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소유한 자, 말씀에 소유당한 자

  • 입력 2021.05.04 15:45
  • 수정 2021.05.0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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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49)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말씀의 영에 완전히 포박된 자

말씀을 가까이 하고 영혼을 온전히 말씀에 잠기게 하려 함은 말씀을 장악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에 장악되기 위함이다. 말씀의 포로 됨에 암송은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다. 말씀 암송은 암송자가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기보다 암송한 만큼 말씀에게 소유되었음을 의미하지만 암송의 유익은 결코 적지 않다. 암송함으로 인해 성경을 따로 펼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전천후의 묵상이 가능하고 인생의 곤고한 환경에서 부딪히는 말씀의 횟수와 강도도 분명하고 강하다. 암송, 묵상, 실행의 과정을 통해 말씀에의 복종이 보다 수월해지고 말씀에 사로잡힐수록 진리에 접하기가 용이하며 진리를 알고 행함에 아무 마찰이 없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말씀은 새벽이슬처럼 스며들거나 천둥의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말씀의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에 근접하여 문자 뒤에 숨어있는 실체, 성경의 자간과 행간 사이를 흐르는 진리의 형체에 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메신저의 반신상이 뚜렷해진다.

심판의 나팔소리 은은히 울려 퍼질 때, 희미한 그림자가 뚜렷한 실체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짙은 안개가 거두어져 사위(四圍)가 온통 고통의 현실로 뒤덮일 때, 경고의 징조들이 심판의 파편으로 땅의 거주자들에게 알알이 박혀올 때 심장을 꿰뚫는 말씀이 아니면 그 뉘가 감히 종말의 전신상을 마주 대할까?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당신은 정신 차려야 한다. 말씀의 전령자이기에 말씀의 영에 완전히 포박되어 세상의 온실을 벗어나 광야와 들판에 서야 한다. 땅 끝에 서서 숨겨지고 죽어버린 “그 말씀”을 소리 높이 외쳐야 한다. 세상의 파멸을 앞둔 나와 당신은 긴장 속에서 말씀을 준비하여 경계의 자세로 외쳐야 한다. 그래서 닫히는 천국문을 짧은 순간이라도 저지시켜야 하고 열리는 지옥문을 할 수 있는 한 막아내야 한다. “그 말씀”의 선포로 하나님의 가슴을 인간의 영혼에 직결시켜주어야 한다. 말씀에 전무(專務)하는 말씀의 사람들이 티끌처럼 일어나야 한다. 세상이 죄로 들끓을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길 고대한다. 오래전부터 “그 말씀”에 굶주려왔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세상 만민을 심판하실 영광의 날이 이르기 전에 판세를 뒤집을 말씀의 격렬한 부흥이 회오리처럼 일어나야 한다.

말씀을 소유한 자, 말씀에 소유당한 자

천사들의 옹위(擁衛) 속에서 주님이 영광의 구름을 타고 이 땅에 강림하시기 전에 그분의 말씀이 바다를 뒤덮은 물처럼 세상을 뒤덮게 해야 한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말씀이 바다를 뒤덮은 물처럼 가득 차게 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의 온전한 섬김으로 말씀이 그 숨겼던 영광의 자태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주님의 권위가 권위로, 말씀의 영광이 영광으로 나타나야 한다. 내게 작은 소원이 하나 있다면 말씀에 완벽히 포로 된 존재이길 바란다. 말씀을 소유했다 여기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하면서 순전히 말씀에 소유당하기 원한다. 말씀에 온전히 짓눌려 아예 자아의 형체가 사라진 그런 인격이고 싶다. 그래서 가루가 되고 물이 되어 말씀으로 온전히 빚어진 새로운 생명이고 싶다. 이룰 수 있는 바람이라면 마지막 숨까지 몰아쉬며 바른 말씀을 전하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쉼 없이 토해내던 예언자들의 삶이 그립다. 거부되고 유린되고 무시당해도 주님께 속한 시대를 읽는 ‘그 말씀’을 전하고 싶다. 지나가는 시대를 외면하고 다가오는 시대를 맞이하는 말씀을 당당히 외치고 싶다.

거짓 예언자로 내몰리고 매국노로 낙인찍히고 교회의 파괴자라고 오인 받을지라도 경고의 말씀을 경고의 말씀으로, 심판의 예언을 심판의 예언으로, 저주의 선포를 저주의 선포로 부르짖는 하나의 뚜렷한 소리이고 싶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상의 기린아는 사막의 은둔지로 몰려든 군중들에게 잠깐 회개의 도를 외쳤지만 머지않아 살로메의 춤 값으로 참수 당했다. 의의 증거자였기에 불의한 영혼에 의해 제거당해야 했던 그의 마지막은 타협하지 않는 영혼의 올곧음을 붙들고 살려는 메신저의 삶 속에 지워지지 않을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비수 같은 그의 삶과 사역을 흠모한다면 가볍지 않은 그의 죽음 또한 껴안아야 한다. 눈물로 순교자의 생애를 찬양하면서 순교를 어리석게 여기는 자가당착의 삶과 사역이 되지 않도록 모든 메신저는 스스로에게 정직할 필요가 있다. 비상한 시국을 맞아 찌르는 칼과 꿰뚫는 화살 같은 말씀의 각을 예리하게 만드는 메신저만이 이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참혹한 심판의 현장을 유월(逾越)할 비상(飛翔)의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진리의 전달자로서 의의 증거자인 메신저는 뒤쳐질망정 결단코 ‘외치는 자의 소리’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낙오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동류들의 비웃음을 살지라도 참 도(道)가 머무는 그 자리에 물러섬 없이 머물고 싶은 것이 필자의 작은 소원이다. 그래서 기도한다.

"말씀이신 주님이시여! 말씀의 옷자락으로 종의 몸과 영혼을 덮으소서! 허물을 제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소서! 몇 겹이고 싸고 싸서 정제되고 다듬어진 말씀의 용모를 취하게 하옵소서! 말씀의 용사들을 휘몰아 오셔서 이 소란한 땅과 하늘을 진정시키고 주님의 뜻이 천하를 틀어쥐게 하옵소서! 말씀이 뿌리를 내려 쓰고 달콤한 열매를 맺으며, 오직 말씀만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유일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의 말씀이 세상에 가득한 온갖 거짓과 인간의 오만과 허영과 탐욕을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허무소서! 허무소서! 거짓된 저의 성채들을 허무소서! 울타리를 제하고 담벼락을 무너뜨려 가려졌던 저의 허물을 죄다 까발리며 낱낱이 도말하소서!"

당의정(糖衣錠, Sugar-coated tablet) 같은 말씀

말씀의 홍수 속에서 느끼는 말씀의 기갈은 더욱 고통이다. 성경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씀을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씀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교회마다 매 주 CD로 제작한 말씀이 넘쳐나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실로 말씀의 바다가 따로 없다. 이름 난 설교자의 말씀도 있고 무명의 설교자가 올린 말씀들도 있다. 클릭만 하면 하루 종일 말씀을 듣고 볼 수 있는 세상이다. TV를 켜면 눈에 익숙한 설교자들의 말씀이 정기적으로 방송된다. 아직도 테이프로 말씀 듣기가 더 편하다면 녹음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런 현상이 더 없는 축복인 것 같지만 자칫 너무 넘쳐서 되레 부족한 것보다 나을 게 없다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항상 달 수 없는 것이 말씀이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쓴 맛보다는 단 맛, 신맛보다는 부드러운 맛을 선호한다. 달디 단 말씀에 익숙한 영혼이 쓴 말씀을 감당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천상의 천군천사가 환호하는 말씀보다 대중에 환영받는 메시지가 사람들을 길들여나갈 때 메신저는 진리의 나팔 되기보다 대중의 입이 되기 싶다. 우려할 일이다.

입에는 쓰나 속에서 달게 변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입에는 달아도 속에서 쓰게 변하는 말씀도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천사 중에는 기쁜 소식을 평화롭게 전하는 가브리엘도 있지만 검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미가엘도 있다. 왜 말씀을 꿀과 양식만이 아닌 검과 몽둥이로 비유했을까? 말씀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요소가 있어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오늘의 강단에 많이 부족한 것이 쓰디쓴 말씀이다. 강단마다 넘쳐나는 것이 사탕수수 같은 말씀들이다. 회개와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너무 써서 대중들이 삼키기 어려워한다면 부드러운 표현으로 감싸면 된다. 아이에게 쓴 한약을 먹일 때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옆에 사탕 한 알을 준비해두지 않았던가! 그렇다. 사탕수수나 설탕덩어리가 아니라 쓴 내용을 단 표현으로 살짝 입힌 당의정(糖衣錠, Sugar-coated tablet) 같은 말씀이면 괜찮지 않은가?

말씀의 홍수와 말씀 능력의 부재(不在)의 역설

혹 조난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간혹 조난 기사를 통해 그 상황의 지독함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항해 도중에 조난당한 상황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이 난파당해 겨우 나무토막 하나에 몸을 기대어 표류하고 있다. 섬은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배도 없다. 며칠을 바닷물에 떠 있어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는 중이다. 파도는 잦아졌지만 힘이 빠져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 폭풍이 휘몰아치던 그날 밤의 정경과는 너무도 다른 평온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온다. 하늘은 파랗고 물결은 잔잔하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도저히 목이 타서 견딜 수 없다. 헐떡거릴 힘도 없어 마른 침만 계속 삼킨다. 주위 사방이 물 천지이건만 마실 수가 없다. 죽을 것 같아서 바닷물로 혀에 약간 적셔보지만 목은 더 타들어간다. 물이 있어도 마실 수 없는 물이요, 물을 뻔히 바라보면서 목이 말라 죽어간다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말씀은 넘쳐나는데도 말씀이 없어 영혼의 기갈 증세를 호소하는 현상이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본인이 정작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곧 슬픔이다. 실로 말씀의 홍수 속에서 겪어야 하는 말씀 부재의 현실은 형언키 어려운 고통이요 슬픔이다. 항상 말씀을 들으면서 늘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 신자의 고통이라면, 언제나 말씀을 전하면서 실제 적용 상황에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치 못함은 모든 메신저들의 공통된 아픔이요 슬픔이다. 이런 반갑잖은 역설이 필자의 전생에 걸쳐 있음은 숨길 수 없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폐일언하고 하나님은 말씀 자체이시다. 말씀에서 하나님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말씀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은 것이다.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술은 어느 시대에 비해 뛰어나지만 영혼을 깨우는 각성제의 효력이 사라졌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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