석고 현실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해 멀리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징조는 한 사람의 일생과 비교할 때 너무 큰 장면이다. 시대의 징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주신 표적이다.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에 동참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다. 하늘이 붉고 구름으로 뒤덮이면 궂은 날씨를 예감해야 하는데 폭우를 동반한 악천후에 천둥번개가 천지를 가를 것 같은데도 잠시 후면 지나가버릴 소나기 현상이라며 쾌청한 미래를 노래하는 사이비 예보관들이 당신 주변에 포진하고 있음은 참으로 재앙이다. 성경을 펼쳐보라! 노도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격랑을 내다본 선지자들은 지침 없이 경고음을 발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참 선지자들이 허튼 소문으로 군중을 혹세무민한다 하여 조롱하며 핍박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의 경계를 위해 기록된 성경의 사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실패를 판박이해서는 아니 된다. 분별을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야 한다. 세상에 뜻 없는 소리가 하나도 없듯 천지에 징조 없는 현상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의 분노이든지 인위적 파괴 행위이든지 모든 징조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 있다. 파국의 현장에서 새로운 세계의 발흥을 보듯 평안한 시대에 붕괴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은 대언자의 능력이며 당연한 사역이다. 끝의 도래를 알리는 비상한 재앙은 징조를 동반한다. 땅 끝에서 일어날 대풍도 징조에 실려 온다. 다니엘이 예언한 피난의 때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던 징조로 예표 되었다. 주님은 마지막 시대에 동반할 징조로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말씀하셨다. 물 심판과 불 심판으로 옛 세상을 정결케 할 갱신의 절정을 예언하셨다.

한쪽에는 심판의 전조로 가득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대미문의 부흥이 세계를 휩쓴다. 늦은 비 성령의 부으심은 그 징조의 중심에 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시대의 표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시대의 징조는 때에 따라 인간 세상과 우주 만물에 드러날 것이다. 하나의 징조를 위해 선행될 무수한 징조들은 성도들의 시선을 징조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 아니라 마지막 징조의 주체이신 주님께 맞추도록 함에 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것은 대언자의 몫이다. 기도의 등불을 밝히고 말씀의 횃불을 높이 쳐든 하나님의 종들이 징조를 먼저 보고 깨달아 경고의 나팔을 불되 그 세기를 정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풍향계를 살펴 바람의 방향을 알듯이 시대의 풍향계인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말씀의 능력과 영광이 찬탈된 시대

이 시대는 말씀이 아주 희귀하다.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이 차고 넘치지만 정작 말씀다운 말씀을 찾아보면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듣고 보려면 전후좌우 사방 천지에 말씀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말씀 부재를 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말씀 까닭이다. 말씀 중심의 바른 영성은 뒤틀려지고 이상한 영성들이 사이비 진리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이단의 독기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통의 옷을 걸쳐 입고 다른 복음, 괴이한 진리를 퍼뜨리는 암세포 같은 세력이 더욱 문제이다. 그렇다. 우리가 이 시대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시대의 영성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져버렸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통로였던 말씀의 다리가 붕괴되어버렸다. 이음새 역할을 하던 말씀이 끊어져버렸다. 무슨 말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일이 기억에도 새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상적이었던 말씀이 신화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말씀에 의한 역동적인 삶이 사라지자 말씀의 하나님마저 희미해졌다.

삶에서 생명이 식어지면 신화가 머리를 쳐든다. 사실이었던 말씀이 이야기로 뒤바꾸어져버린다. 이 시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삶이 없기에 에녹의 신화가 선명해진다. 이야기가 선명해지면 역사가 희미해진다. 신화의 달빛에 가려 역사의 태양빛이 숨어버린 꼴이다. 각종 이야기로 넘쳐나는 오늘날의 강단에서는 말씀이 사실보다 신화로 취급받기가 쉽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고 전 세계 오지까지 전달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말씀이 흔한 시대인데 말씀이 희귀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기독교적인 분위기는 강해졌는데 기독교의 정신이 메말라버렸다는 말이다. 성경의 문자는 풍성해졌지만 말씀의 생명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홍수처럼 세상을 뒤덮어도 그에 걸맞은 하늘의 기쁨이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 천지사방에 가득해도 정작 세상을 뒤바꿀만한 능력도 없고 영혼을 뒤흔들만한 어떤 힘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을 빙자한 말씀들이 난무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복음이 지천에 깔렸어도 하나님의 “그 말씀”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찬탈 당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말씀을 찬탈했단 말인가? 말씀 사역자들이 그랬다. 말씀을 수종 드는 사역자들이 말씀의 영광을 훼손함으로 ‘그 말씀’을 찬탈해버린 것이다. 메신저들이 자의적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말씀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진리와 복음의 핵심에서 동떨어진 이상야릇한 설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어 지치고 상한 영혼들이 복원될 길을 가로막고 있다.

반석(磐石) 같은 말씀이 박석(薄石) 조각으로 전락한 시대

하루에도 수천, 수만 절의 말씀이 설교단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건만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나 그에 합당한 권위가 보이지 않는다. 말씀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더 없는 갈증을 느낀다. 수천 언어, 수만 방언으로 말씀이 선포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언어, 천국의 방언은 들리지 않는다. 왜일까? 하나님도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영존한데 인간의 언어에 실린 말씀에 거룩한 능력이 사라지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화려한 껍질은 있지만 말씀의 알맹이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할 수 없음은 당신의 양심이 스스로 증거하는 바이다. 말씀의 해석자들이 말씀을 말씀답게 열어 보이지 못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처럼 말씀의 전령자들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 까닭에 말씀은 그 고유한 영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의 샘터에서 더없는 기갈을 느끼고 말씀의 밥상머리에서 굶주림을 경험해야 한다.

사람들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한 말씀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바다로 숨고 높은 구름 사이로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만 같다. 그래서 사람들의 갈증은 더해만 간다. 슬프고 답답한 일이다. “그 말씀”을 향한 순례의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폭풍우가 행진을 가로막듯 조잡한 말씀 풀이들이 참 말씀을 접하지 못하게 만든다. 설교답지 않은 설교, 결코 설교일 수 없는 설교들이 오늘의 강단을 메마르게 하고 신자들의 귀를 마비시켜 버리고 말았다. 반석(磐石) 같은 말씀이 쓸모없는 박석(薄石) 조각으로 화해버렸다.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듯한 영혼들을 향해 외치는 여호와의 말씀에 만담과 시사 해설이 뒤섞여 “그 말씀”이 조롱당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말씀 풀이가 말씀의 맛을 빼앗고 반듯한 말씀을 비틀어버린다. 생명이 해체되어버린 말씀은 덩그러니 껍질만 남은 흉측함과 기괴함을 보인다.

대중의 박수에는 민감하지만 성령의 소리에는 둔감한 시대

오늘의 강단을 직시하라! 세상 풍조와 시세에 영합한 말씀들이 판을 치고 있다. 듣기에 좋기만 할뿐 영혼을 전율시키는 그 무엇이 없다. 말씀을 소리 높이 외치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다. 말씀이 머리에 가득하고 입술에 가득하고 테이프와 CD에 실려 멀리 멀리 퍼져가지만 사람들의 영혼에 와 닿지 않는다. 메아리조차 죽어버렸다. 행함이 없는 말씀으로 인해 현대 교회와 신자들의 삶은 마치 늦가을의 메마른 잎사귀나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되어버렸다. 바닷물은 조수 간만의 차이로 인해 썰물이 되었다가도 만조가 되면 밀물이 되어 해변으로 밀려오는데 멀어져간 말씀은 도통 보이지를 않는다. 말씀이 희귀하니 영혼은 숨막혀하고 삶은 더욱 절박하기만 하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말씀을 찾아 방황하지만 말씀의 파편마저 종적을 감춰버린 세상 한복판에서 의인의 영혼은 뜨거운 피로 절규한다. 산을 향해 외치면 울림이 메아리 되어 돌아오지만 한 번 자취를 감춘 말씀은 여태 돌아오지 않으니 술람미 여인을 기리며 “돌아오고 돌아오라!” 귀거래(歸去來)를 호소하던 솔로몬 왕처럼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말씀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는 말씀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말씀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찬탈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되찾을 수 있기나 한가? 가능하다면 누가 그 막중한 일을 감당할 것인가? 빼앗긴 여호와의 영광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 영원할 것 같은 목마름은 어떻게 해갈해야 하는가? 말쟁이는 많아도 진지한 말씀의 수종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중의 박수 소리에는 민감하지만 성령의 속삭임에 둔감한 사이비 교사들이 득세한 교계에 서슬 퍼런 칼날의 말씀, 담즙보다 쓴 말씀, 내리치는 반석과 두드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을 쏟아낼 자 그 누구인가? 대중의 조롱거리가 되며 무기력하게 두드려 맞고 쓰레기처럼 버려질지라도 심판과 경고의 나팔을 쉼 없이 불어대고 말씀의 깃발로 전신을 감싼 채 신성한 나무 강단 위에 설 자 그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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