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 그리운 건 말씀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 입력 2021.05.11 14:02
  • 수정 2021.05.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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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50)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옛날이 그리운 건 말씀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옛 시대에는 말씀을 들으면서 오열하고 가슴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따지고 보면 반세기 전후였으니 그리 오랜 과거도 아니다. 그럼에도 너무 달라진 현대교회의 영적 현실로 인해 파노라마처럼 저절로 펼쳐지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은 흐르고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말씀을 들었다. 말씀에서 불이 떨어지고 그 불길에 휩싸여 청중들은 마음에 감춘 죄악 덩어리들을 토해냈다. 엉금엉금 마룻바닥을 기면서 통곡했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얼굴은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영혼이었다. 설교자도 울었고 청중도 울었다. 때로는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와 천둥소리가 회개의 현장에 효과음을 내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나타나고 천국의 즐거움은 빛처럼 찬란했다. 우리가 때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것은 옛날이 사무치게 그립기 때문이며 어느 순간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은 말씀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이다. 아름다웠던 추억이 긴만큼 그때를 향한 우리의 동경심 또한 기다랗다.

설교자의 입술은 그야말로 황금의 입술이었다. 어떤 때는 그 입술에 번진 핏빛을 보면서 십자가의 사랑과 권능 앞에 무릎 꿇어야 했다. 말씀이 거센 불길이 되어 청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고 그들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가슴을 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마룻바닥을 거세게 쾅쾅 두드렸다. 말씀의 예리한 칼날이 번득일 때마다 베인 양심에서 피보다 진한 회개의 눈물이 샘물처럼 솟구쳤다. 말씀을 기막히게 해설하거나 감동적으로 적용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때는 단지 말씀을 읽기만 했는데 성령이 회오리처럼 회중들을 휩쓸기도 했다. 잊지 못할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전도사 시절이었다. 섬기던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철야 기도하던 첫 날 저녁에 조용히 본문인 갈 2:20절을 읽어나갈 때 갑자기 한 청년이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성령이 역사함을 직감한 난 준비한 메시지를 포기하고 바로 기도회를 이끌어나갔다. 모두 큰 은혜에 잠겼다.

옛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말씀을 사랑하고 아꼈다. 그 정성이 지극함을 이루었다. 읽어야 해서 읽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말씀이 좋아서 읽었다. 자나 깨나 말씀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생각의 언저리에 맴도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눈만 뜨면 말씀이 기억되고 말만 하면 말씀이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잠들기 직전까지 말씀이 입가에서 중얼거려졌다. 심지어 잠꼬대에도 말씀이 섞였다. 말씀에 미쳤다고 표현할 만큼 생활 자체가 말씀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에 받쳐 든 우산처럼 말씀이 삶을 뒤덮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경 읽기에 그대로 나타났다. 길을 걷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에서도 성경을 비춰가며 읽었고 호롱불 받쳐 들고 등잔 불빛에 머리카락을 태워가며 읽었다. 흔들리는 촛불의 방향을 따라 밝은 쪽에다 말씀을 비쳐가며 춤을 추듯 그렇게 말씀을 읽었다.

 

가난한 시절에 방안 벽 위쪽에 작은 틈을 내고 전구 하나를 두 집이 나눠쓰던 시절에 불이 언제 꺼질까 조마조마하며 성경을 재빠르게 훑기도 했다. 가히 반딧불과 눈빛을 등불 삼아 성공한 형설지공(螢雪之功)에 비할 만하지 않은가? 소를 타고 가며 책을 읽은 승우독서(乘牛讀書)는 웨슬리가 말을 타고 전도하러 다닐 때 즐겼던 독서를 연상시킨다. 웨슬리가 책만 읽었겠는가? 성경을 읽었음도 분명하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성경 찬송을 휴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원하기만 하면 어디서든 성경을 대할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지하철을 타면 책을 펴서 읽는 사람들 중에 성경 읽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모두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보느라 고개들을 숙이고 있지만 대개 게임을 하거나 영상물을 보지 않으면 카톡이다.

성경을 찾아 읽는 사람은 눈을 씻고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신실한 말씀 탐구자들이 이 시대에도 우리 주변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소수에 불과하고 전반적으로 말씀의 사막화가 한참 진행되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인간의 오만함에 앞장 선 것이 말씀 가까이에서 섬겨 사는 이라면 어쩌겠는가? 어찌 이를 시대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안타깝게도 전반적인 흐름이 말씀을 멸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처해 있다. 이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란 실로 벅차다. 웬만한 신앙적 결단이 아니고는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있어 확연한 결기로 임해야 한다. 이 상황이 화나지 않는다면 신앙의 기상마저 죽어버린 탓이다. 말씀으로 구원받고 말씀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이 외면당하는 상황에 분노를 느끼지 않아서야 말이 되는 노릇인가? 필요하다면 채찍이라도 들어야 한다.

말씀으로 살아나야 영혼을 살릴 수 있다.

잡다한 책들을 보기 전에 성경에 눈길을 돌려라! 교과서나 참고서보다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것은 성경 읽기다. 성경은 장식용이나 예배용이 아니며 더더욱 설교를 위한 인용문이 아니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이다. 적어도 하루 한 끼씩 섭취해야 할 생명의 양식이다. 먹지 않으면 굶고 계속 굶으면 영락없이 죽는다. 죽는 사람의 마지막 단계는 모두 공통적이다. 일단 곡기가 완전 끊어지면 죽음 직전에 왔음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을 계속 읽지 않았지만 버젓이 살아있는데 무슨 생뚱맞은 시비냐고 당신은 반문하는가? 당신의 영혼이 죽은 것이다. 육신은 살았어도 엄밀히 영혼은 죽었다. 당신은 이미 죽었기에 자신이 죽어있는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죽은 자가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찌 알 것인가? 살아 있는 자만이 자신이 살아있고 죽어가는 지를 알 수 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이 먹고 싶지 않다면 영혼이 병든 증거다. 밥을 잘 먹던 사람이 갑자기 식욕을 잃으면 병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영혼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뇌가 인식을 할 수 없다. 영혼의 상태를 검진하기 위해 대단한 검사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매일 말씀을 읽는가의 여부만 보아도 명확히 알 수 있다. 당신이 반박할 말이라도 있는가? 너무 단순한 처방이라 생각 드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단순한 처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가르쳐주신 가장 정확한 검진법이다. 명심하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이는 과장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다.

성경 통독과 암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한두 말씀이 아니다.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산다. 인간의 복잡한 신체 구조처럼 인간은 다양한 말씀들을 섭취해야 생명력이 풀가동하도록 되어 있다. 주님께서 신명기에 있는 이 말씀을 인용하신 시점이 절묘하다. 40일 금식으로 주려 있는 주님에게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배고픈 본인부터 먹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라며 세속적 구세주로 길을 걸으라는 시험이었다. 이 사탄의 첫 시험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인 말씀이 바로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었다. 주님은 말씀을 펴서 읽지 않으셨다. 주님은 암송하셨던 말씀을 적시에 인용하여 터뜨리신 것이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당장 배가 고파야 정상이다. 성경을 펼쳐라! 스마트폰에서 좋아하는 번역본을 따라 성경을 열어라! 그리고 주린 배를 말씀으로 채워가라! 그것이 영혼을 살리고 살찌워 건강을 유지해가는 비결이다.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대언자의 입술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다.

대언자가 자신만을 위해 말씀을 취하며 영혼을 구하는 일에 정작 무관심하다면 이는 씻지 못할 죄악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말씀을 받아먹으며 양떼들에게 그 양식을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삯군이 아니면 화의 목자다. 목양이란 양떼를 돌보는 일이다. 양젖과 고기를 먹음으로 생존을 이어가면서 양떼를 돌보지 않는 것은 바른 목자의 길이 아니다. 살리려면 먹여야 한다. 양떼가 살아야 목자도 산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성경에서 살필 수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자, 제사장, 왕 급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목자 되지 못함을 강하게 책망하셨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대언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요 양떼는 백성이요 그들이 먹여할 할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의 대언자인 메신저들이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높게, 넓게, 그리고 깊이 묵상할 말씀, 당신과 나의 금언(金言)이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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