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뜻과 사상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 말씀
이 시대는 말씀의 전달자를 사칭한 말씀의 도적들로 들끓고 있다. 환전상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로 붐볐던 주님 당시의 모습처럼 교회 안에서 진리를 바꾸고 예배를 빌미로 예배정신을 매매하느라 정신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편이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말씀 선포의 직(職)은 성직을 사고팔던 중세의 죄악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감히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미끼로 악용하면서도 당당하다. 진리의 말씀을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남용하면서 의기양양해한다. 말씀의 도적들은 말씀의 부드러운 해석으로 사람들을 책망하는 대신 위로하기에 바쁘다. 그들은 한 마디로 악랄한 영혼 사냥꾼이다. 그래서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고 죽지 않을 영혼을 죽인다. 오늘도 “그 말씀”을 빙자한 거짓 말씀의 해석자들로 인해, 허가 받은 말씀의 도적들로 인해 말씀의 강단이 초토화되고 훼파되어 감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 거짓된 말씀의 해석자들은 성경을 빙자해서 자기의 말을 전한다. 자신의 사상과 뜻을 전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자기식대로 적용하고 자기식대로 가감 수정하여 소위 자기방식의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날마다 죽고 살기를 반복하면서 이루었던 바울의 “내 복음”과 질적으로 다르다. 형형색색의 욕심으로 치장되고 분장된 그럴듯한 말씀들을 현대적 상술과 기교로 잘 포장해서 비싼 값에 팔아넘긴다. 성령의 감동 대신에 인간의 감정을 건드려 눈물샘을 자극하고 웃음보를 터뜨리며 오감의 만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도구들을 총동원한다. 오늘 활성화된 예배의 현장에 인위적인 요소를 제하고도 여전히 영혼을 뜨겁게 데울 성령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존재할까? 민낯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더불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충일함과 만족감, 가슴 벅참과 영혼의 비상 같은 황홀함이 느껴지는가?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에 임하는 권능의 말씀
말씀의 해석자들은 반드시 말씀의 영에 접해야 한다. 말씀의 영이 없는 말씀 풀이는 위험하고 해롭기 짝이 없다. 창조의 능력을 무시한 조작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비록 갈고 닦은 한 편의 말씀이 인간의 심리를 갈파하고 갈급한 현실적 욕구를 채워줄 수는 있을지언정 영혼의 기갈을 해소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감탄을 불러 일으켜도 인격적인 감화나 내적인 감동에는 미치지 못한다. 귀먹은 영혼의 고막을 찢고 돌처럼 딱딱한 영혼을 깨뜨릴 하늘의 나팔이 되지 못한다.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한다. 그 뉘라서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세상의 변두리를 벗어나 중앙으로 내달릴 것인가? 말씀의 용사들이 횃불을 들고 일어나 견고한 진을 향해 소리를 내질러야 한다. 진취적인 영혼만이 진격할 수 있고 진격하는 메신저만이 난공불락의 성도 취한다. 우리는 말씀의 충만을 경험해야 한다. 사람의 해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해석을 기대해야 한다. 말씀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사신 하나님이시여! 제게 말씀을 주십시오! 바로 “그 말씀”을, 능력의 말씀을, 뇌성이 되고 벽력이 되어 산을 부수고 땅을 뒤집을 권세 있는 자의 언어를 주십시오! 정교하게 다듬은 언어를 혀에 감추고 입술로 내뱉어 잠든 영혼을 깨우고 병든 영혼을 고치고 상한 영혼을 싸매고 방황하는 영혼을 이끌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바로 “그 말씀”을 주십시오! 미욱한 종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전하는 말씀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주님이 부는 나팔, 두드리는 북이 되어 깨어지고 부서지기까지 울리게 하옵소서!
잠든 영혼을 깨우는 말씀만이 시대를 깨울 수 있다. 병든 영혼을 고치는 말씀만이 시대의 아픔을 고칠 수 있다. 상한 영혼을 싸매는 말씀만이 상처 입은 인류의 가슴을 치료할 수 있다. 방황하는 영혼을 이끄는 말씀만이 표류하는 시대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만이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이런 말씀을 받으려면 자신을 먼저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덧칠해진 인간의 욕망과 세속주의의 찌꺼기를 벗겨내야 한다. 전령의 가슴에서 탐욕의 그늘을 제하고 뱀처럼 사특함으로 갈라진 혀를 봉합해야 한다. 회개만이 유일한 길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원래 말씀을 받던 그 위치에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다윗으로 시작했다가 골리앗이 되어버린 자아를 사정없이 내쳐야 한다.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에 비로소 권능의 말씀이 임한다. 그러기에 계속 간구해야 한다.
외치는 한 마디 한마디마다 내 생명의 시간이 설혹 단축된다 할지라도, 외쳐야만 할 말씀만 외칠 수 있도록 “그 말씀”을 주십시오! 한 영혼을 천국에 가까이 이르게 하는 만큼 내 영혼이 지옥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지옥의 극심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니 영혼을 얻는 “그 말씀”을 오늘 제게 주십시오! 살아서 이루지 못할 거룩한 뜻이라면 죽어서라도 이루겠사오니 주님의 의지를 펼치는 하늘의 음성을 제 귀에 들려주시고 제 입술에 실려 주십시오! 저의 시대가 다하기까지 외치고 다시 외치겠나이다!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라
아무리 외치고 주장해도 소용없겠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련다. “메신저로서 나는 오로지 말씀에 파묻혀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도 부족해서 꿈속에서까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도 부족해서 무덤 속에서까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외치며 살아야 한다. 말씀이 내 안에, 내가 그 말씀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 말씀과 자신의 진정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일체가 되고 일치를 이루는 말씀의 사람이어야 한다. 진리 안에서 삶을 통하여 변화의 능력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 말씀이 심령에 차고 넘쳐서 의식과 생각을 사로잡고 언어와 동작을 통제케 해야 한다. 그토록 많이 읽었음에도, 수천 절의 말씀을 암송했어도, 아직도 필자는 말씀에 목마르다. 메신저로서 나가 나 되기 위해선 정녕 말씀으로 말씀 되게 해야 하는데 말씀의 너른 바다에서 수영은커녕 겨우 발목을 적시며 물장난이나 하는 수준이니 여전히 부끄럽다.
시대의 아픔을 감싸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들추는 말씀이어야 한다.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할 시대에 취침나팔 같은 말씀은 변질된 말씀이다. 죽일 기계를 예비하고 있는 때의 말씀은 평안의 복음이 아니라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한 말씀이어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한가한 잡담을 말씀에다 섞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재난이 다가오는데 태평스런 말씀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오늘 이 시대를 향한 말씀은 피리 소리에 춤추기보다는 슬픈 애곡에 따라 가슴 치는 말씀 사역이 되어야 한다. 과녁을 빗나간 말씀의 화살은 인간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말씀의 폭죽들이 제아무리 시끄럽게 터져도 반짝 허공만 비출 뿐 폭발시키는 힘은 없다. 폭발력을 상실한 폭죽 같은 말씀들은 영광의 보좌에 미치지를 못하고 하나같이 보좌의 주님을 비켜간다.
우리의 말씀이 그러하다. 영광이 빠져나간 말씀은 무게를 잃었고 능력을 상실한 말씀은 길이가 줄었고 생기가 빠져나간 말씀은 그 깊이를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말씀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고 그 길이는 짧고 깊이 또한 옅어졌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벨사상 왕의 연회석 때 왕궁 벽에 쓰인 글씨만이 아니다. 메신저이면서 말씀의 영광 없는 메시지 전달에 매달렸던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경고문이다. 하나님 영광이 부재한 말씀에는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피리를 불어댄들 하늘의 천사들이 춤출 리 만무이다. 말씀의 영광을 되찾음으로 말씀이 장중함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말씀의 능력을 회복함으로 말씀이 제 길이를 확보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생기를 솟구치게 함으로 말씀의 깊이를 확보해야 한다. “말씀으로 말씀 되게 하라!”(Let the Word be the Word).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바로 “그 말씀”이 되게 해야 한다. “그 말씀”이 영혼에 꽂히는 살, 사탄을 찌르는 창, 죄악을 베는 칼이 되어야 한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이름 예수
주님 앞에 엎드려 보라! 눈을 감으면 보인다. 당장이라도 하강할듯한 불 말과 불 병거들이! 말씀의 빛과 죄의 어둠에 휘감겨 엎치락뒤치락하는 인간의 지친 영혼이! 지상에 있는 모든 말씀의 강단마다 말씀을 받드는 천사가 옹립해 있고 밖의 그늘진 곳에는 마귀의 졸개들이 부산을 떨고 있는 모습이! 제대로 엎드리면 들린다. 울부짖는 영혼들의 탄식 소리와 성령의 깊은 한숨이! 말씀이 마치 하늘과 땅을 뒤덮은 거대한 거울이 되어 사방을 환히 비추고 있다. 높낮이를 달리 하며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긴 여운이 귀를 울리지 아니하는가? 온 세상을 뒤덮어올 재앙의 붉은 기운이 진노의 포도주 잔에 가득 찼다. 죄악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주님이 이 시대를 외면하시고 심판자의 몸을 일으키신다. 그럼에도 교회는 임박한 심판의 날을 앞두고서 경성의 채찍 대신에 부드러운 방석을 깔고 앉아 영혼을 위한 자장가를 노래하고 평안과 축복을 읊조린다.
이제 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없어도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이름 말고도 붙들 만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리와 명성이, 부귀와 권력이 부침(浮沈)의 교회사, 그 그늘 속에서 변형된 교회의 사방 모서리마다 깊이 뿌리내렸고 거룩한 이름에 상치되는 괴이한 이름들이 사람들의 영혼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하나님의 모습은 원상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상당수의 믿는 자들은 천상의 거주자 되기에 한참 부족한 지경에 놓여졌다. 부요와 안락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아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예수의 이름 없이도 건재함을, 더 번창하고 자유로움을....... 확언컨대 예수 이름을 저버린 교회는 이미 망조가 들었다. 예수 이름이 없는 삶엔 일말의 희망도 없다. 단언하건대 예수 이름 없는 개인이나 교회는 반드시 폭망한다.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것이 존귀하신 예수의 이름이요 목숨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onomati tou Iesou Christou)이 지닌 권세와 능력(exousia kai dynamis), 은혜와 축복(charis kai makarismos), 기적과 영광(semeia kai doxa)을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