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는 말씀 사랑

  • 입력 2021.05.18 11:21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5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주님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는 말씀 사랑

 

말씀 사랑은 주님 사랑의 증거이다. 주님을 사랑함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가? 주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주님을 사랑함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있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느낌도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과연 당신의 존재와 삶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질문이다. 느낌의 형체와 본질은 무엇이며 고백의 실체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너무 교리로 이념화하고 특출한 경험으로 신령화시켜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실 뿐 아니라 보이는 말씀이시다. 물론 말씀의 본체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말씀을 성육신의 과정을 통해 보이는 말씀, 들리는 말씀으로 구체화시키셨다. 보이는 말씀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역사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들리는 말씀이 바로 정경으로 다듬어진 성경이다.

다시 말해 주님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말씀에 대한 실질적인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거꾸로 표현하면 말씀을 가까이 함이 주님을 가까이 함이며 말씀을 사모함이 곧 주님을 사모함이다. 말씀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요 말씀의 강도가 곧 사랑의 강도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을 경시함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말씀 탐구에 게으른 사람치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말씀에게 느끼는 거리감은 곧 하나님과의 거리감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다.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어 감히 묻는다. 말씀 읽기가 정말 좋은가? 예전에는 학교나 직장에 제출하는 서류마다 취미란 항목이 꼭 있었다. 특별한 취미가 없을 때에는 대충 산책이나 독서라 적곤 했다. 그 독서 대상에 과연 성경이 들어있기나 한 것인지....... 성경을 소설책 읽듯 재미있게 읽는다든지 시를 읽듯 마지못해 성경을 펼치는 것은 아닌가?

 

주님만이 주님 사랑의 한 가지 이유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가? 분명히 당신도 주님을 사랑한다. 말씀을 대함과 연관하여 말하자면 당신의 사랑에는 다만 순결함과 열정이 부족하다. 당신은 왜 주님을 사랑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가? 주님이 주신 은혜가 귀하고 주님이 주신 축복을 누림이 감사해서 사랑하는가?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이루신 그 모든 일 때문인가? 주님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인가? 그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게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근본 원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주님 사랑에는 좀 더 진실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사랑의 이유에 제대로 답변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에서 은혜가 사라질 때는 어떡할 텐가? 큼지막한 축복 덩어리가 한 줌의 티끌로 변해버려도 한창 누릴 때와 똑같은 정성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 그러겠노라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신하다가 실제 상황에서 변하곤 했다. 평안할 때의 고백은 환난의 때에 믿을 것이 못된다.

주님이 사랑의 이유이다. 주님만이 단 하나의 이유여야 한다. 그 외의 온갖 좋은 것들은 단지 덤에 불과하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홍수의 물결로도 끌 수 없는 뜨거운 사랑, 열 목숨이라도 한 사랑을 위해 바치고 싶을 정도의 애끓는 사랑, 그런 사랑을 말한다. 이는 사람이 느끼는 첫사랑의 경험을 훨씬 능가한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유지함이 관건이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주님을 잠시 생각만 해도 마음이 꽉 차오르는 듯 한 감격을 느껴야 한다. , 주님! 내 주님! 살아계신 예수님! 주님을 이렇게 연호함이 우리의 호흡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말씀을 잠시라도 떠나서 산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말씀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측정하는 정확한 도구다. 말씀이 충만하면 양식이 없어도 풍년이다. 말씀에 젖어 살면 목이 말라도 생수의 은혜 가운데 거한다.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못함이 기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 기갈이다. 말씀과 거리를 두고 살았던 우리가 지금 기근과 기갈의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말씀의 번식도 말씀의 기근도 하나님 주권

말씀 부재는 시대적 현상이다. 말씀부재라는 초유의 상황은 대충 비켜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 같은 폐쇄상황이다. 이제는 스스로 찾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말씀이다. 하늘문이 닫혀감으로 가진 자는 더욱 넉넉해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지닌 것마저 빼앗기는 때이다.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해지고 더러운 자는 더욱 더러워지는 영적 방치(放置)의 시대이다. 두려운 때가 이르렀다. 버려지고 무시당했던 말씀이 그 말씀을 함부로 대했던 교만하고 무지한 영혼들을 심판할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 이 때에 사람들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인간의 교만과 불신이 주체가 되어 말씀이 거부당하고 농락당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에 어떤 긍정적 반응도 하지 못하도록 아예 막으셨다. 생각해 보라! 기근을 사람이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보내셨다. 전염병을 사람이 퍼뜨렸는가?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용하며 결과 짓게 된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 반드시 있었다.

말씀의 파종도, 말씀의 번식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말씀의 기근이나 기갈에도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말씀을 일으키실 때는 왜 그리 하셨으며 이제 와서 말씀을 거두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인류의 영혼을 놓고 변덕을 부리심인가? 아니면 타락한 인간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심인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떠난 인간이 돌이키기를 오래 기다리셨고 실제 돌이키려고 무진 애도 쓰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닌가? 말씀의 예표인 제사제도가 통하지 않자 자신의 종들을 나팔과 북 삼아 불고 두드리셨다. 급기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요지부동이었다.

 

말씀 사역자를 보내심은 하나님 사랑의 동기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이 말씀을 사모해서 추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사람을 추격한 것은 말씀이었다. 왜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이 보냄 받아야 했을까? 죽임 당하고 멸시 당함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종들을 보내야만 하셨을까? 한편으로는 인간 영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본성적 사랑 때문이요 다른 편으로서는 맡긴 것을 찾기 위함이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갈망이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을 세상에 보내도록 만들었다. 이 하나님의 심정을 그의 종들이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세상 도처로 방황하는 영혼들을 꼭 기억해야 한다.

포도원 소작인에 관한 비유를 기억하는가?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완벽한 시설을 갖춘 후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외국을 다녀왔다. 포도 수확 시기에 맞추어 실과를 얻기 위해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하나는 구타하고 하나는 돌로 치고 하나는 죽였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농부들의 반응은 똑 같았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다. 주인의 얼굴을 봐서라도 아들만은 잘 대하리라 여겼다. 허나 농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상속자를 잡아 죽여 이참에 아예 포도원을 접수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농부들은 작당 모의를 하고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이제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남은 일은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성실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파송되어 구타당하고 돌에 맞고 죽임을 당한 것이 하나님의 실과를 돌려달라고 외쳤던 예언자들의 운명이었다. 주인의 아들처럼 주님이 오셨음에도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였다.

 

말씀의 권능과 위엄을 되찾는 회복 운동

비유의 진정한 상황을 주시하라! 우리는 이 상황 이후를 살고 있다. 주인의 아들이 억울하게 돌아가신지 어언 2천년이 지났다. 악한 농부들에 대해 오래 참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심판과 추수 밖에 남지 않은 시대를 당신은 살아간다. 이것이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원 뜻을 전하려는 말씀의 종들을 핍박하고 못 살게 구는 현세의 속성이다. 사탄은 이 세상 임금이라 불린다. 이 세상 신이라 추앙받는다. 그가 하는 최고의 사역이 무엇이겠는가? 말씀 진멸이다. 자신이 진멸되기 전에 이 땅에서 말씀의 씨앗을 깡그리 없애겠다는 일념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가 못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사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성심성의를 다 해서 말씀 박멸 운동을 펼친다. 이 거대한 음모에 역습을 가해야 한다. 정공법으로는 우리의 약점과 싸움의 패턴을 이미 파악한 저들을 당하기가 어렵다. 요처마다 미리 매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습작전에 투입될 요원으로는 역시 말씀과 기도의 맹훈으로 철저하게 준비된 용사급 싸움꾼들이다. 말씀을 향한 지극한 사랑만큼 사탄을 극도로 증오하는 자들이다. 모략에는 모략으로 임해야 한다. 나와 당신에게는 비열한 모사꾼인 사탄을 대적한 기묘와 모사, 곧 영존하신 아버지가 계시다.

말씀을 말씀답게 보존하고 말씀의 권능과 위엄을 되찾는 회복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려면 그런 의식을 지닌 본인부터 성경 알기에 힘쓰고 애써야 한다. 일가견을 이루진 못해도 성경에 대한 기본 상식의 섭렵은 필수적이다. 실제 성경 읽기에 들어서면서 우선 자신에게 적합한 번역본을 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모든 번역본에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자신에게 편하고 유익한 것으로 선택하되 다른 번역본도 필요하면 살핀다. 말씀을 그저 훑어보기 식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뜻을 살펴 해석의 지평을 열려면 좋은 안내서나 성경교사 같은 도우미가 필요하다. 좀 더 나아가 성경 각 책을 깊이 있게 연구하려면 탁월한 참고서 한두 권과 경험 있는 성경 연구자와 짝을 이루어 정기적으로 만남도 좋은 방법이다. 무엇보다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든든한 교사로 임재하심이 크나큰 위로가 된다. 말씀에 합당한 영광을 사모함으로 치열하게 말씀 탐구의 길을 걸으며 죽을 각오로 사탄 대적에 집중하리라!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